제1장
길을 빌려 달라
1591년 12월 ~ 1592년 4월 · 거절 대신 길을 열었다
원래 역사의 조선은 “명을 치러 갈 테니 길을 빌려 달라”는 일본의 요구를 거절했고, 1592년 4월 부산포에 상륙한 일본군이 조선 땅을 짓밟으며 임진왜란이 시작되었다. 이 이야기는 그 갈림길에서 다른 쪽으로 걷는다. 이번에는 조선의 왕이 길을 열어 주었다. 칼 대신 길이 열린 땅에서, 왕과 적장과 바다의 장수가 저마다 다른 셈을 시작한다.
I · 국서
섣달 그믐을 앞둔 밤이었다. 편전 화로에는 벌써 두 번 숯을 갈아 넣었다. 내관들까지 다 물린 방에 남은 것은 왕과 좌의정 류성룡, 그리고 바닥에 펼쳐 놓은 왜의 국서 한 장이었다.
국서는 대마도주 소 요시토시가 승려 겐소를 데리고 다시 들고 온 것이었다. 지난봄 통신사가 돌아왔을 때 황윤길은 반드시 군사가 온다 했고, 김성일은 그자 눈이 쥐 같으니 두려울 것 없다 했다. 조정은 듣기 좋은 쪽을 골랐고, 왕도 그랬다. 이번 글에는 그런 틈이 없었다. 명을 치러 갈 터이니 길을 빌려 달라고 했다.
선조“좌상, 이것 좀 다시 읽어 보시오. 과인은 세 번을 읽었소. 읽을 때마다… 글자가 칼로 보이오.”
왕은 말을 하면서 옥대 고리를 엄지로 돌렸다. 딸깍, 딸깍. 제 귀에도 거슬렸지만 손이 멈추지 않았다.
류성룡“전하, 신이 보기에 이건 청하는 글이 아니옵니다. 거절하면 그 길을 칼로 열겠다는 통보이옵니다.”
선조“낮에 그 중이 뭐라 했는지 기억하오? 길만 빌려주면 조선 땅 풀 한 포기도 안 다친다 했소. 경은 그 말을 믿소?”
류성룡“믿지 않사옵니다. 다만 신이 안 믿는다 해서… 저들이 안 오는 것도 아니옵고.”
선조“그러니 경은 어찌 보오. 거절하면 어찌 되겠소?”
류성룡“왜는 조선을 먼저 밟고 지나갈 것이옵니다. 대마도에서 들려오는 말로는 군사가 십오만이라 하옵니다. 동래가 무너지고 상주가 무너지면, 도성까지는 스무 날도 안 걸리옵니다.”
류성룡은 그 말을 하고 입을 다물었다. 무릎 위의 손이 소매 속으로 들어갔다가 나왔다. 왕은 그 버릇이 싫었다. 저 소매가 움직이고 나면 대개 더 듣기 싫은 말이 나왔다.
선조“그럼 받아들이면 어찌 되오. 대국은 재작년에야 태조대왕 계보를 바로잡아 주셨소. 이백 년을 빌어서 얻은 거요. 그걸 받은 왕이 대국 원수한테 길을 내주었다고… 사관은 그리 적을 것이오.”
왕의 목소리가 처음으로 높아졌다. 선조는 중종의 손자였으나 아버지는 왕이 아니었다. 즉위한 날부터 그는 신하들이 절을 올릴 때마다 그 허리가 얼마나 깊이 숙여지는지 곁눈으로 쟀다. 대국을 배신한 왕. 그 몇 글자는 떠올리기만 해도 목덜미가 뜨거워졌다.
류성룡“전하, 사관이 전하 속마음까지 적지는 못하옵니다. 적는 건 하신 일이옵고… 그러니 무엇을 하시든, 백성이 몇이나 살았는지부터 보시옵소서.”
선조“경은 말이 쉽구려. 경은 사초에 한 줄 적히고 말겠지만 과인은 묘호가 남소. 백 년 뒤 유생들이 그 묘호를 부르며 침을 뱉을지 절을 할지, 그게 이 종이 한 장에 걸렸단 말이오.”
왕은 국서를 집어 들었다가 도로 내려놓았다. 종이는 화로 열기에 살짝 휘어 있었고, 붉은 인장이 불빛에 피처럼 번들거렸다. 류성룡은 그 인장에서 눈을 떼지 않았다. 왕은 그게 괘씸했다.
선조“과인이 묻는 건 하나요. 어느 쪽이 덜 죽소? 돌려 말하지 말고.”
류성룡은 무릎 위의 손을 한 번 폈다가 다시 쥐었다. 그리고 왕이 끝내 입에 담지 못한 말을 대신 꺼냈다.
류성룡“길을 여는 쪽이옵니다, 전하.”
왕은 고개를 끄덕이지 않았다. 다만 옥대 고리를 돌리던 엄지가 멈추었다. 방 안이 갑자기 너무 조용해서 화로 속 숯이 내려앉는 소리까지 들렸다.
II · 첫닭
촛불이 손가락 한 마디만큼 짧아지는 동안 둘은 지도를 사이에 두고 앉아 있었다. 부산포에서 한양, 한양에서 평양, 평양에서 의주. 붉은 선은 원래 사신들이 오가던 길이었다.
선조“길만 빌려준다고 쓰시오. 군량 없다, 길잡이 없다, 군사 없다. 그 세 줄 글자는 경이 직접 고르시오.”
류성룡“그리하겠사옵니다. 다만 왜군이 지나는 고을마다 수령은 남겨 두어 백성을 단속해야 하옵니다. 백성이 먼저 낫이라도 들면, 그 길은 하루 만에 싸움터가 되옵니다.”
선조“그리하시오. 그리고 도성은 비우지 마시오. 왕이 달아나면 그건 길을 빌려준 게 아니라 나라를 내준 거요.”
류성룡“전하의 뜻을 받들겠사옵니다.”
대답을 듣고 나서 왕은 다시 옥대 고리를 만졌다. 이번에는 돌리지 않고 손바닥으로 꽉 움켜쥐었다.
선조“남은 건 명이오. 황제께 무어라 아뢰어야 하겠소. 아니… 아뢰기는 해야 하겠소?”
류성룡은 바로 답하지 않았다. 왕도 그 침묵을 알아들었다. 의주로 밀사를 보내 요동도사에게 귀띔하면 조선은 얼굴이 둘이 되고, 입을 다물면 이기는 쪽에 나라를 판돈으로 거는 셈이었다.
류성룡“알리면 명은 압록강에 군사를 세우겠지요. 그럼 왜는 언젠가 그 까닭을 캐물을 것이옵고… 알리지 않으면, 명이 질 때 조선은 살고 명이 이길 때 조선은 죄인이 되옵니다.”
선조“경은 꼭 이렇게 두 갈래를 똑같이 달아서 내려놓는구려. 고르는 건 과인 몫이라고.”
류성룡“신이 달아 볼 수 있는 건 거기까지이옵니다. 마지막은 전하께서 정하셔야 하옵니다.”
선조“좌상, 과인이 어릴 적 하성군으로 불릴 때 말이오. 명종대왕께서 익선관을 써 보라 하신 적이 있소. 형들은 냉큼 머리에 썼지. 과인은 이게 어찌 신하가 쓸 물건이냐 하고 내려놓았소. 그 한마디로 여기 앉은 거요.”
류성룡“신도 그 이야기를 들었사옵니다.”
선조“헌데 오늘은 못 내려놓겠구려. 어느 쪽을 집어도… 머리가 무겁소.”
왕은 웃었는지 한숨을 쉬었는지 모를 소리를 냈다. 창호지 너머에서 첫닭이 울었고, 화로의 숯은 하얗게 재가 되어 있었다.
선조의 선택
III · 밀사
사역원의 젊은 역관 박의길이 편전에 불려 온 것은 이튿날 밤 삼경이었다. 한어를 잘한다 했고, 들어와 절을 올린 뒤로 한마디도 먼저 하지 않았다. 왕은 그게 마음에 들었다.
선조“이 봉서는 요동도사 손에만 닿아야 하오. 길에서 누가 묻거든 의주 목사에게 가는 세찬이라 하시오.”
박의길“전하, 소인이 도중에 붙잡히면 어찌하오리까.”
선조“그때는 과인을 모른다 하시오. 과인도 그대를 모른다 할 것이오.”
봉서는 왕이 손수 쓴 것이었다. 왜가 길을 빌리러 오니 조선은 막을 힘이 없어 열어 줄 수밖에 없다, 대국은 압록강을 미리 굳게 지키시라. 끝에는 이 글을 읽으시거든 불에 넣어 주십사 하는 한 줄을 덧붙였다.
박의길은 봉서를 솜옷 안감에 꿰매 넣고 절을 올렸다. 왕은 그가 문지방을 넘을 때까지 옥대 고리를 손가락으로 천천히 굴렸다.
선조“좌상, 과인은 오늘부터 얼굴이 둘이오. 하나는 왜한테, 하나는 명한테.”
류성룡“얼굴이 둘이면… 어느 쪽에서든 숨은 쉬실 수 있사옵니다.”
선조“그러다 언젠가는 둘 다 들키겠지. 그날은 하나도 안 남을 거요.”
류성룡“그 봉서가 불에 들어간다면 들킬 일도 없사옵니다.”
선조“대국 장수가 과인 부탁을 들어줄 것 같소? 과인 같으면 상자에 넣어 두겠소. 언젠가 쓸모가 있을 테니.”
류성룡은 대답하지 못했다. 봉서가 불에 들어가지 않으리라는 것쯤은 붓을 들기 전부터 알고 있었다. 마루에는 젊은 역관이 남긴 발자국이 희미하게 젖어 있었다.
새벽이 되기 전, 말 한 필이 돈의문을 빠져나갔다. 의주까지는 천 리가 넘었다. 그 길 위에는 머지않아 왜의 군사가 가득 찰 터였다.
다른 선택을 했다면…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면, 노란 비단에 싼 칙서는 놋쇠 자물쇠를 단 상자에 들어갔을 것이다. 열쇠가 옥대 고리에 부딪히는 소리를 류성룡은 오래 보고 있었다.
III · 칙서
날이 밝자 왕은 내관을 시켜 붉은 옻칠 상자 하나를 가져오게 했다. 그 안에는 명 황제가 내린 칙서가 노란 비단에 싸여 있었다.
선조“좌상, 이것 좀 보시오. 황제께서는 조선을 예의의 나라라 하셨소.”
류성룡“그러하옵니다, 전하.”
왕은 칙서를 펼치지 않았다. 손끝으로 비단 결을 한 번 쓸어 보고는 도로 상자에 넣었다.
선조“대국은 멀고, 칼은 가깝소. 과인도 그 거리를 잴 줄은 아오.”
류성룡“명에는 아무 말씀도 아니 하시겠다는 뜻이옵니까.”
선조“과인은 그리 말한 적 없소. 경이 그리 들었을 뿐이지.”
왕은 놋쇠 자물쇠를 채우고 열쇠를 옥대 고리에 걸었다. 열쇠가 고리에 부딪혀 짧게 울렸다. 지난밤 내내 손끝에서 나던 바로 그 소리였다.
류성룡은 그 열쇠를 오래 보았다. 왕은 그 시선이 귀찮아 몸을 조금 돌렸다. 의주 너머 요동 사람들은 아무것도 모른 채 봄을 맞을 테고, 왜군은 거리낄 것 없이 압록강 앞에 설 터였다.
선조“이기는 쪽이 정해지면, 그때 이 상자를 다시 여시오.”
류성룡“지는 쪽이 정해지면 어찌하오리까.”
선조“그땐 경이 과인을 못 말린 신하가 되는 거지. 과인은 경을 벌하는 척할 테니, 경은 벌받는 척해 주시오.”
류성룡은 엎드렸다. 왕은 웃자고 한 말이었는데, 방 안에서 웃은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류성룡“전하, 신은 벌받는 척은 하겠사옵니다. 헌데 백성은… 척으로 끝나지 않사옵니다. 그것만은 잊지 마시옵소서.”
왕은 대답하지 않았다. 창밖을 보다가, 오늘은 볕이 좋다고만 했다. 옥대에 걸린 열쇠가 햇빛을 받아 잠깐 반짝였다가, 왕이 돌아서자 다시 그늘로 들어갔다.
다른 선택을 했다면…
그 밤 젊은 역관을 불렀다면, 솔기에 봉서를 꿰맨 솜옷 한 벌이 새벽 돈의문을 빠져나갔을 것이다. 왕은 옥대 고리만 굴렸고, 류성룡은 불에 들어갔어야 할 한 줄이 어디로 가는지 따라가 보았다.
I · 약장수
1592년 2월, 히젠 나고야의 언덕은 하루 종일 시끄러웠다. 돌 끄는 인부들의 구령, 쇠망치 소리, 소달구지 바퀴 삐걱대는 소리가 바닷바람에 섞여 그칠 줄을 몰랐다.
지난가을에야 땅을 고르기 시작한 성은 벌써 천수각 돌담을 올리고 있었다. 전국의 다이묘들이 그 둘레에 저마다 진영을 짓는 통에, 언덕 전체가 큰 장날 같았다.
고니시 유키나가는 그 소음 한가운데에서 사위 소 요시토시가 내미는 조선의 답서를 받아 들었다. 손목에 감은 흑단 묵주가 종이 끝에 닿아 사각거렸다.
소 요시토시“장인어른, 조선 왕이 길을 열었습니다. 다만 길만입니다. 군량도 길잡이도 군사도 없다고 분명히 적었습니다.”
고니시“길만이라. 물건은 팔되 짐꾼도 수레도 안 빌려준다… 그 말이군.”
소 요시토시“그래도 거절은 아닙니다. 거절이었으면 대마도는 이번 봄을 못 넘겼을 겁니다.”
고니시는 답서를 다시 접고, 접힌 자국을 손톱으로 한 번 더 눌렀다. 사카이 약재상 집 아들로 자라는 동안 그는 상대가 웃으며 도장을 찍을 때마다 장부를 두 번씩 들여다보았다. 이 종이는 몇 번을 봐야 할지 몰랐다.
고니시“요시토시, 조선 사람들이 이걸 쓸 때 얼굴이 어떻더냐.”
소 요시토시“좌의정이 직접 나왔습니다. 말이 적었고, 끝까지 웃지 않았습니다.”
고니시“안 웃었다라. …그럼 값은 안 깎겠군. 대신 다시 오지도 않겠고.”
그때 성벽 위에서 높은 그림자가 내려왔다. 긴 에보시 투구를 쓴 가토 기요마사가 나무묘법연화경 깃발을 든 부하들을 뒤에 거느리고 있었다.
가토“약장수, 조선 놈들이 뭐라더냐. 머리를 숙였다더냐? 바닥에 이마를 박았어?”
고니시“가토 공, 머리보다 값진 것을 내놓았습니다. 길입니다.”
가토“길만? 그럼 밥은 누가 주나. 내 병사들더러 길바닥 흙을 퍼먹으란 말이냐.”
가토는 침을 뱉는 대신 짧게 염불을 외고 돌아섰다. 고니시를 볼 때마다 늘 저랬다. 고니시는 차라리 침을 뱉고 가 주었으면 싶었다.
소 요시토시“장인어른, 가토 공은 저렇게 대놓고 비웃는데 어찌 가만히 계십니까. 저 같으면 벌써 한마디 했습니다.”
고니시“요시토시, 사카이 어른들이 늘 하던 소리가 있다. 큰소리 치는 손님은 겁낼 것 없다고. 겁나는 건 말없이 저울 눈금만 들여다보는 손님이지. 가토 공은 큰소리를 친다. 그러니… 아직은 괜찮다.”
고니시는 사위의 눈이 제 손에 가 있는 걸 보았다. 묵주를 감은 손가락 마디가 하얗게 질려 있었다. 대마도는 조선과 일본 사이에 끼어 쌀 한 톨까지 조선 무역에 기대어 사는 섬이었고, 장인의 셈이 틀리면 제일 먼저 가라앉을 곳도 그 섬이었다.
소 요시토시“조선 예조 관원이 답서를 내주면서 한마디를 붙였습니다. 길 빌려준 손님이 집 안 그릇까지 집어 가면, 그때는 주인도 몽둥이를 든다고요.”
고니시“그 말은 답서에 안 적혀 있지?”
소 요시토시“적혀 있지 않습니다.”
고니시“그럼 그 말을 잘 적어 둬라. 태합께서는 적힌 것만 읽으시지. 그런데 나중에 가서 값을 매기는 건 꼭 안 적힌 쪽이더라.”
소 요시토시“장인어른, 태합께는 무어라 올리시겠습니까.”
고니시“그건… 오늘 밤 장부를 맞춰 봐야 알겠다.”
II · 장부
그날 밤 고니시의 진막에는 등불 하나와 승려 겐소만 남았다. 바깥에서는 아직도 횃불 아래 돌을 쌓는 소리가 들렸다.
겐소“태합께서는 조선 왕이 무릎을 꿇었다는 말을 기다리고 계십니다. 길만 빌려준다는 말은 기다리지 않으십니다.”
고니시“알고 있소. 지난해 쓰루마쓰 님을 잃으신 뒤로 그분은 땅 얘기만 하시지. 지도를 펼쳐 놓고 손가락으로 꾹꾹 누르시는 걸 몇 번이나 봤소.”
겐소“그렇다면 답은 정해진 것 아닙니까.”
고니시는 묵주 알을 하나씩 굴렸다. 세례를 받던 날 신부가 손목에 감아 준 것이었다. 셈이 막히면 알을 세는 버릇이 그날부터 붙었다.
고니시“겐소 스님, 사카이에서 제일 무서운 소문이 뭔지 아시오? 저 집 저울이 틀린다, 그 한마디요. 그 소리 한 번 나면 그 가게는 끝이오.”
겐소“그러나 저울을 그대로 보여 주었다가 손님이 화를 내면 가게가 불탈 수도 있습니다. 지난번 통신사 때도 우리는 글을 몇 번이나 고쳐 올리지 않았습니까.”
고니시“그땐 조선이 아무것도 안 내놨을 때고. 이번엔 조선이 진짜 물건을 내놨소. 진짜 물건에 엉뚱한 꼬리표를 달아 놓으면… 언젠가 누가 들춰 보겠지.”
겐소“가토 공 같은 사람이 말입니까.”
고니시“그 사람은 글을 안 읽소. 칼로 읽지. 그래서 무섭다는 거요.”
겐소는 염주를 굴리다 말고 고니시의 손목을 보았다. 고니시는 묵주를 멈췄다가 멋쩍게 다시 굴렸다. 부처의 알과 성모의 알이 한 진막 안에서 똑같이 달그락거렸다.
고니시“곧이곧대로 올리면 태합께서는 조선이 우릴 안 믿는다는 걸 아시겠지. 꾸며 올리면… 그 값은 언젠가 누군가 치러야 하고.”
겐소“그 누군가가 장군이 될 수도, 조선 왕이 될 수도 있겠지요.”
고니시“어느 쪽이든 장부 쓴 놈이 그 값을 치르는 일은 잘 없지. 그게 이 장사의 고약한 데요.”
밖에서 누가 횃불을 떨어뜨렸는지 짧은 고함과 함께 불티가 진막 천에 비쳤다. 고니시는 그쪽을 잠깐 보았다가 다시 붓을 들었다. 붓끝에 먹을 묻혔지만 종이에 닿기 전에 멈추었다.
고니시는 대답 대신 등불을 낮추었다. 진막 천에 비친 자기 그림자가 저울대처럼 한쪽으로 기울어 있었다.
고니시 유키나가의 선택
III · 정직의 값
오사카성의 넓은 방에서 히데요시는 조선의 답서를 끝까지 읽게 했다. 고니시는 엎드린 채, 한 글자도 빼지 않고 올렸다고 다시 아뢰었다.
히데요시“길만이라. 길만 빌려준다고?”
방 안이 얼어붙었다. 그러나 다음 순간 히데요시는 무릎을 치며 웃었다.
히데요시“좋다, 좋다! 길만이라도 좋다. 원숭이는 길만 있으면 된다. 나무는 내가 알아서 탄다!”
시동들이 따라 웃었고 고니시도 이마를 바닥에 댄 채 숨을 내쉬었다. 그러나 그 웃음이 다 가라앉기도 전에 가토가 입을 열었다.
가토“태합 전하, 길만 내준다는 말은 조선이 우리를 믿지 않는다는 뜻입니다. 군량도 길잡이도 없으면 그놈들은 우리 등 뒤에서 무엇을 할지 모릅니다.”
히데요시의 웃음이 뚝 끊겼다. 그는 오른손의 여섯째 손가락으로 부채를 톡톡 두드리며 고니시를 내려다보았다.
히데요시“아고스티뇨, 그대 생각은 어떠냐.”
고니시“전하, 조선은 숨기지 않고 값을 불렀습니다. 그런 상대는 적어도 뒤에서 저울을 만지지는 않습니다.”
가토“장사꾼끼리는 그렇겠지. 싸움터에선 그런 놈부터 죽어.”
히데요시“둘 다 그만. 그래, 그럼 그 정직이 얼마짜리인지 두고 보자. 군량은 조선 땅에 들어가서 다시 이야기한다.”
물러 나오는 복도에서 고니시는 묵주를 꽉 쥐었다. 등 뒤에서 가토가 경을 외우는 소리가 낮게 따라왔다.
고니시는 복도 끝까지 걸으며 셈을 했다. 답서를 그대로 올린 값이 무엇으로 돌아올지. 군량이라는 한 단어가 장부 맨 아래에 무겁게 남았다. 조선 땅에 들어가 그 말을 다시 꺼내는 날, 정직한 답서를 써 준 조선 사람들의 얼굴이 어떻게 변할지 벌써 보이는 것 같았다. 끝까지 웃지 않았다던 그 얼굴이었다.
다른 선택을 했다면…
글을 고쳐 올렸다면, 히데요시는 고니시를 다실로 불러 손수 물을 끓였을 것이다. 찻잔 굽에 묵주가 부딪히는 동안 고니시는 차가 뜨거운지 미지근한지도 알 수 없었다.
III · 식은 차
고쳐 쓴 글은 짧았다. 조선 왕이 태합의 위엄을 우러러 머리를 숙이고, 대군이 지나는 길을 삼가 받들겠다는 내용이었다.
히데요시는 그 글을 두 번 읽게 하고는 고니시를 다실로 불렀다. 천하를 쥔 노인이 무장 하나를 위해 손수 물을 끓이고 있었다. 고니시는 영광인지 겁낼 일인지 가늠이 서지 않았다.
히데요시“아고스티뇨, 그대는 참 좋은 장사꾼이다. 바다 건너 왕 하나를 통째로 사 왔구나.”
고니시“전하의 위엄이 값을 치른 것이옵니다. 소인은 그저 장부를 들고 갔을 뿐입니다.”
히데요시는 찻솔을 내려놓고 직접 찻잔을 내밀었다. 고니시는 두 손으로 그것을 받았고, 손목의 묵주가 찻잔 굽에 부딪혀 작게 울렸다.
히데요시“조선 왕이 내 앞에 무릎 꿇는 날을 보겠구나. 이 원숭이가 말이다! 명을 치고 나면 그 왕을 북경까지 데리고 가서 내 옆에 앉혀야겠다.”
노인은 소년처럼 웃었다. 죽은 아들 이야기를 꺼내지 않은 지 처음으로 한 달이 넘었다고 시동이 나중에 귀띔해 주었다.
고니시는 차를 마셨다. 이상하게도 뜨거운지 미지근한지 알 수가 없었다.
히데요시“어떠냐, 내 차 맛이. 솔직히 말해 봐라.”
고니시“평생 마셔 본 차 가운데 가장 비싼 차이옵니다.”
히데요시는 그 대답이 마음에 들었는지 또 크게 웃었다. 고니시는 그 웃음소리 사이로 자기 장부에 처음 적힌 붉은 글자 한 줄을 떠올렸다.
다실을 나서자 밤바람이 찼다. 고니시는 묵주를 풀어 손바닥에 감았다. 언젠가 조선 왕이 정말로 바다를 건너와야 하는 날이 오면, 그 빚은 누가 갚나. 묵주 알은 몇 바퀴를 돌아도 처음 자리로 돌아왔고, 그때마다 본 적도 없는 조선 왕의 얼굴이 거기 있었다.
다른 선택을 했다면…
답서를 한 자도 고치지 않고 올렸다면, 오사카의 넓은 방에서 히데요시는 먼저 무릎을 치고 웃었을 것이다. 그 웃음이 가라앉기도 전에 가토가 입을 열었다.
I · 일기
임진년 정월 초하루, 맑음. 이순신은 그날부터 일기를 쓰기 시작했다. 첫 줄에는 날씨를 적고, 둘째 줄에는 어머니를 떠나 남쪽에서 두 번째 설을 맞는다고 적었다.
전라좌수사로 내려온 지 꼭 한 해였다. 그사이 그는 진마다 돌며 무너진 성벽을 쌓게 했다. 활 쏘는 날을 정해 군관들 솜씨를 장부에 적었고, 게으른 자는 곤장을 쳤다. 부지런한 자는 이름을 불러 칭찬했다.
2월 열엿새, 흐림. 조정의 공문이 순천을 거쳐 여수 전라좌수영에 닿았다. 화친이 정해졌으니 수군을 줄여 백성의 폐를 덜고 격군을 돌려보내라는 내용이었다.
송희립“영감, 공문을 다시 읽어 드릴까요.”
이순신“되었네. 한 번 들으면 되네. 바람이 동쪽에서 부는군. 오늘은 배를 띄우지 말게.”
송희립은 더 묻지 않고 공문을 개어 상 위에 올려 두었다. 이순신은 그 손놀림을 보며, 저 사람도 이제 내 날씨 얘기를 알아듣는구나 싶었다.
이순신은 붓을 들었다가 내려놓았다. 일본군 십오만이 조선 땅을 지나 명으로 간다고 했다. 땅의 길은 조정이 빌려주었다. 바다의 길은 어찌 되나. 공문에는 그 얘기가 한 줄도 없었다.
이순신“희립이, 고음천에 사람을 보내 어머님 기침이 좀 나으셨는지 알아보게. 약재가 모자라면 내 녹봉에서 덜어 보내고.”
송희립“예, 영감. 그런데 격군들은 어찌합니까. 벌써 소문을 듣고 집에 갈 날을 묻는 자들이 있습니다. 봄갈이가 코앞이라 다들 마음이 들떠 있습니다.”
이순신“묻거든 아직 모른다 하게. 사실 모르니까. 아는 척하다가 말이 틀리면 그게 더 곤란하네.”
송희립“영감께서는 정말 모르십니까.”
이순신“나도 모르네. 그러니 오늘은 활이나 쏘세. 공문 붙들고 앉아 있는 것보다는 그게 낫네.”
오후에 이순신은 동헌 뒤 활터에 섰다. 과녁까지는 백 보가 넘었고, 바닷바람이 옆에서 불어 화살이 자꾸 오른쪽으로 흘렀다. 그는 첫 순에서 세 발을 놓쳤고, 둘째 순부터는 바람을 셈에 넣어 다섯 발을 모두 과녁에 꽂았다.
송희립“영감, 오늘은 바람이 고약한데도 다 맞히십니다. 저는 두 발 겨우 꽂았습니다.”
이순신“첫 순은 다 놓쳤네. 봤잖은가. 이런 바람에 맞혀 봐야 맞힌 거지, 바람 없는 날이야 누가 못 맞히나.”
군관들이 차례로 활을 당기는 동안 이순신은 과녁 너머 바다를 보았다. 물빛이 납처럼 무거웠다. 저 바다로 왜선 수백 척이 들어와 해안을 따라 서쪽으로 올라온다고 치자. 그 배들이 칼을 뽑지 않는다고 누가 장담하나. 공문은 그 얘기를 하지 않았고, 조정은 아마 생각도 안 해 봤을 터였다.
이순신“희립이, 진마다 남아 있는 판옥선 수를 다시 세어 오게. 썩은 배, 쓸 만한 배, 고치면 쓸 배를 나누어서.”
송희립“공문대로 줄이시려는 겁니까.”
이순신“줄이든 늘리든, 먼저 세어 봐야 알지. 몇 척인지도 모르고 줄일 수는 없잖은가.”
그는 그날 일기에 공문 이야기를 적지 않았다. 흐림, 동풍, 동헌에서 활 열 순, 어머님 소식 없음이라고만 적었다.
II · 용머리
선소의 배는 반쯤 모습을 갖추고 있었다. 판옥선의 몸체 위에 둥근 덮개를 씌우고, 그 위에 송곳을 박을 자리를 미리 뚫어 둔 배였다.
나대용이 대패를 내려놓고 이순신에게 다가왔다. 손톱 밑까지 송진이 배어 있었고, 눈은 사흘을 못 잔 사람처럼 붉었다.
나대용“영감, 용머리는 다음 달 초면 붙입니다. 3월 말이면 포를 걸어 시험해 볼 수 있습니다. 덮개 위 송곳도 거의 다 벼렸습니다.”
이순신“서두르지 말게. 배는 서두르면 물이 새네.”
나대용“그런데 공문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이 배도 멈춰야 하는 겁니까. 소인은 이 배를 짓겠다고 고향 나주에서 내려온 사람입니다.”
이순신이 대답하기 전에 녹도만호 정운이 성큼성큼 걸어 들어왔다. 얼굴이 붉게 달아 있었다.
정운“영감, 왜놈들이 길은 빌린다면서 바다는 왜 안 빌리는지 아십니까. 바다는 벌써 제 것이라고 여기기 때문입니다!”
이순신“목소리를 낮추게. 배 짓는 사람들이 듣네.”
정운“들으라고 하는 말입니다. 왜선 수백 척이 부산에 들어온다는데, 우리는 격군을 돌려보내고 배를 멈춘다니요. 그놈들이 마음을 바꾸면 그다음은 누가 막습니까.”
이순신은 반쯤 지은 배의 갈빗대를 손바닥으로 쓸었다. 나무는 아직 덜 말라 축축했다.
이순신“운이, 공문을 어기면 어찌 되는지 아는가. 어명을 어긴 장수가 되네. 조정은 그런 장수한테 바다를 안 맡기네.”
정운“그럼 어명대로 하시겠다는 겁니까.”
이순신“그런데 어명 받든다고 바다를 비워 두면… 그 바다를 백성이 어찌 보겠나. 나는 지금 그 사이에 끼어 있네.”
나대용과 정운은 서로 얼굴을 보았다. 영감이 이렇게 길게 말하는 것을 둘 다 처음 보았다.
이순신“운이, 오늘 하늘이 어떤가.”
정운“흐립니다. 비가 올 것 같습니다.”
나대용“영감, 하나만 여쭙겠습니다. 이 배를 처음 그리실 때 무엇을 생각하셨습니까.”
이순신“적이 배에 못 올라오게 하는 것. 그것 하나였네. 왜놈들은 배를 붙여 건너오는 싸움에 능하니까. 건너올 자리를 없애 버리면 되지.”
나대용“그 적이 지금은 손님이 되었습니다.”
이순신“손님이면 신은 벗고 들어오겠지. 신 신은 채로 들어오면, 그때 가서 볼 일이고.”
이순신“운이, 오늘 하늘이 어떤가.”
정운“흐립니다. 비가 올 것 같습니다.”
이순신“그래, 비가 올 것 같네. 그러니 오늘은 지붕부터 덮게. 다른 건 내일 보세.”
정운은 그 말이 무슨 뜻인지 몰라 입을 다물었다. 이순신 자신도 아직 그 뜻을 다 정하지 못하고 있었다.
이순신의 선택
III · 거적
2월 그믐, 비. 이순신은 어명을 따랐다. 판옥선 건조를 멈추고, 격군 가운데 절반을 골라 고향으로 돌려보냈다.
나대용은 다 깎아 놓은 용머리를 차마 버리지 못하고 거적으로 덮었다. 빗물이 거적 위에 고였다가 흙바닥으로 흘러내렸다.
나대용“영감, 이것은 그냥 두겠습니다. 썩게 두더라도 제 손으로 쪼개지는 못하겠습니다.”
이순신“그리하게. 덮어만 두게. 거적이 젖으면 새것으로 갈아 주고.”
격군들은 봇짐을 지고 선소 앞 흙길을 따라 걸어갔다. 어떤 이는 뒤를 돌아보았고, 어떤 이는 한 번도 돌아보지 않았다. 열여섯 살 난 막내 격군 하나는 노를 쥐던 손바닥을 바지에 자꾸 문질렀다.
정운“영감, 저치들 다시 부르려면 몇 달은 걸립니다. 노 젓는 손이 하루아침에 생깁니까.”
이순신“알고 있네. 그러니 이름을 적어 두게. 어느 마을 누구인지, 한 사람도 빠짐없이.”
정운은 그제야 고개를 들어 영감의 눈을 보았다. 이순신은 속으로 이름 적은 장부를 어디에 둘지 따지고 있었다.
이순신“어머님이 늘 하시던 말씀이 있네. 나라에서 받은 건 나라에 돌려드리라고. 오늘은 사람을 돌려드리는 걸세. 부를 날이 오면… 그땐 내가 직접 데리러 가겠네.”
정운“그날이 오지 않으면요.”
이순신“그럼 저 거적 밑 나무가 썩겠지. 썩으면… 차라리 그게 낫지.”
정운은 그 말을 듣고 한참 서 있다가 장부를 가지러 갔다. 빗속에서 그가 적은 이름은 모두 백스물한 명이었다. 막내 격군의 이름은 맨 끝 줄에 있었다.
그날 밤 이순신은 일기에 아무 일도 적지 않았다. 종일 비, 저녁에 바람이 조금 잦아들었다고만 적고 붓을 놓았다.
다른 선택을 했다면…
장부에 조운선 수리라 적었다면, 나대용은 밤마다 횃불을 켜고 용머리를 붙였을 것이다. 한 달 뒤 소포 앞바다에는 천지를 울리는 소리가 났다.
III · 물기둥
장부의 그 줄에는 조운선 수리라는 넉 자만 적혔다. 송희립은 그 글자를 쓰는 동안 붓끝이 떨리지 않게 숨을 참았다.
송희립“영감, 감사의 군관이 와서 장부를 넘겨 보면 어찌합니까.”
이순신“조운선도 배고, 이것도 배일세. 배를 고치고 있다는 말이 거짓은 아니지. 뭘 고치는지 다 적지 않았을 뿐이야.”
그렇게 한 달이 갔다. 격군들은 돌아가지 않았고, 나대용은 밤마다 횃불을 켜고 용머리를 붙였다. 정운은 녹도에서 쓸 만한 장정들을 몰래 골라 노 젓는 법을 다시 가르쳤다.
3월 스무이렛날, 맑음. 이순신은 그날 일기 첫 줄에 날씨를 적고, 둘째 줄에 소포에서 거북선의 포를 시험했다고 적었다.
나대용“영감, 쏩니다!”
천지가 한 번 울렸다. 배의 옆구리에서 흰 연기가 피어오르고, 한참 앞의 바다에서 하얀 물기둥이 솟았다가 무너졌다.
정운“됐습니다, 영감! 저게 왜선 옆구리였으면 통째로 뒤집혔을 겁니다!”
이순신“그러면 되었네. 오늘은 여기까지 하게. 포는 닦아서 덮어 두고.”
정운은 영감이 더 기뻐하지 않는 게 이상하다는 얼굴이었다. 이순신은 물기둥이 무너진 자리를 오래 보고 있었다. 귀가 아직 멍했다.
이 배가 언젠가 누구를 향하게 될지 그는 아직 몰랐다. 왜선일 수도 있고, 어쩌면 이 배를 숨긴 죄를 묻는 조정일 수도 있었다.
이순신“희립이, 고음천에 소식을 보내게. 바다가 잔잔하다고, 어머님은 걱정 마시라고. 그 말 말고는 아무것도 적지 말게.”
송희립“예, 영감. 바다가 잔잔하다고만 적겠습니다.”
그날 저녁 나대용은 포신을 기름 먹인 천으로 감싸고, 용머리 위에 다시 거적을 덮었다. 이번 거적은 감추기 위한 것이었다.
다른 선택을 했다면…
어명을 따랐다면, 선소에는 거적을 덮은 용머리 위로 비가 고였을 것이다. 정운은 빗속에서 격군들의 이름을 한 줄씩 장부에 적고 있었다.
4월 13일, 부산포. 왜선 칠백 척이 들어왔다. 칼을 뽑지 않은 채로. 조선은 길을 열었고, 이제 그 길 위로 무엇이 오갈지는 아무도 장담할 수 없었다.
네 선택이 연 2장 루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