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을 열다

1592 · 조선이 길을 열어 주었다면

인터랙티브 대체역사 · 1~3장

루트 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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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장 · 공통길을 빌려 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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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장 · r1압록강의 겨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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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장 · r2요양성이 무너진 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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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장 · r3두 얼굴이 들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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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장 · r4입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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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장 · T1조명 연합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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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장 · T2한양 다시 불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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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장 · T3두 황제의 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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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장 · T4바다만 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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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장

길을 빌려 달라

1591년 12월 ~ 1592년 4월 · 거절 대신 길을 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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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래 역사의 조선은 “명을 치러 갈 테니 길을 빌려 달라”는 일본의 요구를 거절했고, 1592년 4월 부산포에 상륙한 일본군이 조선 땅을 짓밟으며 임진왜란이 시작되었다. 이 이야기는 그 갈림길에서 다른 쪽으로 걷는다. 이번에는 조선의 왕이 길을 열어 주었다. 칼 대신 길이 열린 땅에서, 왕과 적장과 바다의 장수가 저마다 다른 셈을 시작한다.

시점 1 / 3선조조선의 왕

I · 국서

섣달 그믐을 앞둔 밤이었다. 편전 화로에는 벌써 두 번 숯을 갈아 넣었다. 내관들까지 다 물린 방에 남은 것은 왕과 좌의정 류성룡, 그리고 바닥에 펼쳐 놓은 왜의 국서 한 장이었다.

국서는 대마도주 소 요시토시가 승려 겐소를 데리고 다시 들고 온 것이었다. 지난봄 통신사가 돌아왔을 때 황윤길은 반드시 군사가 온다 했고, 김성일은 그자 눈이 쥐 같으니 두려울 것 없다 했다. 조정은 듣기 좋은 쪽을 골랐고, 왕도 그랬다. 이번 글에는 그런 틈이 없었다. 명을 치러 갈 터이니 길을 빌려 달라고 했다.

선조“좌상, 이것 좀 다시 읽어 보시오. 과인은 세 번을 읽었소. 읽을 때마다… 글자가 칼로 보이오.”

왕은 말을 하면서 옥대 고리를 엄지로 돌렸다. 딸깍, 딸깍. 제 귀에도 거슬렸지만 손이 멈추지 않았다.

류성룡“전하, 신이 보기에 이건 청하는 글이 아니옵니다. 거절하면 그 길을 칼로 열겠다는 통보이옵니다.”

선조“낮에 그 중이 뭐라 했는지 기억하오? 길만 빌려주면 조선 땅 풀 한 포기도 안 다친다 했소. 경은 그 말을 믿소?”

류성룡“믿지 않사옵니다. 다만 신이 안 믿는다 해서… 저들이 안 오는 것도 아니옵고.”

선조“그러니 경은 어찌 보오. 거절하면 어찌 되겠소?”

류성룡“왜는 조선을 먼저 밟고 지나갈 것이옵니다. 대마도에서 들려오는 말로는 군사가 십오만이라 하옵니다. 동래가 무너지고 상주가 무너지면, 도성까지는 스무 날도 안 걸리옵니다.”

류성룡은 그 말을 하고 입을 다물었다. 무릎 위의 손이 소매 속으로 들어갔다가 나왔다. 왕은 그 버릇이 싫었다. 저 소매가 움직이고 나면 대개 더 듣기 싫은 말이 나왔다.

선조“그럼 받아들이면 어찌 되오. 대국은 재작년에야 태조대왕 계보를 바로잡아 주셨소. 이백 년을 빌어서 얻은 거요. 그걸 받은 왕이 대국 원수한테 길을 내주었다고… 사관은 그리 적을 것이오.”

왕의 목소리가 처음으로 높아졌다. 선조는 중종의 손자였으나 아버지는 왕이 아니었다. 즉위한 날부터 그는 신하들이 절을 올릴 때마다 그 허리가 얼마나 깊이 숙여지는지 곁눈으로 쟀다. 대국을 배신한 왕. 그 몇 글자는 떠올리기만 해도 목덜미가 뜨거워졌다.

류성룡“전하, 사관이 전하 속마음까지 적지는 못하옵니다. 적는 건 하신 일이옵고… 그러니 무엇을 하시든, 백성이 몇이나 살았는지부터 보시옵소서.”

선조“경은 말이 쉽구려. 경은 사초에 한 줄 적히고 말겠지만 과인은 묘호가 남소. 백 년 뒤 유생들이 그 묘호를 부르며 침을 뱉을지 절을 할지, 그게 이 종이 한 장에 걸렸단 말이오.”

왕은 국서를 집어 들었다가 도로 내려놓았다. 종이는 화로 열기에 살짝 휘어 있었고, 붉은 인장이 불빛에 피처럼 번들거렸다. 류성룡은 그 인장에서 눈을 떼지 않았다. 왕은 그게 괘씸했다.

선조“과인이 묻는 건 하나요. 어느 쪽이 덜 죽소? 돌려 말하지 말고.”

류성룡은 무릎 위의 손을 한 번 폈다가 다시 쥐었다. 그리고 왕이 끝내 입에 담지 못한 말을 대신 꺼냈다.

류성룡“길을 여는 쪽이옵니다, 전하.”

왕은 고개를 끄덕이지 않았다. 다만 옥대 고리를 돌리던 엄지가 멈추었다. 방 안이 갑자기 너무 조용해서 화로 속 숯이 내려앉는 소리까지 들렸다.

II · 첫닭

촛불이 손가락 한 마디만큼 짧아지는 동안 둘은 지도를 사이에 두고 앉아 있었다. 부산포에서 한양, 한양에서 평양, 평양에서 의주. 붉은 선은 원래 사신들이 오가던 길이었다.

선조“길만 빌려준다고 쓰시오. 군량 없다, 길잡이 없다, 군사 없다. 그 세 줄 글자는 경이 직접 고르시오.”

류성룡“그리하겠사옵니다. 다만 왜군이 지나는 고을마다 수령은 남겨 두어 백성을 단속해야 하옵니다. 백성이 먼저 낫이라도 들면, 그 길은 하루 만에 싸움터가 되옵니다.”

선조“그리하시오. 그리고 도성은 비우지 마시오. 왕이 달아나면 그건 길을 빌려준 게 아니라 나라를 내준 거요.”

류성룡“전하의 뜻을 받들겠사옵니다.”

대답을 듣고 나서 왕은 다시 옥대 고리를 만졌다. 이번에는 돌리지 않고 손바닥으로 꽉 움켜쥐었다.

선조“남은 건 명이오. 황제께 무어라 아뢰어야 하겠소. 아니… 아뢰기는 해야 하겠소?”

류성룡은 바로 답하지 않았다. 왕도 그 침묵을 알아들었다. 의주로 밀사를 보내 요동도사에게 귀띔하면 조선은 얼굴이 둘이 되고, 입을 다물면 이기는 쪽에 나라를 판돈으로 거는 셈이었다.

류성룡“알리면 명은 압록강에 군사를 세우겠지요. 그럼 왜는 언젠가 그 까닭을 캐물을 것이옵고… 알리지 않으면, 명이 질 때 조선은 살고 명이 이길 때 조선은 죄인이 되옵니다.”

선조“경은 꼭 이렇게 두 갈래를 똑같이 달아서 내려놓는구려. 고르는 건 과인 몫이라고.”

류성룡“신이 달아 볼 수 있는 건 거기까지이옵니다. 마지막은 전하께서 정하셔야 하옵니다.”

선조“좌상, 과인이 어릴 적 하성군으로 불릴 때 말이오. 명종대왕께서 익선관을 써 보라 하신 적이 있소. 형들은 냉큼 머리에 썼지. 과인은 이게 어찌 신하가 쓸 물건이냐 하고 내려놓았소. 그 한마디로 여기 앉은 거요.”

류성룡“신도 그 이야기를 들었사옵니다.”

선조“헌데 오늘은 못 내려놓겠구려. 어느 쪽을 집어도… 머리가 무겁소.”

왕은 웃었는지 한숨을 쉬었는지 모를 소리를 냈다. 창호지 너머에서 첫닭이 울었고, 화로의 숯은 하얗게 재가 되어 있었다.

선조의 선택

III · 밀사

사역원의 젊은 역관 박의길이 편전에 불려 온 것은 이튿날 밤 삼경이었다. 한어를 잘한다 했고, 들어와 절을 올린 뒤로 한마디도 먼저 하지 않았다. 왕은 그게 마음에 들었다.

선조“이 봉서는 요동도사 손에만 닿아야 하오. 길에서 누가 묻거든 의주 목사에게 가는 세찬이라 하시오.”

박의길“전하, 소인이 도중에 붙잡히면 어찌하오리까.”

선조“그때는 과인을 모른다 하시오. 과인도 그대를 모른다 할 것이오.”

봉서는 왕이 손수 쓴 것이었다. 왜가 길을 빌리러 오니 조선은 막을 힘이 없어 열어 줄 수밖에 없다, 대국은 압록강을 미리 굳게 지키시라. 끝에는 이 글을 읽으시거든 불에 넣어 주십사 하는 한 줄을 덧붙였다.

박의길은 봉서를 솜옷 안감에 꿰매 넣고 절을 올렸다. 왕은 그가 문지방을 넘을 때까지 옥대 고리를 손가락으로 천천히 굴렸다.

선조“좌상, 과인은 오늘부터 얼굴이 둘이오. 하나는 왜한테, 하나는 명한테.”

류성룡“얼굴이 둘이면… 어느 쪽에서든 숨은 쉬실 수 있사옵니다.”

선조“그러다 언젠가는 둘 다 들키겠지. 그날은 하나도 안 남을 거요.”

류성룡“그 봉서가 불에 들어간다면 들킬 일도 없사옵니다.”

선조“대국 장수가 과인 부탁을 들어줄 것 같소? 과인 같으면 상자에 넣어 두겠소. 언젠가 쓸모가 있을 테니.”

류성룡은 대답하지 못했다. 봉서가 불에 들어가지 않으리라는 것쯤은 붓을 들기 전부터 알고 있었다. 마루에는 젊은 역관이 남긴 발자국이 희미하게 젖어 있었다.

새벽이 되기 전, 말 한 필이 돈의문을 빠져나갔다. 의주까지는 천 리가 넘었다. 그 길 위에는 머지않아 왜의 군사가 가득 찰 터였다.

다른 선택을 했다면…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면, 노란 비단에 싼 칙서는 놋쇠 자물쇠를 단 상자에 들어갔을 것이다. 열쇠가 옥대 고리에 부딪히는 소리를 류성룡은 오래 보고 있었다.

III · 칙서

날이 밝자 왕은 내관을 시켜 붉은 옻칠 상자 하나를 가져오게 했다. 그 안에는 명 황제가 내린 칙서가 노란 비단에 싸여 있었다.

선조“좌상, 이것 좀 보시오. 황제께서는 조선을 예의의 나라라 하셨소.”

류성룡“그러하옵니다, 전하.”

왕은 칙서를 펼치지 않았다. 손끝으로 비단 결을 한 번 쓸어 보고는 도로 상자에 넣었다.

선조“대국은 멀고, 칼은 가깝소. 과인도 그 거리를 잴 줄은 아오.”

류성룡“명에는 아무 말씀도 아니 하시겠다는 뜻이옵니까.”

선조“과인은 그리 말한 적 없소. 경이 그리 들었을 뿐이지.”

왕은 놋쇠 자물쇠를 채우고 열쇠를 옥대 고리에 걸었다. 열쇠가 고리에 부딪혀 짧게 울렸다. 지난밤 내내 손끝에서 나던 바로 그 소리였다.

류성룡은 그 열쇠를 오래 보았다. 왕은 그 시선이 귀찮아 몸을 조금 돌렸다. 의주 너머 요동 사람들은 아무것도 모른 채 봄을 맞을 테고, 왜군은 거리낄 것 없이 압록강 앞에 설 터였다.

선조“이기는 쪽이 정해지면, 그때 이 상자를 다시 여시오.”

류성룡“지는 쪽이 정해지면 어찌하오리까.”

선조“그땐 경이 과인을 못 말린 신하가 되는 거지. 과인은 경을 벌하는 척할 테니, 경은 벌받는 척해 주시오.”

류성룡은 엎드렸다. 왕은 웃자고 한 말이었는데, 방 안에서 웃은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류성룡“전하, 신은 벌받는 척은 하겠사옵니다. 헌데 백성은… 척으로 끝나지 않사옵니다. 그것만은 잊지 마시옵소서.”

왕은 대답하지 않았다. 창밖을 보다가, 오늘은 볕이 좋다고만 했다. 옥대에 걸린 열쇠가 햇빛을 받아 잠깐 반짝였다가, 왕이 돌아서자 다시 그늘로 들어갔다.

다른 선택을 했다면…

그 밤 젊은 역관을 불렀다면, 솔기에 봉서를 꿰맨 솜옷 한 벌이 새벽 돈의문을 빠져나갔을 것이다. 왕은 옥대 고리만 굴렸고, 류성룡은 불에 들어갔어야 할 한 줄이 어디로 가는지 따라가 보았다.

시점 2 / 3고니시 유키나가일본군 제1군 대장

I · 약장수

1592년 2월, 히젠 나고야의 언덕은 하루 종일 시끄러웠다. 돌 끄는 인부들의 구령, 쇠망치 소리, 소달구지 바퀴 삐걱대는 소리가 바닷바람에 섞여 그칠 줄을 몰랐다.

지난가을에야 땅을 고르기 시작한 성은 벌써 천수각 돌담을 올리고 있었다. 전국의 다이묘들이 그 둘레에 저마다 진영을 짓는 통에, 언덕 전체가 큰 장날 같았다.

고니시 유키나가는 그 소음 한가운데에서 사위 소 요시토시가 내미는 조선의 답서를 받아 들었다. 손목에 감은 흑단 묵주가 종이 끝에 닿아 사각거렸다.

소 요시토시“장인어른, 조선 왕이 길을 열었습니다. 다만 길만입니다. 군량도 길잡이도 군사도 없다고 분명히 적었습니다.”

고니시“길만이라. 물건은 팔되 짐꾼도 수레도 안 빌려준다… 그 말이군.”

소 요시토시“그래도 거절은 아닙니다. 거절이었으면 대마도는 이번 봄을 못 넘겼을 겁니다.”

고니시는 답서를 다시 접고, 접힌 자국을 손톱으로 한 번 더 눌렀다. 사카이 약재상 집 아들로 자라는 동안 그는 상대가 웃으며 도장을 찍을 때마다 장부를 두 번씩 들여다보았다. 이 종이는 몇 번을 봐야 할지 몰랐다.

고니시“요시토시, 조선 사람들이 이걸 쓸 때 얼굴이 어떻더냐.”

소 요시토시“좌의정이 직접 나왔습니다. 말이 적었고, 끝까지 웃지 않았습니다.”

고니시“안 웃었다라. …그럼 값은 안 깎겠군. 대신 다시 오지도 않겠고.”

그때 성벽 위에서 높은 그림자가 내려왔다. 긴 에보시 투구를 쓴 가토 기요마사가 나무묘법연화경 깃발을 든 부하들을 뒤에 거느리고 있었다.

가토“약장수, 조선 놈들이 뭐라더냐. 머리를 숙였다더냐? 바닥에 이마를 박았어?”

고니시“가토 공, 머리보다 값진 것을 내놓았습니다. 길입니다.”

가토“길만? 그럼 밥은 누가 주나. 내 병사들더러 길바닥 흙을 퍼먹으란 말이냐.”

가토는 침을 뱉는 대신 짧게 염불을 외고 돌아섰다. 고니시를 볼 때마다 늘 저랬다. 고니시는 차라리 침을 뱉고 가 주었으면 싶었다.

소 요시토시“장인어른, 가토 공은 저렇게 대놓고 비웃는데 어찌 가만히 계십니까. 저 같으면 벌써 한마디 했습니다.”

고니시“요시토시, 사카이 어른들이 늘 하던 소리가 있다. 큰소리 치는 손님은 겁낼 것 없다고. 겁나는 건 말없이 저울 눈금만 들여다보는 손님이지. 가토 공은 큰소리를 친다. 그러니… 아직은 괜찮다.”

고니시는 사위의 눈이 제 손에 가 있는 걸 보았다. 묵주를 감은 손가락 마디가 하얗게 질려 있었다. 대마도는 조선과 일본 사이에 끼어 쌀 한 톨까지 조선 무역에 기대어 사는 섬이었고, 장인의 셈이 틀리면 제일 먼저 가라앉을 곳도 그 섬이었다.

소 요시토시“조선 예조 관원이 답서를 내주면서 한마디를 붙였습니다. 길 빌려준 손님이 집 안 그릇까지 집어 가면, 그때는 주인도 몽둥이를 든다고요.”

고니시“그 말은 답서에 안 적혀 있지?”

소 요시토시“적혀 있지 않습니다.”

고니시“그럼 그 말을 잘 적어 둬라. 태합께서는 적힌 것만 읽으시지. 그런데 나중에 가서 값을 매기는 건 꼭 안 적힌 쪽이더라.”

소 요시토시“장인어른, 태합께는 무어라 올리시겠습니까.”

고니시“그건… 오늘 밤 장부를 맞춰 봐야 알겠다.”

II · 장부

그날 밤 고니시의 진막에는 등불 하나와 승려 겐소만 남았다. 바깥에서는 아직도 횃불 아래 돌을 쌓는 소리가 들렸다.

겐소“태합께서는 조선 왕이 무릎을 꿇었다는 말을 기다리고 계십니다. 길만 빌려준다는 말은 기다리지 않으십니다.”

고니시“알고 있소. 지난해 쓰루마쓰 님을 잃으신 뒤로 그분은 땅 얘기만 하시지. 지도를 펼쳐 놓고 손가락으로 꾹꾹 누르시는 걸 몇 번이나 봤소.”

겐소“그렇다면 답은 정해진 것 아닙니까.”

고니시는 묵주 알을 하나씩 굴렸다. 세례를 받던 날 신부가 손목에 감아 준 것이었다. 셈이 막히면 알을 세는 버릇이 그날부터 붙었다.

고니시“겐소 스님, 사카이에서 제일 무서운 소문이 뭔지 아시오? 저 집 저울이 틀린다, 그 한마디요. 그 소리 한 번 나면 그 가게는 끝이오.”

겐소“그러나 저울을 그대로 보여 주었다가 손님이 화를 내면 가게가 불탈 수도 있습니다. 지난번 통신사 때도 우리는 글을 몇 번이나 고쳐 올리지 않았습니까.”

고니시“그땐 조선이 아무것도 안 내놨을 때고. 이번엔 조선이 진짜 물건을 내놨소. 진짜 물건에 엉뚱한 꼬리표를 달아 놓으면… 언젠가 누가 들춰 보겠지.”

겐소“가토 공 같은 사람이 말입니까.”

고니시“그 사람은 글을 안 읽소. 칼로 읽지. 그래서 무섭다는 거요.”

겐소는 염주를 굴리다 말고 고니시의 손목을 보았다. 고니시는 묵주를 멈췄다가 멋쩍게 다시 굴렸다. 부처의 알과 성모의 알이 한 진막 안에서 똑같이 달그락거렸다.

고니시“곧이곧대로 올리면 태합께서는 조선이 우릴 안 믿는다는 걸 아시겠지. 꾸며 올리면… 그 값은 언젠가 누군가 치러야 하고.”

겐소“그 누군가가 장군이 될 수도, 조선 왕이 될 수도 있겠지요.”

고니시“어느 쪽이든 장부 쓴 놈이 그 값을 치르는 일은 잘 없지. 그게 이 장사의 고약한 데요.”

밖에서 누가 횃불을 떨어뜨렸는지 짧은 고함과 함께 불티가 진막 천에 비쳤다. 고니시는 그쪽을 잠깐 보았다가 다시 붓을 들었다. 붓끝에 먹을 묻혔지만 종이에 닿기 전에 멈추었다.

고니시는 대답 대신 등불을 낮추었다. 진막 천에 비친 자기 그림자가 저울대처럼 한쪽으로 기울어 있었다.

고니시 유키나가의 선택

III · 정직의 값

오사카성의 넓은 방에서 히데요시는 조선의 답서를 끝까지 읽게 했다. 고니시는 엎드린 채, 한 글자도 빼지 않고 올렸다고 다시 아뢰었다.

히데요시“길만이라. 길만 빌려준다고?”

방 안이 얼어붙었다. 그러나 다음 순간 히데요시는 무릎을 치며 웃었다.

히데요시“좋다, 좋다! 길만이라도 좋다. 원숭이는 길만 있으면 된다. 나무는 내가 알아서 탄다!”

시동들이 따라 웃었고 고니시도 이마를 바닥에 댄 채 숨을 내쉬었다. 그러나 그 웃음이 다 가라앉기도 전에 가토가 입을 열었다.

가토“태합 전하, 길만 내준다는 말은 조선이 우리를 믿지 않는다는 뜻입니다. 군량도 길잡이도 없으면 그놈들은 우리 등 뒤에서 무엇을 할지 모릅니다.”

히데요시의 웃음이 뚝 끊겼다. 그는 오른손의 여섯째 손가락으로 부채를 톡톡 두드리며 고니시를 내려다보았다.

히데요시“아고스티뇨, 그대 생각은 어떠냐.”

고니시“전하, 조선은 숨기지 않고 값을 불렀습니다. 그런 상대는 적어도 뒤에서 저울을 만지지는 않습니다.”

가토“장사꾼끼리는 그렇겠지. 싸움터에선 그런 놈부터 죽어.”

히데요시“둘 다 그만. 그래, 그럼 그 정직이 얼마짜리인지 두고 보자. 군량은 조선 땅에 들어가서 다시 이야기한다.”

물러 나오는 복도에서 고니시는 묵주를 꽉 쥐었다. 등 뒤에서 가토가 경을 외우는 소리가 낮게 따라왔다.

고니시는 복도 끝까지 걸으며 셈을 했다. 답서를 그대로 올린 값이 무엇으로 돌아올지. 군량이라는 한 단어가 장부 맨 아래에 무겁게 남았다. 조선 땅에 들어가 그 말을 다시 꺼내는 날, 정직한 답서를 써 준 조선 사람들의 얼굴이 어떻게 변할지 벌써 보이는 것 같았다. 끝까지 웃지 않았다던 그 얼굴이었다.

다른 선택을 했다면…

글을 고쳐 올렸다면, 히데요시는 고니시를 다실로 불러 손수 물을 끓였을 것이다. 찻잔 굽에 묵주가 부딪히는 동안 고니시는 차가 뜨거운지 미지근한지도 알 수 없었다.

III · 식은 차

고쳐 쓴 글은 짧았다. 조선 왕이 태합의 위엄을 우러러 머리를 숙이고, 대군이 지나는 길을 삼가 받들겠다는 내용이었다.

히데요시는 그 글을 두 번 읽게 하고는 고니시를 다실로 불렀다. 천하를 쥔 노인이 무장 하나를 위해 손수 물을 끓이고 있었다. 고니시는 영광인지 겁낼 일인지 가늠이 서지 않았다.

히데요시“아고스티뇨, 그대는 참 좋은 장사꾼이다. 바다 건너 왕 하나를 통째로 사 왔구나.”

고니시“전하의 위엄이 값을 치른 것이옵니다. 소인은 그저 장부를 들고 갔을 뿐입니다.”

히데요시는 찻솔을 내려놓고 직접 찻잔을 내밀었다. 고니시는 두 손으로 그것을 받았고, 손목의 묵주가 찻잔 굽에 부딪혀 작게 울렸다.

히데요시“조선 왕이 내 앞에 무릎 꿇는 날을 보겠구나. 이 원숭이가 말이다! 명을 치고 나면 그 왕을 북경까지 데리고 가서 내 옆에 앉혀야겠다.”

노인은 소년처럼 웃었다. 죽은 아들 이야기를 꺼내지 않은 지 처음으로 한 달이 넘었다고 시동이 나중에 귀띔해 주었다.

고니시는 차를 마셨다. 이상하게도 뜨거운지 미지근한지 알 수가 없었다.

히데요시“어떠냐, 내 차 맛이. 솔직히 말해 봐라.”

고니시“평생 마셔 본 차 가운데 가장 비싼 차이옵니다.”

히데요시는 그 대답이 마음에 들었는지 또 크게 웃었다. 고니시는 그 웃음소리 사이로 자기 장부에 처음 적힌 붉은 글자 한 줄을 떠올렸다.

다실을 나서자 밤바람이 찼다. 고니시는 묵주를 풀어 손바닥에 감았다. 언젠가 조선 왕이 정말로 바다를 건너와야 하는 날이 오면, 그 빚은 누가 갚나. 묵주 알은 몇 바퀴를 돌아도 처음 자리로 돌아왔고, 그때마다 본 적도 없는 조선 왕의 얼굴이 거기 있었다.

다른 선택을 했다면…

답서를 한 자도 고치지 않고 올렸다면, 오사카의 넓은 방에서 히데요시는 먼저 무릎을 치고 웃었을 것이다. 그 웃음이 가라앉기도 전에 가토가 입을 열었다.

시점 3 / 3이순신전라좌수사

I · 일기

임진년 정월 초하루, 맑음. 이순신은 그날부터 일기를 쓰기 시작했다. 첫 줄에는 날씨를 적고, 둘째 줄에는 어머니를 떠나 남쪽에서 두 번째 설을 맞는다고 적었다.

전라좌수사로 내려온 지 꼭 한 해였다. 그사이 그는 진마다 돌며 무너진 성벽을 쌓게 했다. 활 쏘는 날을 정해 군관들 솜씨를 장부에 적었고, 게으른 자는 곤장을 쳤다. 부지런한 자는 이름을 불러 칭찬했다.

2월 열엿새, 흐림. 조정의 공문이 순천을 거쳐 여수 전라좌수영에 닿았다. 화친이 정해졌으니 수군을 줄여 백성의 폐를 덜고 격군을 돌려보내라는 내용이었다.

송희립“영감, 공문을 다시 읽어 드릴까요.”

이순신“되었네. 한 번 들으면 되네. 바람이 동쪽에서 부는군. 오늘은 배를 띄우지 말게.”

송희립은 더 묻지 않고 공문을 개어 상 위에 올려 두었다. 이순신은 그 손놀림을 보며, 저 사람도 이제 내 날씨 얘기를 알아듣는구나 싶었다.

이순신은 붓을 들었다가 내려놓았다. 일본군 십오만이 조선 땅을 지나 명으로 간다고 했다. 땅의 길은 조정이 빌려주었다. 바다의 길은 어찌 되나. 공문에는 그 얘기가 한 줄도 없었다.

이순신“희립이, 고음천에 사람을 보내 어머님 기침이 좀 나으셨는지 알아보게. 약재가 모자라면 내 녹봉에서 덜어 보내고.”

송희립“예, 영감. 그런데 격군들은 어찌합니까. 벌써 소문을 듣고 집에 갈 날을 묻는 자들이 있습니다. 봄갈이가 코앞이라 다들 마음이 들떠 있습니다.”

이순신“묻거든 아직 모른다 하게. 사실 모르니까. 아는 척하다가 말이 틀리면 그게 더 곤란하네.”

송희립“영감께서는 정말 모르십니까.”

이순신“나도 모르네. 그러니 오늘은 활이나 쏘세. 공문 붙들고 앉아 있는 것보다는 그게 낫네.”

오후에 이순신은 동헌 뒤 활터에 섰다. 과녁까지는 백 보가 넘었고, 바닷바람이 옆에서 불어 화살이 자꾸 오른쪽으로 흘렀다. 그는 첫 순에서 세 발을 놓쳤고, 둘째 순부터는 바람을 셈에 넣어 다섯 발을 모두 과녁에 꽂았다.

송희립“영감, 오늘은 바람이 고약한데도 다 맞히십니다. 저는 두 발 겨우 꽂았습니다.”

이순신“첫 순은 다 놓쳤네. 봤잖은가. 이런 바람에 맞혀 봐야 맞힌 거지, 바람 없는 날이야 누가 못 맞히나.”

군관들이 차례로 활을 당기는 동안 이순신은 과녁 너머 바다를 보았다. 물빛이 납처럼 무거웠다. 저 바다로 왜선 수백 척이 들어와 해안을 따라 서쪽으로 올라온다고 치자. 그 배들이 칼을 뽑지 않는다고 누가 장담하나. 공문은 그 얘기를 하지 않았고, 조정은 아마 생각도 안 해 봤을 터였다.

이순신“희립이, 진마다 남아 있는 판옥선 수를 다시 세어 오게. 썩은 배, 쓸 만한 배, 고치면 쓸 배를 나누어서.”

송희립“공문대로 줄이시려는 겁니까.”

이순신“줄이든 늘리든, 먼저 세어 봐야 알지. 몇 척인지도 모르고 줄일 수는 없잖은가.”

그는 그날 일기에 공문 이야기를 적지 않았다. 흐림, 동풍, 동헌에서 활 열 순, 어머님 소식 없음이라고만 적었다.

II · 용머리

선소의 배는 반쯤 모습을 갖추고 있었다. 판옥선의 몸체 위에 둥근 덮개를 씌우고, 그 위에 송곳을 박을 자리를 미리 뚫어 둔 배였다.

나대용이 대패를 내려놓고 이순신에게 다가왔다. 손톱 밑까지 송진이 배어 있었고, 눈은 사흘을 못 잔 사람처럼 붉었다.

나대용“영감, 용머리는 다음 달 초면 붙입니다. 3월 말이면 포를 걸어 시험해 볼 수 있습니다. 덮개 위 송곳도 거의 다 벼렸습니다.”

이순신“서두르지 말게. 배는 서두르면 물이 새네.”

나대용“그런데 공문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이 배도 멈춰야 하는 겁니까. 소인은 이 배를 짓겠다고 고향 나주에서 내려온 사람입니다.”

이순신이 대답하기 전에 녹도만호 정운이 성큼성큼 걸어 들어왔다. 얼굴이 붉게 달아 있었다.

정운“영감, 왜놈들이 길은 빌린다면서 바다는 왜 안 빌리는지 아십니까. 바다는 벌써 제 것이라고 여기기 때문입니다!”

이순신“목소리를 낮추게. 배 짓는 사람들이 듣네.”

정운“들으라고 하는 말입니다. 왜선 수백 척이 부산에 들어온다는데, 우리는 격군을 돌려보내고 배를 멈춘다니요. 그놈들이 마음을 바꾸면 그다음은 누가 막습니까.”

이순신은 반쯤 지은 배의 갈빗대를 손바닥으로 쓸었다. 나무는 아직 덜 말라 축축했다.

이순신“운이, 공문을 어기면 어찌 되는지 아는가. 어명을 어긴 장수가 되네. 조정은 그런 장수한테 바다를 안 맡기네.”

정운“그럼 어명대로 하시겠다는 겁니까.”

이순신“그런데 어명 받든다고 바다를 비워 두면… 그 바다를 백성이 어찌 보겠나. 나는 지금 그 사이에 끼어 있네.”

나대용과 정운은 서로 얼굴을 보았다. 영감이 이렇게 길게 말하는 것을 둘 다 처음 보았다.

이순신“운이, 오늘 하늘이 어떤가.”

정운“흐립니다. 비가 올 것 같습니다.”

나대용“영감, 하나만 여쭙겠습니다. 이 배를 처음 그리실 때 무엇을 생각하셨습니까.”

이순신“적이 배에 못 올라오게 하는 것. 그것 하나였네. 왜놈들은 배를 붙여 건너오는 싸움에 능하니까. 건너올 자리를 없애 버리면 되지.”

나대용“그 적이 지금은 손님이 되었습니다.”

이순신“손님이면 신은 벗고 들어오겠지. 신 신은 채로 들어오면, 그때 가서 볼 일이고.”

이순신“운이, 오늘 하늘이 어떤가.”

정운“흐립니다. 비가 올 것 같습니다.”

이순신“그래, 비가 올 것 같네. 그러니 오늘은 지붕부터 덮게. 다른 건 내일 보세.”

정운은 그 말이 무슨 뜻인지 몰라 입을 다물었다. 이순신 자신도 아직 그 뜻을 다 정하지 못하고 있었다.

이순신의 선택

III · 거적

2월 그믐, 비. 이순신은 어명을 따랐다. 판옥선 건조를 멈추고, 격군 가운데 절반을 골라 고향으로 돌려보냈다.

나대용은 다 깎아 놓은 용머리를 차마 버리지 못하고 거적으로 덮었다. 빗물이 거적 위에 고였다가 흙바닥으로 흘러내렸다.

나대용“영감, 이것은 그냥 두겠습니다. 썩게 두더라도 제 손으로 쪼개지는 못하겠습니다.”

이순신“그리하게. 덮어만 두게. 거적이 젖으면 새것으로 갈아 주고.”

격군들은 봇짐을 지고 선소 앞 흙길을 따라 걸어갔다. 어떤 이는 뒤를 돌아보았고, 어떤 이는 한 번도 돌아보지 않았다. 열여섯 살 난 막내 격군 하나는 노를 쥐던 손바닥을 바지에 자꾸 문질렀다.

정운“영감, 저치들 다시 부르려면 몇 달은 걸립니다. 노 젓는 손이 하루아침에 생깁니까.”

이순신“알고 있네. 그러니 이름을 적어 두게. 어느 마을 누구인지, 한 사람도 빠짐없이.”

정운은 그제야 고개를 들어 영감의 눈을 보았다. 이순신은 속으로 이름 적은 장부를 어디에 둘지 따지고 있었다.

이순신“어머님이 늘 하시던 말씀이 있네. 나라에서 받은 건 나라에 돌려드리라고. 오늘은 사람을 돌려드리는 걸세. 부를 날이 오면… 그땐 내가 직접 데리러 가겠네.”

정운“그날이 오지 않으면요.”

이순신“그럼 저 거적 밑 나무가 썩겠지. 썩으면… 차라리 그게 낫지.”

정운은 그 말을 듣고 한참 서 있다가 장부를 가지러 갔다. 빗속에서 그가 적은 이름은 모두 백스물한 명이었다. 막내 격군의 이름은 맨 끝 줄에 있었다.

그날 밤 이순신은 일기에 아무 일도 적지 않았다. 종일 비, 저녁에 바람이 조금 잦아들었다고만 적고 붓을 놓았다.

다른 선택을 했다면…

장부에 조운선 수리라 적었다면, 나대용은 밤마다 횃불을 켜고 용머리를 붙였을 것이다. 한 달 뒤 소포 앞바다에는 천지를 울리는 소리가 났다.

III · 물기둥

장부의 그 줄에는 조운선 수리라는 넉 자만 적혔다. 송희립은 그 글자를 쓰는 동안 붓끝이 떨리지 않게 숨을 참았다.

송희립“영감, 감사의 군관이 와서 장부를 넘겨 보면 어찌합니까.”

이순신“조운선도 배고, 이것도 배일세. 배를 고치고 있다는 말이 거짓은 아니지. 뭘 고치는지 다 적지 않았을 뿐이야.”

그렇게 한 달이 갔다. 격군들은 돌아가지 않았고, 나대용은 밤마다 횃불을 켜고 용머리를 붙였다. 정운은 녹도에서 쓸 만한 장정들을 몰래 골라 노 젓는 법을 다시 가르쳤다.

3월 스무이렛날, 맑음. 이순신은 그날 일기 첫 줄에 날씨를 적고, 둘째 줄에 소포에서 거북선의 포를 시험했다고 적었다.

나대용“영감, 쏩니다!”

천지가 한 번 울렸다. 배의 옆구리에서 흰 연기가 피어오르고, 한참 앞의 바다에서 하얀 물기둥이 솟았다가 무너졌다.

정운“됐습니다, 영감! 저게 왜선 옆구리였으면 통째로 뒤집혔을 겁니다!”

이순신“그러면 되었네. 오늘은 여기까지 하게. 포는 닦아서 덮어 두고.”

정운은 영감이 더 기뻐하지 않는 게 이상하다는 얼굴이었다. 이순신은 물기둥이 무너진 자리를 오래 보고 있었다. 귀가 아직 멍했다.

이 배가 언젠가 누구를 향하게 될지 그는 아직 몰랐다. 왜선일 수도 있고, 어쩌면 이 배를 숨긴 죄를 묻는 조정일 수도 있었다.

이순신“희립이, 고음천에 소식을 보내게. 바다가 잔잔하다고, 어머님은 걱정 마시라고. 그 말 말고는 아무것도 적지 말게.”

송희립“예, 영감. 바다가 잔잔하다고만 적겠습니다.”

그날 저녁 나대용은 포신을 기름 먹인 천으로 감싸고, 용머리 위에 다시 거적을 덮었다. 이번 거적은 감추기 위한 것이었다.

다른 선택을 했다면…

어명을 따랐다면, 선소에는 거적을 덮은 용머리 위로 비가 고였을 것이다. 정운은 빗속에서 격군들의 이름을 한 줄씩 장부에 적고 있었다.

제2장 · 루트 r1

압록강의 겨울

1592년 5월 ~ 10월 · 명은 미리 알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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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조가 의주로 띄운 젊은 역관의 봉서는 요동도사의 책상 위에 먼저 닿았다. 고니시는 "길만 빌려준다"는 조선의 답서를 고치지 않고 태합에게 올렸고, 태합은 조선을 의심하지 않는 대신 밥을 더 내놓으라 했다. 그래서 일본군 15만이 평양까지 칼을 뽑지 않고 올라왔을 때, 압록강 건너편에는 명나라 깃발이 먼저 와 있었다. 길은 열렸으나 강에서 막혔고, 이제 겨울이 온다.

시점 1 / 3권율광주목사

I · 닳은 바퀴

칠월 보름, 황주 들머리 길은 수레바퀴 자국으로 깊게 패어 있었다. 광주에서 올라온 군량 수레 마흔 대가 그 골을 따라 북쪽으로 기었고, 수레마다 쌀가마 위에 지응(支應)이라 쓴 나무패가 꽂혀 덜컥거렸다.

권율은 말에서 내려 바퀴 하나를 손바닥으로 쓸었다. 쇠테가 닳아 반쯤 벗겨져 있었다. 쪼그려 앉았다 일어나는데 무릎에서 뚝 소리가 났다.

권율“이놈도 늙었구먼. 나보다 먼저 벼슬 내놓겠어.”

군관 한득룡“사또, 평양까지는 아직 사흘입니다. 왜군 쪽에서는 이틀 안에 대라고 했습니다.”

권율“이틀? 모 심고 이틀 만에 벼 베라는 소리로군. 그쪽 장수는 논에 발 한 번 안 담가 봤나 보네.”

사월에 부산포로 들어온 왜군은 칼을 뽑지 않은 채 한양을 지나 평양까지 올라왔다. 조정은 길을 열어 주었고, 고을마다 길가에 쌀과 말먹이를 쌓아 두라는 영이 내려왔다. 그런데 압록강에서 행렬이 멈췄다. 강 건너에 요동 부총병 조승훈의 기병이 먼저 진을 쳤고, 그 뒤로 이여송이라는 이름이 바람처럼 따라 들려왔다.

한득룡“명나라가 어찌 그리 빨리 알았을까요. 왜놈들이 강을 묻기도 전에 강을 막았다지 않습니까.”

권율은 대답 대신 쌀가마 새끼줄을 당겨 보았다. 그 답을 아는 사람은 한양에도 몇 안 될 터였고, 그 몇 안에 자기는 없었다. 안다고 해서 수레가 빨라지는 것도 아니었다.

권율“명이 빨리 왔으니 이 싸움은 길어지겠지. 강 하나 사이에 두고 두 나라 군사가 노려보는 동안… 그 밥은 누가 대겠나.”

한득룡“우리겠지요.”

권율“그래. 그러니 바퀴부터 갈게. 서리 내리기 전에, 겨울 오기 전에.”

해가 기울 무렵 황주 역참에 닿자 일본군 감독관이 먼저 나와 있었다. 그는 쌀가마 하나를 칼끝으로 찔러 낟알을 손바닥에 받더니, 코에 대고 냄새를 맡고는 얼굴을 찡그렸다. 통사가 옆에서 그의 말을 옮겼다.

통사“묵은쌀이 섞였다고 합니다. 태합 전하의 군사에게 묵은쌀을 먹이느냐고 묻습니다.”

권율“묵은쌀이 햅쌀보다 배는 더 부르다고 전하게. 그리고… 나도 마흔여섯에 급제한 묵은쌀이라고. 그것도 꼭 전하게.”

통사가 그걸 어떻게 옮겼는지는 모를 일이었다. 감독관은 한참 권율을 쳐다보다가 그냥 장부에 도장을 찍었다. 한득룡이 뒤에서 웃음을 참느라 어깨를 떨었다. 권율은 웃지 않았다. 감독관이 낟알을 털어 낸 자리에서, 지나가던 일본 군사 하나가 허리를 굽혀 쌀알을 주워 입에 넣고 있었다.

권율“득룡아, 저거 봐라. 땅에 떨어진 쌀을 줍는다. 이긴 군사가 저러던가.”

한득룡“저놈들이 굶고 있다는 말씀입니까.”

권율“굶기 시작했다는 거지. 배고픈 소는 남의 논두렁부터 뜯네. 두고 봐라.”

수레 행렬 뒤로는 전라도에서 올라온 소금 장수 하나가 따라붙어 있었다. 그는 밤마다 모닥불 곁에서 남쪽 바다 소식을 풀어 놓았다.

소금 장수“여수 좌수영 격군들이 죄다 고향으로 돌아왔답니다. 배는 묶이고, 왜놈 짐배가 부산에서 남해까지 제 집 마당 드나들듯 한다더군요.” 권율은 오래 불을 들여다보았다. 바다가 비었으니, 땅 위의 쌀은 이제 더 많이 실려 나갈 터였다.

소금 장수“여수 앞바다에 용대가리 달린 배가 떴다는 소문이 있습니다. 포를 쏘니 물기둥이 돛대보다 높더랍니다.” 권율은 웃지 않고 부지깽이로 불을 쑤셨다. 누가 남쪽에서 조정 몰래 볍씨를 묻어 두었구나. 자기보다 겨울을 먼저 본 사람이었다.

II · 씨나락

팔월 그믐, 중화 고을 어귀의 마을에서는 개 짖는 소리도 나지 않았다. 권율이 닿았을 때 타작마당에는 뒤주 뚜껑들이 뒤집힌 채 흩어져 있었고, 장정 열두 명이 새끼줄에 엮여 일본 군사들 사이에 서 있었다.

마을 노인“사또, 저 사람들이 씨나락까지 퍼 갔습니다. 내년 봄에 무얼 뿌리란 말씀입니까.”

권율은 노인의 손을 잠시 잡았다가 놓았다. 거칠고 차가운 손이었다. 씨나락을 퍼 가다니. 굶주린 사람이 맨 나중에 하는 짓을 남의 나라 군사가 했다면, 저쪽도 바닥이 보인다는 얘기였다.

징발대를 이끄는 자는 서른쯤 되어 보이는 하급 무사였다. 갑옷 끈이 헐렁했고 광대뼈가 불거져 있었다. 그가 무어라 길게 말하자 대마도에서 온 통사가 조선말로 옮겼다.

통사“압록강의 군사들이 굶고 있다 합니다. 태합 전하께서는 조선이 길을 빌려준 이상 길 위의 밥도 조선이 대야 한다 하셨답니다. 장정들은 짐을 지고 평양까지 갔다가 돌아온다고 합니다.”

권율“돌아온다는 말은 누가 보증하나.”

통사가 옮기자 무사가 칼자루를 툭 쳤다. 그게 대답이었다.

권율은 무사 뒤에 선 군사들을 하나씩 보았다. 짚신이 해져 맨발에 헝겊을 감은 자가 여럿이었고, 한 녀석은 퍼 담은 생쌀을 한 줌 쥐어 몰래 씹고 있었다. 사월에 칼도 안 뽑고 들어온 손님들이었다. 다섯 달째 문간에 서 있더니 이제는 주인집 부엌을 뒤지고 있었다.

권율“통사, 하나 묻겠네. 그대들 태합은 길을 빌릴 때 밥까지 빌린다고 했나.”

통사“그때는 길만이라 했습니다. 그런데 강이 막힐 줄은 아무도 몰랐습니다.”

권율“농사도 그래. 비 안 올 줄 누가 아나. 그래서 우리 동네 영감들은 곳간을 반만 열었지.”

권율 뒤에는 관군 서른과 수레꾼 예순이 있었다. 맞은편에는 조총을 멘 군사가 마흔 남짓이었고, 북쪽 평양에는 그 수백 배가 있었다. 한득룡이 권율의 소매를 슬며시 당겼다.

한득룡“사또, 여기서 칼을 뽑으면 조약이 깨집니다. 조정은 우리를 버릴 겁니다.”

권율“안다. 그런데 득룡아, 물꼬를 한 번 터 주면 논물이 다 빠진다. 오늘은 장정 열둘이지. 내일은 고을 하나고.”

한득룡“그럼 어찌하시렵니까.”

권율은 하늘을 보았다. 구름이 낮게 깔려 북쪽으로 흘러가고 있었다. 한강을 끼고 앉은 행주의 낮은 산에 버려진 옛 산성이 하나 있었다. 흙으로 쌓은 성벽에 물길이 가까워 오래 버틸 만한 곳이었다. 그러나 거기까지 가려면 이 수레들을 남쪽으로 돌려야 했다. 수레를 돌리는 순간 그는 길을 빌려준 나라의 목사가 아니라 길을 막은 역적이 된다.

권율“쉰 넘게 살면서 본 게 있네. 가뭄 든 해에 울던 놈은 굶고, 관아에 가서 화내던 놈은 옥에 갔지. 그래 봐야 벼는 안 자라더군.”

한득룡“그 말씀은 하나 마나 한 말씀 아닙니까.”

권율“그러니 지금 내가 고르는 거지. 어느 쪽으로 굶을지.”

권율의 선택

III · 빈 수레

권율은 수레 열 대의 쌀가마를 마당에 부리게 했다. 그리고 묶인 장정들 앞으로 걸어가 통사에게 말했다.

권율“쌀은 가져가라. 짐은 내 수레꾼들이 지겠다. 이 사람들은 내년 봄에 모를 내야 하네.”

수레꾼들 사이에서 웅성거림이 일었다. 광주에서부터 수레를 끌고 올라온 사람들이었고, 평양에 쌀만 내려놓으면 고향으로 내려갈 줄 알았다. 권율은 그들 앞에 섰다.

권율“미안하네. 대신 품삯은 내 녹봉에서 두 배로 치르지. 목사 녹봉이 두 배가 되면 얼마인지는 묻지 말게. 나도 계산하기 겁나니.”

통사가 옮기자 무사는 한참 권율을 보다가 고개를 아주 조금 숙였다. 새끼줄이 풀렸고, 수레꾼 열두 명이 대신 쌀가마를 졌다. 누구 하나 권율을 원망하는 눈으로 보지 않았다. 권율은 그 눈들을 피해 빈 수레바퀴만 내려다보았다.

노인은 씨나락 대신 받은 묵은쌀 앞에서 절을 했다. 그러나 풀려난 장정 하나는 절하지 않았다. 스무 살 남짓한 그는 권율 앞을 지나며 낮게 내뱉었다.

장정“사또는 피를 막으신 게 아니라 피를 미루신 겁니다.”

한득룡“이놈이 어디서.”

권율“두게, 두게. 틀린 말도 아니잖나. 저 나이 땐 나도 저랬어.”

그날 밤 권율은 장부에 '중화 지응 열 수레'라고 적었다. 그 아래에 작은 글씨로 장정들 이름을 하나씩 적었다. 조정에서 쓸모가 있을지, 왜군 손에 들어가 제 목을 벨 증거가 될지는 쓰면서도 알 수 없었다.

새벽에 노인이 와서 말했다. 어제 그 젊은이가 밤사이 산으로 들어갔다고, 혼자가 아니라 이웃 마을 장정 몇과 함께였다고 했다. 권율은 찬물로 얼굴을 씻었다. 물이 차서 이가 시렸다. 그는 장부를 다시 펴 보았다. 산으로 간 놈들 이름은 거기 없었다.

다른 선택을 했다면…

장정들을 풀어 놓으라 했다면, 화승에 불이 붙은 조총 앞으로 낫과 도리깨를 든 사람들이 하나둘 걸어 나왔을 것이다. 아낙도 있었고 노인도 있었다.

III · 흙성

권율“풀어 주게. 이 사람들은 짐꾼이 아니라 농군이야.”

통사가 옮기자 무사의 얼굴이 굳었다. 그는 조총수들에게 손짓했고, 화승에 불이 붙었다. 그런데 그 순간 마을 쪽에서 낫과 도리깨를 든 사람들이 하나둘 걸어 나왔다. 아낙도 있었고 노인도 있었다. 조총은 마흔, 사람은 백을 넘었다.

무사는 오래 셈하는 눈이었다. 그러다 칼자루에서 손을 떼고 무어라 짧게 말했다.

통사“평양에 고하겠다 합니다. 사또의 이름을 적어 가겠답니다.”

권율“제대로 적으라 하게. 권, 율. 밤 율 자일세. 가을에 떨어지는 그 밤.”

한득룡“사또, 이제 정말 돌이킬 수 없습니다.”

권율“모 낸 논은 원래 못 돌이키네. 엎으면 그해 농사는 끝이야. 그러니 이제 김이나 잘 매세.”

징발대가 물러간 뒤 권율은 수레를 남쪽으로 돌렸다. 한득룡은 하얗게 질려 있었다. 수레꾼 예순에 풀려난 장정 열둘, 길을 따라 붙은 사람들이 날마다 불어났다. 열흘 뒤 행주의 옛 산성에 닿았을 때 그 수는 오백이 넘었다.

흙성은 생각보다 낮았고 무너진 곳이 많았다. 권율은 첫날 밤부터 장정들에게 흙을 지게 했다. 논둑 쌓던 솜씨 그대로였다. 물 새는 데부터 막고, 밟아서 다지고.

보름 뒤 한양에서 사위 이항복의 편지가 왔다. 조정이 장인을 잡아 올리라는 논의를 하고 있다고, 그러나 아직 누구도 군사를 보내겠다고 나서지는 않았다고 했다. 편지 끝에는 한 줄이 덧붙어 있었다.

이항복“장인 어른, 잡혀 오시기 싫으시면 성문을 단단히 걸어 잠그십시오. 사위로서 드릴 말씀은 그뿐입니다.”

권율은 편지를 접어 품에 넣었다. 성 아래 강물 위로 첫 서리가 내리고 있었다.

다른 선택을 했다면…

수레의 쌀을 내주었다면, 수레꾼 열두 명이 쌀가마를 지고 마당을 나섰을 것이다. 풀려난 젊은 장정 하나는 절도 하지 않고 권율 앞을 지나며 낮게 한마디를 내뱉었다.

시점 2 / 3사명대사금강산 유점사의 승려

I · 스승의 편지

유월, 금강산 유점사의 오동나무에 비가 그쳤다. 처마 끝에서 떨어지는 물방울 소리가 염불처럼 고르게 이어졌고, 법당 앞 마당의 돌 틈마다 이끼가 새로 푸르렀다. 사명대사는 그 이끼를 밟지 않으려고 디딜 돌을 골라 가며 걸었다.

사명대사 유정은 묘향산에서 온 스승 서산대사의 편지를 두 번 읽고 세 번째는 접은 채로 무릎 위에 올려 두었다. 일흔셋 노승의 글씨는 여전히 곧았다.

편지에는 이렇게 적혀 있었다. 나라가 남의 군사에게 길을 빌려주었으니, 산중의 중은 무엇을 빌려줄지 생각해 두라고. 대답은 없었다. 스승은 늘 물음만 보내고 답은 보내지 않았다.

시자승“스님, 큰스님께서는 무얼 하라 하십니까.”

사명대사“밥 먹으라 하면 그대는 숟가락부터 찾나, 배고픔부터 찾나?”

시자승“숟가락이요.”

사명대사“그럼 스승님 편지에서 숟가락을 찾아보게. 나는 아직 배가 고프지 않으니.”

시자승은 편지를 받아 들고 한참 들여다보다가 울상이 되었다. 사명대사는 소리 없이 웃었다. 웃으면서도 머리는 산 아래 길에 가 있었다. 사월에 부산으로 들어온 왜군이 한양을 지나 북쪽으로 올라갔다는 소식은 장꾼과 탁발승 입을 타고 이 산까지 올라와 있었다.

시자승“스님, 왜군이 절에도 들어올까요.”

사명대사“손님이 오면 그대는 문을 닫나, 밥을 짓나?”

시자승“밥을 짓지요.”

사명대사“그럼 손님이 칼을 차고 오면 어찌하겠는가?”

시자승은 이번에는 대답하지 못했다. 사명대사도 대답해 주지 않았다. 사실은 그도 몰랐다. 스승한테 받은 물음을 그대로 넘겨준 것뿐이었다.

그날 저녁 절 문 앞에 객승 하나가 쓰러졌다. 가사가 흙투성이였고 발바닥이 다 터져 있었다. 대중이 그를 선방에 눕히고 미음을 먹였다. 사명대사는 그의 손을 오래 보았다. 손가락 마디에 굳은살이 박여 있었는데, 목탁을 쥔 굳은살이 아니라 활시위를 당긴 굳은살이었다.

사명대사“어느 절에서 오셨소?”

객승“묘향산 보현사에서 왔습니다.”

사명대사“보현사라. 그 절 앞 개울물은 차오, 미지근하오?”

객승은 대답하지 못했다. 그의 조선말 끝에는 요동 사람 억양이 묻어 있었다. 사명대사는 웃으며 미음 그릇을 다시 그의 손에 쥐여 주었다.

객승“저를 내쫓으시겠습니까.”

사명대사“부처님 집에 든 사람을 내가 무슨 수로 내쫓겠소. 내쫓으면 그대가 나가기는 하겠소?”

객승은 한참 만에 입을 열었다. 자신은 요동도사 아래 사람이며, 왜군이 북쪽으로 어떤 길을 타는지 살피러 왔다고 했다. 명나라는 봄부터 이미 알고 있었다고, 조선 쪽에서 누군가 미리 알려 왔다고 했다. 사명대사는 들고 있던 염주를 내려놓았다. 나라는 길을 빌려주면서, 다른 손으로 강 건너에 몰래 등불을 켜 둔 것이었다.

II · 높은 투구

칠월 초, 왜군이 산 아래 길을 메웠다. 흰 깃발마다 검은 글씨가 길게 내려 쓰여 있었고, 군사들은 그 글자를 입으로 외며 걸었다. 함경도로 올라가는 가토 기요마사의 2군이었다.

가토는 절 마당까지 말을 타고 들어왔다. 키가 크고 투구가 위로 길게 솟아, 대웅전 처마 끝에 투구 끝이 닿을 듯했다. 그는 말에서 내리지 않고 대중을 내려다보았다. 통사가 그의 짧은 말을 옮겼다.

가토“이 절에 명나라 놈이 숨었다. 내놔.”

대중이 술렁였다. 사명대사는 합장한 채 한 걸음 나섰다. 그는 통사를 거치지 않고 땅바닥에 나뭇가지로 한자를 적었다. 가토의 눈이 그 글자를 따라 내려왔다. 필담이었다.

사명대사“장군은 조선에서 길을 빌렸소, 땅을 빌렸소?”

가토“길.”

사명대사“그럼 이 절 마당은 길이오, 땅이오?”

가토는 한동안 말이 없었다. 그러다 소리 내어 웃었는데, 웃음이 짧고 거칠었다.

가토“나무묘법연화경. 중놈들은 어느 나라든 혀가 길군.”

사명대사“장군 깃발에 적힌 글도 짧지는 않던데. 혀 긴 걸로 치면 피차일반 아니오?”

가토가 말에서 내렸다. 그는 대웅전 앞 섬돌에 앉아 투구를 벗고 땀을 닦았다. 그 얼굴은 생각보다 젊었고, 눈 밑이 검었다.

가토의 군사 몇이 법당 안을 들여다보려 하자 그가 짧게 꾸짖었다. 군사들은 곧장 물러났다. 사명대사는 그걸 눈여겨보았다. 말 한마디에 군사가 물러나고, 부처 앞에서 신을 벗지 않는 자를 싫어하는 장수. 칼보다 경을 먼저 외는 사람이었다.

가토“물. 내 군사들 먼저.”

사명대사는 시자승에게 눈짓했다. 젊은 중들이 우물물을 길어 동이째 날랐다. 왜군 군사들은 처음에는 머뭇거리다가 가토가 고개를 끄덕이자 앞다투어 물을 마셨다. 대부분 열일곱, 열여덟 먹은 아이들이었다.

사명대사“장군, 목마른 군사에게 물을 주면 그 물은 조선 물이오, 일본 물이오?”

가토“물은 물이다.”

사명대사“그럼 길도 길이고 땅도 땅이겠구려. 장군이 뭐라 부르시든 말이오.”

가토는 대답 대신 바닥에 적힌 한자들을 발로 문질러 지웠다. 흙먼지가 일어 사명대사의 가사 자락에 내려앉았지만, 노승은 그것을 털지 않았다.

가토“나는 북쪽으로 간다. 열흘 뒤 안변에 진을 친다. 그때까지 이 절 주지가 내 진영에 와서 명나라 놈이 없다고 말해라. 아니면 내가 다시 온다.”

사명대사“장군이 다시 오시면 그때는 길로 오시겠소, 땅으로 오시겠소?”

가토는 대답 없이 투구를 다시 썼다. 군사들이 산 아래로 빠져나간 뒤 절 마당에는 말똥과 발자국만 남았다. 선방 안에서는 요동 객승이 문틈으로 그 모든 것을 보고 있었다.

시자승“스님, 이제 숟가락을 찾으셨습니까.”

사명대사“숟가락이 둘이네. 하나는 칼처럼 생겼고, 하나는 혀처럼 생겼어. …그대라면 뭘로 뜨겠나?”

사명대사의 선택

III · 닫힌 산문

사흘 만에 금강산의 절마다 사람이 왔다. 표훈사에서, 장안사에서, 이름 없는 암자에서 젊은 중들이 지팡이 대신 몽둥이를 들고 내려왔다. 사명대사는 그들을 법당 앞에 세우고 먼저 물었다.

사명대사“그대들은 절을 지키러 왔는가, 사람을 죽이러 왔는가?”

젊은 승려“절을 지키러 왔습니다.”

사명대사“그럼 절이 사람을 죽이라 하면 어쩌겠는가?”

아무도 대답하지 못했다. 사명대사는 그 침묵이 마음에 들었다. 여기서 냉큼 대답하는 놈이 있었다면 그놈부터 산으로 돌려보냈을 터였다.

산문의 빗장이 내려졌다. 그날 밤 요동 객승이 사명대사를 찾아왔다. 그는 이 길로 강을 건너 요동으로 돌아가겠다고 했다.

객승“스님께서 승병을 일으키셨다고 우리 장수께 고하겠습니다. 조선에도 일어선 사람이 있다고.”

사명대사“그대 장수가 그 말을 들으면 기뻐하겠소, 걱정하겠소? 남의 나라 중이 칼을 들었다는데.”

객승은 웃지 못했다. 사명대사는 그의 품에 짧은 편지 한 장을 넣어 주었다. 받는 이의 이름은 적지 않았다.

새벽 안개 속으로 객승이 사라졌다. 열흘이 지나도 사명대사는 안변에 가지 않았다. 대신 금강산 중들이 산문을 닫았다는 소문이 산 아래 고을마다 먼저 내려갔다. 소문은 함경도 쪽으로도, 한양 쪽으로도 흘렀다. 제 이름이 저잣거리에서 불린다는 말을 듣고, 사명대사는 목탁을 쥔 채 한동안 멍하니 앉아 있었다.

시자승“스님, 이제 우리는 중입니까, 군사입니까.”

사명대사“그대는 오늘 아침 염불을 했는가?”

시자승“했습니다.”

사명대사“그럼 오늘은 중일세. 내일 일은 내일 아침 목탁 칠 때 보세.”

그러나 그날 밤 사명대사는 혼자 법당에 앉아 오래 염불을 했다. 산문 밖 숲에서 몽둥이를 쥔 젊은 중들이 교대로 불을 지키는 소리가 들렸다. 그는 그 소리를 염불 사이사이에 세었다.

다른 선택을 했다면…

홀로 안변으로 내려갔다면, 가토는 군사들과 같은 거친 보리밥을 먹다 말고 턱으로 맞은편 자리를 가리켰을 것이다. 이틀 길을 걸어온 중 앞에서 숟가락은 내려놓지 않았다.

III · 홀몸

사명대사는 시자승도 떼어 놓고 홀로 산을 내려갔다. 안변까지는 이틀 길이었다. 목책 앞의 군사들이 창을 겨눴지만 그가 지팡이로 땅에 이름 석 자를 적자 문이 열렸다.

가토는 막사 안에서 밥을 먹고 있었다. 군사들과 같은 거친 보리밥이었다. 그는 숟가락을 놓지 않고 턱으로 맞은편 자리를 가리켰다.

가토“왔군. 목이 아깝지 않나.”

사명대사“아까운 걸 들고 왔으니 값이 있지 않겠소?”

통사가 그 말을 옮기자 가토는 숟가락을 내려놓았다. 사명대사는 말했다. 유점사에 명나라 사람은 없다고, 부처님 제자만 있다고. 거짓은 아니었다. 객승은 이틀 전 이미 강 쪽으로 떠났다.

가토“누군가 명에 알렸다. 봄부터. 넌 아나.”

사명대사“장군은 그걸 알면 무엇이 달라지오? 강이 녹소, 밥이 늘어나오?”

가토는 오래 사명대사를 노려보다가 갑자기 짧게 웃었다. 그는 막사 구석의 함에서 두루마리 하나를 꺼내 던지듯 건넸다. 손으로 베껴 쓴 법화경 한 권이었다.

가토“삼계무안 유여화택. 셋 세계에 편한 데 없다, 불난 집이다. 가져가. 네 절은 안 건드린다.”

사명대사는 두루마리를 받아 품에 넣었다. 돌아오는 길 내내 가토의 말이 귀에 붙어 떨어지지 않았다. 누군가 명에 알렸다. 그 장수는 아직 그 누군가의 얼굴을 모른다. 알게 되는 날, 저 불난 집의 불은 어느 쪽으로 번질까.

산문에 닿자 시자승이 맨발로 뛰어나왔다. 스님이 돌아오지 못할 줄 알았다며 눈이 벌갰다.

시자승“스님, 목은 무사하십니까.”

사명대사“목은 무사하네. 대신 짐이 하나 늘었어. 적장한테 경전을 얻어 온 중은 이 나라에 나 하나뿐일 걸세. 이게 복인지 빚인지는… 나도 모르겠네.”

그는 법화경 두루마리를 경장 맨 아래 칸에 넣었다. 그리고 아무에게도 가토가 물은 말을 전하지 않았다.

다른 선택을 했다면…

산문을 닫았다면, 금강산 절마다 젊은 중들이 지팡이 대신 몽둥이를 들고 내려왔을 것이다. 사명대사는 법당 앞에 그들을 세워 놓고 먼저 물었다.

시점 3 / 3가토 기요마사일본군 2군 대장

I · 두만강

구월, 두만강 건너의 여진 땅에는 사람이 없었다. 가토 기요마사의 군사들이 닿은 마을마다 화덕의 재는 식어 있었고, 우리에는 말 한 마리 남아 있지 않았다. 바람이 벌써 귓바퀴를 물어뜯었다.

가토는 함경도를 다 지나 이 강을 건너면 요동의 뒷문이 열릴 줄 알았다. 고니시 유키나가가 압록강 앞문에 묶여 있는 동안 자기가 뒷문을 따면, 태합 전하의 첫 칭찬은 자기 몫이었다. 그런데 문은 이미 안에서 잠겨 있었다.

나베시마 나오시게“포로로 잡은 여진 늙은이 말로는, 건주의 누르하치라는 추장이 봄에 요동에 사람을 보냈답니다. 일본군이 오면 마을을 비우라는 명나라의 영이 먼저 내려왔다고 합니다.”

가토“봄에.”

나베시마“예, 봄에.”

가토“약장수가 압록강에 닿기도 전이군.”

그날 밤 막사 밖에서 기침 소리가 끊이지 않았다. 가토는 투구를 벗어 두고 군사들 사이를 걸었다. 열여섯 살 난 아시가루 하나가 모닥불 곁에서 떨고 있었다. 가토는 제 어깨의 털가죽을 벗어 그 아이에게 덮어 주었다.

가토“이름.”

아시가루“헤이스케입니다.”

가토“헤이스케. 내일 아침까지 죽지 마라. 명령이다.”

막사로 돌아오는 길에 가토는 기침 소리를 셌다. 열한 번까지 세다가 그만두었다. 그는 지도를 펼쳤다. 함경도에서 두만강까지, 걸어온 길에 붉은 먹이 이어져 있었다.

가토“나무묘법연화경. 누가 알렸다. 명이 미리 안 거다.”

나베시마“조선이 길을 빌려주면서 명에 귀띔을 했다는 말씀이십니까. 그럴 배짱이 있는 왕이라고는 듣지 못했습니다.”

가토“배짱 없는 놈이니까 그런 짓을 하지. 양쪽에 다 절하는 거다.”

나베시마“장군, 어찌하시렵니까. 이대로 강을 따라 서쪽으로 가면 압록강의 고니시 님과 만나게 됩니다. 그러면 공은 나누어야 합니다.”

가토“나눈다? 약장수는 아직 강을 한 발짝도 못 건넜다. 나눌 공이 없다.”

나베시마“그렇다면 여기서 겨울을 나시렵니까. 여진 땅에서는 쌀 한 톨 나지 않습니다.”

가토는 대답하지 않고 막사 기둥에 걸린 깃발을 올려다보았다. 나무묘법연화경 일곱 글자가 바람에 흔들렸다. 그는 어려서 태합의 부엌에서 자랐고, 열다섯에 처음 창을 잡았다. 그 뒤로 빈손으로 돌아간 적은 한 번도 없었다. 빈손으로 돌아가면 태합은 웃으실 터였다. 그 웃음을 떠올리자 등줄기가 서늘했다.

가토“돌아간다. 함경도로. 거기서 밥을 찾고, 누가 명에 알렸는지 찾는다. 둘 다 찾을 때까지 남쪽으로는 안 간다.”

그는 지도를 접었다. 증거는 없었다. 그게 더 분했다. 그는 접은 지도 위에 손바닥을 올려놓고 짧게 경을 외웠다. 목소리가 낮게 가라앉자 나베시마가 슬그머니 막사를 나갔다.

II · 함흥의 왕자

시월 초, 가토는 군사를 돌려 함흥으로 내려왔다. 함흥에는 조정이 길을 위무하라고 보낸 임해군과 순화군 두 왕자가 머물고 있었다. 왕자들은 일본군을 손님으로 맞았고, 객사에 술상까지 차렸다.

그 술상이 걷힌 밤, 회령의 아전 국경인이라는 자가 가토의 막사를 찾아왔다. 그는 두 왕자가 이곳 백성에게 인심을 잃었다고, 원하면 왕자들을 장군께 바치겠다고 했다.

국경인“왕자를 쥐고 계시면 조선 조정은 장군의 말이라면 무엇이든 들을 것입니다. 함경도의 성들도 저절로 문을 열 것입니다.”

나베시마“나쁜 셈은 아닙니다. 군량이 바닥입니다. 성을 접수하면 성의 곳간도 우리 것입니다.”

같은 날 압록강의 고니시에게서 편지가 와 있었다. 태합께서 조선을 의심하지 않으시니 조선의 밥줄을 끊지 말라고, 겨울을 넘기려면 조선 고을의 곡식이 필요하다고, 자신이 이여송과 말을 나누고 있으니 조금만 기다리라고. 편지 끝에는 묵주를 쥔 사람답게 신의 가호를 빈다는 말까지 붙어 있었다.

가토“약장수가 날 가르친다.”

나베시마“고니시 님 말씀에도 일리는 있습니다. 조선이 등을 돌리면 우리는 남의 땅 한가운데 갇힙니다. 압록강도 막히고, 두만강도 막혔습니다.”

가토“그러니까 묻는다. 누가 막았나. 강이 저절로 막혔나.”

나베시마는 대답하지 못했다. 막사 안의 화로가 탁 소리를 내며 튀었다. 가토는 고니시의 편지를 다시 펼쳐 보았다. 글씨는 반듯했고 말은 부드러웠다. 가토는 그 반듯한 글씨가 꼴도 보기 싫었다.

가토“약장수는 이여송과 말을 나눈다고 한다. 적장과 말을 나누는 놈이, 조선 왕과는 무슨 말을 나눴을까.”

나베시마“장군, 그건 증거 없는 말씀입니다. 태합 전하 앞에서 그리 말씀하시면 오히려 장군께서 다치십니다.”

가토“안다. 그래서 증거를 찾는다고 했다.”

그는 편지를 화로에 넣으려다 말고 접어서 품에 넣었다. 언젠가 증거가 될지도 몰랐다.

가토는 막사 밖으로 나갔다. 눈발이 날리기 시작했다. 아시가루 헤이스케가 털가죽을 덮은 채 보초를 서고 있었다. 기침은 멎어 있었다.

가토“살았군.”

헤이스케“명령이셨습니다.”

가토는 문득 유점사의 그 중이 떠올랐다. 길을 빌렸소, 땅을 빌렸소. 그때는 웃어넘겼는데, 지금은 그 물음이 눈발처럼 목덜미에 들러붙었다. 왕자를 쥐면 이 땅은 얻은 땅이 된다. 얻은 땅에서는 백성이 밥을 내놓지 않는다. 그렇다고 빌린 길 위에 계속 서 있으면, 그는 영영 약장수 뒤에 선 사람이었다.

가토“삼계는 불난 집이다. 어디로 뛰어도 뜨겁다.”

가토 기요마사의 선택

III · 얻은 땅

새벽에 국경인의 사람들이 객사의 문을 열었고, 가토의 군사들이 들어갔다. 칼은 거의 뽑히지 않았다. 왕자들을 지키던 호위 몇이 맞섰다가 쓰러졌을 뿐이었다.

임해군“우리는 손님을 맞았을 뿐이다. 이게 무슨 짓이냐.”

가토“모신다. 겨울 동안. 안전하게.”

통사가 그 말을 옮기자 순화군의 얼굴이 하얘졌다. 가토는 두 왕자에게 따뜻한 방과 밥을 내주라 명했다. 해치지는 않았다. 볼모는 살아 있어야 값이 나간다. 그렇게 셈해 놓고 보니 그게 약장수 셈법이라, 가토는 혀끝이 썼다.

보름 사이에 함경도의 성 여섯이 문을 열었다. 곳간이 열리자 군사들의 기침이 줄었다. 헤이스케는 처음으로 배가 불러 잠들었다. 그러나 고을의 백성들은 밤마다 산으로 빠져나갔고, 빈 마을이 늘어 갔다.

가토는 나고야의 태합께 편지를 썼다. 조선이 명과 내통한 흔적이 있으니 북쪽 땅을 먼저 손에 쥐었다고, 이 땅은 이제 빌린 길이 아니라 얻은 땅이라고 적었다. 그리고 편지 끝에 한 줄을 덧붙였다.

가토“나무묘법연화경. 약장수는 강가에서 말만 나눈다. 나는 땅을 쥐었다.”

편지를 띄운 날 밤, 남쪽에서 소식이 올라왔다. 조선 조정이 두 왕자의 일로 발칵 뒤집혔고, 의주에서 명나라 장수의 막사에 조선 사람이 드나든다는 소문이었다. 가토는 품속의 고니시 편지를 꺼내 화로 불빛에 다시 읽었다.

가토“의주에 사람을 보내. 명 장수 막사에 드나드는 조선 놈이 누군지, 얼굴을 봐 와.”

나베시마“장군, 이제 조선과는 돌아설 수 없는 길로 들어섰습니다.”

가토“돌아설 길? 그딴 건 처음부터 없었다. 약장수가 있는 척했을 뿐이지.”

창밖에서는 객사에 갇힌 왕자들의 방에 늦도록 불이 켜져 있었다. 가토는 그 불빛을 보며 투구 끈을 다시 맸다.

다른 선택을 했다면…

칼을 거두었다면, 가토는 직접 객사로 가 두 왕자 앞에 투구를 벗었을 것이다. 군사들이 짊어지고 온 물건 가운데 곡식 값으로 내민 것은 은과 칼 몇 자루였다.

III · 거둔 칼

가토는 국경인을 묶게 했다. 국경인은 끌려 나가며 무어라 외쳤지만 가토는 듣지 않았다.

가토“제 나라 왕자를 판 놈이다. 나라고 안 팔겠나. 조선 관아에 넘겨.”

나베시마“군량은 어쩌시렵니까.”

가토“빌린다. 길처럼.”

이튿날 가토는 직접 객사로 가서 두 왕자 앞에 투구를 벗었다. 함경도의 성은 건드리지 않겠다고, 대신 군사들이 겨울을 넘길 곡식을 값을 치르고 사겠다고 했다. 은과 칼 몇 자루, 군사들이 짊어지고 온 물건이 값이었다.

임해군은 처음에는 믿지 않았다. 그러나 묶인 국경인이 관아로 끌려가는 것을 보고는 얼굴빛이 달라졌다. 사흘 뒤 함흥 고을에서 쌀이 나왔다. 많지는 않았지만 굶어 죽을 만큼 적지도 않았다.

가토가 칼을 거둔 건 의리 때문이 아니었다. 북쪽은 얼어붙었고 남쪽 압록강은 막혔다. 이 땅 백성까지 등을 돌리면 군사들은 두 겨울 사이에 갇혀 죽는다. 태합 전하는 아직 조선을 치라고 하지 않았다. 그리고 누가 명에 알렸는지 찾으려면 조선 사람들 입이 열려 있어야 했다.

왕자들의 가마가 남쪽으로 떠나는 아침, 가토는 말 위에서 오래 그 뒤를 지켜보았다. 가마 하나의 발이 잠깐 들리더니, 어린 순화군이 고개를 내밀어 그를 돌아보았다.

순화군“장군, 고맙다는 말은 하지 않겠소. 그러나 이 일은 잊지 않겠소.”

가토“잊지 마라. 나도 안 잊는다.”

나베시마가 무언가 물으려다 입을 다무는 게 보였다. 가토는 모른 척했다. 길가에서는 쌀가마를 내리던 조선 노인 하나가 일본 군사에게 물 한 바가지를 건네고 있었다. 군사는 머뭇거리다 고개를 숙이고 그것을 받았다.

가토“길이다. 아직은.”

헤이스케“장군, 고니시 님께 알리실 겁니까.”

가토“약장수한테는 안 알려. 태합 전하께만. 누가 명에 알렸는지, 내가 찾는다고.”

다른 선택을 했다면…

강경하게 나갔다면, 새벽 객사의 문이 열리고 두 왕자 앞에 따뜻한 방과 밥이 놓였을 것이다. 모신다는 말을 옮기는 통사 곁에서 순화군의 얼굴이 하얘졌다.

제2장 · 루트 r2

요양성이 무너진 날

1592년 5월 ~ 10월 · 명은 몰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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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조는 명 황제의 칙서를 상자에 넣어 잠갔고, 의주로는 아무도 떠나지 않았다. 고니시는 "길만 빌려준다"는 답서를 고치지 않고 그대로 올렸고, 태합은 길만 있으면 된다며 웃었다. 그래서 압록강 건너 요동은 아무것도 모른 채 여름을 맞았다. 6월, 요양성은 하루 만에 무너졌고 조선은 원하지 않은 이름 하나를 얻었다.

시점 1 / 3권율광주목사

I · 볍씨

5월 스무날, 고양 벽제 아래 마을의 보리는 이제 겨우 누런 기가 돌았다. 광주목사 권율은 조정이 붙여 준 새 직함을 몇 번 소리 내 읽어 보다가 그만두었다. 경기 길목 군량 차사원. 풀어 말하면 일본군 지나가는 길에 밥을 대고 시끄럽지 않게 하라는 자리였다.

징발대는 서른 명 남짓이었다. 앞장선 하급 무사 오카모토가 종이 한 장을 펄럭이며 역관에게 한참을 떠들었다. 듣는 동안 역관 김덕수의 입술이 점점 안으로 말려 들어갔다.

김덕수“나으리, 쌀 백 석에… 짐꾼 장정 마흔을 내랍니다. 오늘 해 지기 전까지요.”

권율“백 석? 이 마을 곳간을 다 긁어도 쉰 석이 안 나와. 말해 주게. 없는 걸 어떻게 내냐고. 칼로 쑤셔 봐야 쌀은 안 나온다고.”

김덕수가 더듬더듬 말을 옮기자 오카모토가 웃었다. 그는 칼자루를 손바닥으로 두어 번 툭툭 치더니, 마을 뒤편 독 묻어 둔 언덕 쪽으로 턱을 들었다.

마을 어른 박 노인이 권율의 소매를 잡아당겼다. 흙이 배어 손금이 까맣게 드러난 손이었다.

박 노인“사또, 저 언덕 독엔 내년 볍씨가 들었습니다. 그걸 내주면 내년엔 모를 못 냅니다. 못 내요, 사또.”

권율“아네. 아네, 영감. 저치들이야 내년에 여기 없을 사람들이니 볍씨건 쌀이건 다 똑같아 보이겠지.”

박 노인“그럼 어쩌시렵니까. 사또가 막아 주시렵니까?”

권율“막겠다는 소리는 못 하네. 나는 이 길목에서 저 사람들 밥 대라고 내려온 사람이야. 다만 밥이랑 씨는 다르다, 그 정도는 저쪽에 말해 볼 수 있지. 말이 통할지는 모르겠네만.”

권율은 언덕을 올려다보았다. 독 묻은 자리마다 흙이 조금씩 봉긋했다. 해마다 가을이면 저기 볍씨를 묻고, 봄이면 마을에서 제일 먼저 저 흙을 걷었을 것이다. 박 노인 손금이 까만 것도 아마 그 흙 때문일 터였다.

권율은 오카모토 앞으로 한 걸음 나섰다. 무릎이 뻐근했다. 쉰다섯이면 이제 서 있는 것도 일이었지만, 그는 허리를 펴고 일부러 말을 천천히 끊었다.

권율“오늘은 서른 석. 나머지는 파주에서 올라오는 관곡으로 사흘 뒤에 채우겠네. 장정은 스물. 대신 저 언덕엔 아무도 손대지 말게. 손대면 사흘 뒤 쌀도 없어.”

오카모토는 한참 노려보다가 침을 한 번 뱉고 고개를 끄덕였다. 그날 밤 권율은 관아 마루에 앉아 발바닥을 주무르며 남쪽에서 올라온 소금 장수 얘기를 들었다.

소금 장수는 여수 수영의 격군들이 봇짐을 지고 고향으로 걸어 돌아가는 것을 보았다고 했다. 수영 앞바다가 휑하니 비어 왜선이 제 집 마당처럼 드나든다는 말도 덧붙였다. 권율은 발을 주무르던 손을 멈추었다. 남쪽 바다 물꼬는 벌써 터져 있었다.

소금 장수는 여수 앞바다에서 용머리를 단 괴상한 배가 포를 쏘는 것을 멀리서 보았다고 했다. 왜선들이 그 근처를 슬금슬금 피해 다닌다는 말도 덧붙였다. 권율은 저도 모르게 마른 웃음을 흘렸다. 조정은 다 손을 놓았는데, 남쪽 끝에서 누가 아직 물꼬를 붙들고 있었다.

II · 승전

7월 초, 한양 남대문 밖 일본군 숙영지에서 밤새 북이 울렸다. 요양성이 떨어졌다고 했다. 명나라는 일본군이 압록강을 건너올 줄 꿈에도 몰랐고, 요동 성들은 문을 열어 둔 채 낮잠을 자다 무너졌다는 소문이었다.

오카모토가 술에 얼굴이 벌게진 채 권율을 찾아왔다. 이번엔 종이가 두 장이었다.

김덕수“명은 종이 호랑이랍니다. 북경까지 석 달이면 간다고요. 그러니 군량은 지금의 두 배를 내랍니다.”

권율“석 달이면 간다면서 곡식은 두 배? 그 셈은 어느 서당에서 배웠는지 좀 물어보게.”

김덕수는 그 말을 옮기지 않았다. 권율도 옮기라고 하지 않았다.

오카모토는 대답이 없는 걸 승낙으로 알았는지, 손가락 둘을 펴 보이고는 비틀비틀 돌아갔다. 그 뒤로 징발대 몇이 마을 우물가에서 술독을 깨뜨리며 낄낄댔다.

김덕수“나으리, 저것들 요양 땄다고 아주 기고만장입니다. 북경 간다는 소리가 빈말 같지도 않고요.”

권율“북경을 가든 말든. …김 역관, 처음엔 서른 석, 이번엔 두 배. 다음엔 뭘 달라겠나. 곡식 떨어지면 그다음은 사람이야. 길 좀 빌려줬다가 이게 무슨 꼴인지.”

같은 날 사위 이항복의 편지가 왔다. 도승지의 글씨가 평소답지 않게 흐트러져 있었다. 명 사신이 의주에 와서 칙서를 읽었는데, 조선 왕이 대국을 저버리고 도적에게 길을 열었으니 그 죄를 스스로 물으라는 내용이었다고 했다. 다들 그것을 전하의 목을 내놓으라는 소리로 들었다고 했다.

권율은 편지를 두 번 접고, 한 번 더 접어 품에 넣었다. 명한테는 배신자, 왜한테는 곳간. 그는 편지 든 자리를 손바닥으로 꾹 눌렀다.

어둠 속에 서 있던 박 노인이 다가왔다. 이웃 마을 얘기였다. 징발대가 장정을 끌고 가다가, 도망치는 아이 하나를 등 뒤에서 쏘았다고 했다.

박 노인“사또, 이번엔 볍씨 독까지 내놓으랍니다. 저놈들이 언덕을 파기 시작했어요. 지금요.”

권율“영감, 지금이 무슨 철인가. 물꼬를 막을 땐가, 틀 땐가. …아니, 됐네. 대답하지 말게.”

그는 행주 쪽 하늘을 오래 보았다. 한강 가 덕양산에는 무너진 옛 성터가 있었다. 손에 쥔 관군은 이백, 마을마다 낫 쥔 장정이 몇씩. 손가락으로 셈을 하다 말고 그는 주먹을 쥐었다. 조정에서는 아직 아무 명도 오지 않았다.

권율“김 역관, 저 무사한테 하룻밤만 기다려 달라 하게. 늙은이는 결정이 느리다고.”

김덕수“나으리, 정말 느리신 겁니까, 아니면 벌써 정하신 겁니까?”

권율“농사꾼은 날을 받아 놓고도 하늘을 하루 더 보네. …오늘 밤 하늘이나 보세.”

권율의 선택

III · 내준 곡식

이튿날 아침, 마을 사람들은 제 손으로 곡식 가마니를 수레에 올렸다. 우는 사람도, 말하는 사람도 없었다. 권율이 전날 밤 집집이 돌며 그렇게 하자고 부탁했다.

권율“뺏기면 피를 보네. 내주면… 그래, 허리만 아프지. 오늘은 허리만 아프세, 다들.”

박 노인“사또, 허리 아프게 다 내주고 내년엔 뭘 심습니까?”

권율은 대답 대신 언덕으로 올라갔다. 그는 볍씨 독 열 개 가운데 아홉을 징발대에 넘기고 하나를 관아 뒤뜰로 옮기게 했다. 오카모토는 손가락으로 독을 세다가 하나가 빈다는 걸 알아챘지만, 권율이 슬쩍 내민 관곡 열 석을 보더니 입을 다물었다.

권율“한 독이면 논 서른 마지기는 되네. 서른 마지기면 이듬해엔 백 마지기고. 느려. 농사는 느려, 영감. 그러니 저치들이 셈을 못 하는 거야.”

그날 밤 권율은 혼자 뒤뜰에 독을 묻었다. 삽질 몇 번에 숨이 찼고, 흙을 한 삽 덮을 때마다 품속 이항복의 편지가 가슴께에서 바스락거렸다. 배신자, 곳간. 그 편지 어디에도 이 독 얘기는 없었다.

가을이 오자 경기 길목 마을들은 조용했다. 피는 흐르지 않았고 들은 비어 갔다. 일본군 장부에는 권율의 이름 옆에 '순종'이라는 두 글자가 붙었다. 권율은 그 장부를 볼 일이 없었고, 아침마다 뒤뜰 흙이 꺼지지 않았나 한 번씩 내려다보았다.

박 노인“사또, 동네 사람들이 사또를 왜놈 앞잡이라고 수군댑니다. 저는 아니라고 했습니다만.”

권율“수군대라고 해. 내년 봄에 저 뒤뜰에서 모가 올라오면 그때 또 뭐라고들 하겠지. …영감, 그 얘기 나한테 일부러 하러 온 건가?”

박 노인은 대꾸 없이 뒤뜰로 가서 흙을 발로 꾹꾹 밟았다. 첫서리가 내릴 때까지 마을 사람 누구도 그 자리 얘기를 입 밖에 내지 않았다.

다른 선택을 했다면…

징발대를 막았다면, 새벽 어둠 속에서 장정들이 볍씨 독을 지게에 하나씩 지고 산으로 올랐을 것이다. 낫과 도리깨를 든 채 덕양산 옛 성터를 향해 걸었다.

III · 덕양산

새벽이 오기 전에 권율은 관군 이백을 깨웠다. 마을 장정들은 낫과 도리깨를 들고 따라나섰다. 볍씨 독은 장정들이 지게에 하나씩 져서 산으로 옮겼다.

오카모토의 징발대가 언덕에 왔을 때 독 묻었던 자리엔 빈 구덩이뿐이었다. 그들은 행주 쪽으로 뒤쫓아 왔다가, 덕양산 아래에서 처음으로 조선 화살을 맞았다. 두 명이 쓰러졌고 나머지는 물러났다.

김덕수“나으리, 이제 돌이킬 수 없습니다. 조정이 우리를 역적으로 몰 수도 있어요.”

권율“조정이 지금 누굴 몰 처지인가. 명한테는 역적, 왜한테는 머슴인데. 역적 하나 더 붙는다고 뭐가 달라져. …물이나 떠 오게, 목말라.”

성터라야 무너진 돌담뿐이었다. 권율은 장정들에게 목책을 세우게 하고 자기는 물길부터 찾아 산을 돌았다. 꼭대기 근처에 샘이 하나 있었다. 손을 담가 보니 차가웠고, 아껴 쓰면 석 달은 될 성싶었다.

권율“물 있지, 볍씨 있지. 이제 농사만 지으면 되겠구먼. 올해 거둘 건 왜놈 화살이고.”

장정들 사이에서 처음으로 웃음이 터졌다. 박 노인의 손자가 목책 위로 기어올라 한강을 내려다보았다. 강 건너 일본군 숙영지 불빛이 반딧불처럼 깜박였다.

사흘 뒤 일본군 장수가 보낸 사자가 산 아래 왔다. 조약을 깬 고을의 목사를 한양으로 넘기라는 말이었다. 권율은 사자에게 술 한 잔을 따라 주고 빈손으로 돌려보냈다.

그날 밤 한양 일본군 진영에서는 붓 한 자루가 바쁘게 움직였다. 조선 안에 길을 막는 자가 생겼다는 보고가 바다 건너 나고야로 떠났다. 권율은 그런 줄도 모르고 목책 너머 불빛을 세다가, 장정들에게 오늘 밤은 교대로 자라고 일렀다. 자기 차례는 맨 마지막으로 정해 두었다.

다른 선택을 했다면…

조약을 지켰다면, 마을 사람들은 제 손으로 곡식 가마니를 수레에 올렸을 것이다. 우는 사람도 말하는 사람도 없었고, 볍씨 독 하나만 관아 뒤뜰로 옮겨졌다.

시점 2 / 3사명대사금강산 유점사 승려

I · 객승

7월 그믐, 금강산 유점사의 저녁 종이 막 그쳤을 무렵이었다. 산문 밖 계곡에서 사람 그림자 열이 비척비척 올라왔다. 해진 붉은 군복에 피 묻은 무명 띠, 짚신도 없이 돌에 찢긴 맨발이었다.

맨 앞의 사내가 무릎을 꿇었다. 서툰 조선말에 필담을 섞어, 자신을 요양의 천총 왕충이라고 했다. 성이 무너지던 밤 압록강 상류로 도망쳐 산줄기를 타고 내려왔고, 동해 포구에서 배를 구해 산동으로 건너가려 한다고 했다.

젊은 승려 혜구가 하얗게 질려서 사명대사 곁으로 왔다. 스님 귀에 입을 바짝 대는 바람에 숨결이 간지러웠다.

혜구“스님, 일본군이 명나라 패잔병 찾는다는 방이 회양까지 붙었답니다. 숨겨 주면 절이 탑니다. 정말로요.”

사명대사“절이 타면 부처님도 타시나?”

혜구“그건 아니지만…….”

사명대사“그럼 뭐가 타나. 기와, 서까래. 기와야 다시 구우면 되고 서까래야 다시 깎으면 되지. …저 사람들은 어디 가서 다시 구워 오나?”

혜구는 입을 다물었다. 사명대사는 왕충의 손을 잡아 일으켰다. 손바닥 굳은살이 창자루처럼 딱딱했다.

패잔병들 가운데에는 열대여섯 살로 보이는 아이도 있었다. 아이는 왼팔을 헝겊으로 동여맨 채 이를 딱딱 부딪치며 떨었다. 사명대사가 다가가자 움찔 물러섰다가, 승복을 알아보고는 그 자리에 주저앉아 울었다.

사명대사“혜구, 이 아이 팔부터 보게. 약방에 쑥하고 송진이 있을 걸세.”

혜구“스님, 저는 아직 방을 보지 못했습니다. 이 사람들을 들이는 게 옳은지…….”

사명대사“방은 내일 보세. 팔은 오늘 썩네.”

왕충은 붓을 달라 하더니 종이에 굵게 썼다. 조선은 어찌하여 길을 열었는가. 글씨가 떨렸다.

사명대사는 종이를 한참 들여다보았다. 붓끝이 몇 번 허공에서 멈췄다. 그러다 그 아래에 작게 적었다. 길은 왕이 열었고 그 길에서 죽는 건 백성이니, 그대도 나도 그쪽 사람이오. 왕충은 그 글을 읽고 얼굴을 감쌌다.

왕충이 고개를 들어 스님 얼굴을 살폈다. 사명대사가 웃어 보이자 그제야 어깨에서 힘이 빠졌고, 뒤에 선 패잔병들도 하나둘 무릎을 꿇었다.

사명대사“자, 일단 공양부터 하시게. 옳고 그르고는 밥 먹고 따지세. 혜구, 뭐 하나. 밥 퍼 오게.”

그날 밤 패잔병 열은 공양간 뒤 장작 광에서 잠들었다. 사명대사는 혼자 대웅전에 앉아 있었다. 무릎이 저려 자세를 몇 번 고쳤고, 그때마다 촛불이 따라 흔들렸다.

밤이 깊어 혜구가 대웅전 문을 조심스레 열고 들어왔다. 아이 팔을 싸매 주고 오는 길이라며 스님 곁에 꿇어앉았다.

혜구“스님, 그 아이가 묻더군요. 조선 중은 왜 우리를 미워하지 않느냐고요.”

사명대사“뭐라고 답했나.”

혜구“모르겠다고 했습니다.”

사명대사“잘했네. 거기서 아는 척했으면 내가 꿀밤을 줬을 걸세. 나도 모르네, 사실. 미워할 사람이야 따로 있겠지. …그래, 그 아이 팔은 좀 어떻던가?”

II · 스승의 편지

사흘 뒤 묘향산에서 편지가 왔다. 일흔셋 스승 서산대사 휴정의 글씨는 여전히 하나도 떨리지 않았다. 편지는 짧았다. 산은 움직이지 않으나 산의 그림자는 해를 따라 움직인다. 네 그림자가 어디로 가는지 보아라.

혜구“스님, 이건 칼을 들라는 뜻입니까, 들지 말라는 뜻입니까?”

사명대사“자네는 어느 쪽으로 읽었나?”

혜구“모르겠습니다.”

사명대사“그럼 잘 읽은 걸세. 스승님도 모르시는 걸 적으신 거니까.”

같은 날 오후, 일본군 사자가 산문 앞에 왔다. 함경도로 올라가는 제2군 대장 가토 기요마사가 철령 아래 회양에 진을 쳤다고 했다. 가토는 법화경을 받드는 사람이라 조선의 이름난 승려와 경전을 논하고 싶으니 유점사 큰스님은 진영으로 오라는 것이었다. 사자는 돌아서다 말고 한마디를 덧붙였다. 근방 산중에 명나라 도적이 숨어든 낌새가 있으니 절마다 뒤져 보겠다고.

산 아래 마을에서 피난 온 아낙들이 공양간 앞에 모여 있었다. 일본군이 지나간 마을마다 소와 곡식이 사라졌고, 대들보를 뜯어 땔감으로 썼다고 했다. 한 아낙은 명나라에서 우리더러 배신자라 한다더라는 말을 꺼내다가, 그게 다 무슨 소용이냐며 치맛자락으로 코를 풀었다.

왕충이 장작 광에서 나와 합장했다. 그는 필담으로 썼다. 우리가 떠나면 절은 무사하겠는가.

사명대사“떠나서 어디로 가겠나. 바닷가 포구마다 일본 배요. 산을 나서는 순간 그대들은 목 하나씩이 되고, 절은 그 목을 숨겼던 절이 되지. 어느 쪽이 덜 타겠나?”

왕충은 붓을 쥔 채 한참 움직이지 않았다. 그러다 다시 썼다. 그대가 가토에게 가면 우리를 내줄 것인가.

사명대사“내줄 생각이었으면 어제 밥을 안 먹였지. 밥 먹여 놓고 팔면 그게 중인가, 장사꾼이지. …그런 소리 다시 쓰지 마시오. 종이 아깝소.”

혜구“스님, 그럼 진영에는 안 가십니까. 안 가시면 저들이 산을 뒤질 겁니다. 뒤지다가 장작 광을 열면 그때는 다 끝입니다.”

사명대사“그러니까 말일세. 산이 막든지, 내가 가서 막든지. 둘 중 하나야.”

늙은 공양주 보살이 그 말을 듣고 부엌에서 나와 앞치마에 손을 닦았다. 산 아래 마을에서 아들 둘을 짐꾼으로 빼앗긴 사람이었다.

공양주“스님, 어느 쪽이든 저는 밥이나 짓겠습니다. 싸우러 가든 말하러 가든 배는 고플 테니. 근데 쌀이 얼마 안 남았어요, 그것만 알아 두세요.”

사명대사는 스승의 편지를 다시 펼쳤다. 그림자가 어디로 가는지 보아라. 해가 기울어 제 그림자가 마당 끝까지 늘어져 있었다. 승려 백여 명이 그를 보고 있었다. 절반은 젊었고, 절반은 산 아래 마을에 부모가 있었다.

사명대사“그대들 가운데 산을 내려가고 싶은 사람은 오늘 밤 가게. 아무도 탓하지 않겠네. 남는 사람은 내일 아침 내가 무엇을 정하든 따라야 하네.”

그날 밤 산문을 나선 승려는 셋뿐이었다. 사명대사는 그 셋에게도 주먹밥을 싸 주었다.

사명대사의 선택

III · 닫힌 산문

그날 밤 유점사의 목탁은 울리지 않았다. 대신 공양간 뒤에서 장작 패는 소리가 새벽까지 이어졌다. 승려들은 장작이 아니라 박달나무를 깎아 몽둥이를 만들고 있었다.

사명대사는 대웅전 앞마당에 승려들을 모았다. 그는 가사를 벗어 개어 부처님 앞에 올려 두었다.

사명대사“계율 어기자는 게 아닐세. 살생을 막자는 거지. …그렇게 들리나? 솔직히 말해 보게.”

혜구“솔직히… 잘 모르겠습니다, 스님. 똑같이 들립니다.”

사명대사“그래, 나도 그렇네. 그 죄는 내가 지고 가지.”

명나라 패잔병 열은 산 깊은 곳 마하연 암자로 옮겨졌다. 왕충은 떠나기 전 허리에 차고 있던 작은 청동 패를 사명대사에게 건넸다. 요양 수비군 천총의 신패였다. 그는 필담으로 썼다. 언젠가 명군이 다시 압록강을 건너면 이것을 보이시오. 은혜를 아는 자가 있을 것이오.

닷새 뒤 일본군 스무 명이 산문 앞에 왔다. 산문은 닫혀 있었고 그 앞에 승려 백이 서 있었다. 아무도 몽둥이를 휘두르지 않았지만 아무도 비켜서지 않았다. 일본군 대장은 한참을 노려보다 말머리를 돌렸다.

그 소식은 이틀 만에 강원과 함경의 산중 절마다 퍼졌다. 금강산 승려들이 산문을 닫았다는 말이었다. 묘향산에서도, 오대산에서도 젊은 승려들이 짚신 끈을 고쳐 매기 시작했다.

사명대사는 왕충이 남긴 청동 패를 가사 안쪽 주머니에 꿰매 넣었다. 혜구가 그게 뭐냐고 묻자 그는 웃었다.

사명대사“빚 문서야. 받을 사람은 산을 넘어갔고, 갚을 사람은 여기 앉아 있고. …궁금하면 자네가 나중에 대신 갚게.”

혜구는 무슨 소린지 몰라 뒷머리를 긁었다. 그래도 그날부터 새벽 예불이 끝나면 산문 앞에 나가 압록강 쪽 하늘을 한 번씩 올려다보았다.

다른 선택을 했다면…

홀몸으로 내려갔다면, 철령 아래 진영에는 나무묘법연화경이라 쓴 흰 깃발이 펄럭이고 있었을 것이다. 혜구가 바랑을 붙들고 울었지만 사명대사는 손가락을 하나씩 떼어 냈다.

III · 보배

사명대사는 지팡이 하나만 짚고 철령 아래 회양 진영으로 걸어 들어갔다. 혜구가 따라오겠다고 울면서 바랑을 붙들었지만, 그는 웃으며 손가락을 하나씩 떼어 냈다. 자네까지 오면 밥 지을 사람이 없네, 하고.

진영에는 '나무묘법연화경'이라 쓴 흰 깃발이 바람에 펄럭였다. 가토 기요마사는 생각보다 젊었고 생각보다 키가 컸다. 그는 역관을 사이에 두고 곧장 물었다.

가토“조선에 보배가 있나?”

사명대사“있지요. 지금 조선의 보배는 장군의 머리입니다.”

역관이 그 말을 옮기자 장막 안의 무사들이 칼자루에 손을 얹었다. 사명대사는 눈도 깜빡이지 않았다.

사명대사“명나라가 장군 머리에 천금을 걸었다 들었소. 그러니 보배가 아니고 뭐요. 그런 보배를 귀하게 여기신다면, 산중 절을 뒤져 공연히 원한을 사서야 되겠소?”

가토는 한참 말이 없다가 처음으로 웃었다. 그는 법화경의 불타는 집 이야기를 아느냐고 물었고, 사명대사는 불난 집에서 아이들을 꾀어낸 아버지가 거짓말을 한 것이냐고 되물었다. 그날 밤 두 사람은 경전 이야기만 했다.

이튿날 아침 가토는 산중 수색을 거두라 명했다. 사명대사는 패잔병 얘기는 한 마디도 꺼내지 않았다. 다만 진영을 나서면서 장막 바닥에 구겨져 있던 서신 한 장이 자꾸 눈에 밟혔다. 고니시의 공을 적은 태합의 서신이었다.

산으로 돌아온 그를 혜구가 산문 앞에서 맞았다. 혜구는 스님 발이 피투성이인 걸 보고 울음을 터뜨렸다.

사명대사“울지 말게, 발 좀 까진 걸 가지고. 저 장군, 칼보다 샘이 많은 사람이야. 고니시 얘기만 나오면 눈썹이 꿈틀하더군. 그거 잘만 건드리면 산 하나쯤은 지키겠어.”

그날 밤 장작 광의 패잔병들은 처음으로 등을 펴고 잤다. 팔을 다친 아이는 잠결에 어머니를 부르다가 혜구의 소매를 붙잡았다.

다른 선택을 했다면…

산문을 닫았다면, 유점사 공양간 뒤에서 박달나무 깎는 소리가 새벽까지 이어졌을 것이다. 사명대사는 가사를 벗어 부처님 앞에 개어 두고 승려들을 마당에 모았다.

시점 3 / 3가토 기요마사일본 제2군 대장

I · 약장수의 공

8월 중순, 함흥의 하늘은 벌써 가을빛이었다. 가토 기요마사는 성 밖 진영 장막에서 나고야로부터 온 서신을 세 번째 읽고 있었다. 태합의 붓글씨는 들떠서 춤을 추었다. 요양을 하루 만에 떨어뜨린 고니시 유키나가는 이 원숭이의 보물이라고 쓰여 있었다.

가토“보물. 하, 약장수가 보물이란다.”

부장 나베시마 나오시게가 고개를 숙였다. 그도 그 서신 내용을 알았다.

나베시마“고니시 쪽은 평안도 대로를 탔습니다. 길이 넓고 곡식이 많았지요. 우리 길과는 사정이 다릅니다.”

가토“사정 얘기 하지 마. 듣기 싫어.”

나베시마“그래도 대장님, 태합께서 우리 쪽 노고를 모르시진 않을 겁니다. 철령을 넘은 것만 해도 남들은 못 할 일입니다.”

가토“철령 넘은 거? 그거 고생이지 공이야? 태합께서 고생을 세시나. 성 몇 개 땄냐, 그것만 물으시지. 몇 개냐, 우리. 하나도 없어. 빈손이야, 빈손.”

가토의 2군은 철령을 넘어 함경도로 올라온 뒤 석 달째 산과 바람만 상대하고 있었다. 두만강 너머에서는 오랑캐 부족들이 밤마다 말을 몰고 와 짐바리를 털어 갔다. 북쪽 길에는 칠 만한 적도 딸 만한 성도 없었고, 아침 점호 때마다 대답이 몇씩 줄었다.

장막 밖에서 기침 소리가 들렸다. 가토는 서신을 내던지고 밖으로 나갔다. 젊은 아시가루 하나가 모닥불 곁에 웅크려 떨고 있었다. 열병이었다.

가토“이름.”

아시가루“기무라 마타조입니다, 대장님.”

가토“마타조, 이거 먹어.”

가토는 제 몫으로 나온 주먹밥 두 덩이를 소년의 손에 쥐여 주었다. 나베시마가 무어라 하려다 입을 닫았다. 지난달에도 대장은 그렇게 제 밥을 내주고 저녁 내내 빈 배를 문질렀다.

가토“삼계무안 유여화택. 경에 그렇게 써 있다. 불난 집. 여기가 딱 그 꼴이야. …먹어, 식기 전에. 아니, 벌써 식었나.”

그는 함흥성 쪽을 돌아보았다. 조선 관찰사 유영립이 지키는 성은 조약대로 문을 열어 두고 곡식을 내주었다. 그러나 그 곡식은 해마다 적어졌다. 조선 백성들은 일본군이 오면 곡식을 들고 산으로 도망쳤다.

가토“약장수는 남의 길 빌려서 공 세우고. 나는 여기서 뭐 하냐. 남의 땅에서 굶고 있다. 이게 무슨 셈이야.”

그는 마타조가 주먹밥을 다 먹는 것을 끝까지 지켜보았다. 소년은 반쯤 먹다가 남은 덩이를 옆의 동료에게 나누어 주었다. 가토는 그걸 보고도 아무 말 하지 않았지만, 다음 날 아침 마타조의 몫에는 말린 생선 한 마리가 더 얹혀 있었다.

나베시마가 낮게 말했다. 빌린 길이 아니라 얻은 땅이라면 셈은 달라진다고.

가토“얻은 땅이라. 그 말을 태합 앞에서 하려면 손에 쥔 게 있어야지. 성이든, 사람이든.”

그는 다시 장막 안으로 들어가 바닥에 떨어진 태합의 서신을 주웠다. 구겨진 종이를 펴지도 버리지도 않고, 갑옷 상자 맨 밑에 쑤셔 넣었다.

II · 왕자

사흘 뒤, 회령에서 아전 하나가 진영을 찾아왔다. 이름은 국경인이라 했다. 그는 땅에 이마를 대고 한참을 엎드려 있다가, 역관을 통해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역관“조선 왕이 일본군을 위로하라고 함경도로 보낸 두 왕자, 임해군과 순화군이 지금 회령에 있다 합니다. 왕자들이 고을 백성을 매질하고 재물을 빼앗아 원성이 높으니, 장군께서 원하시면 묶어서 바치겠다 합니다.”

가토“제 나라 왕자를 판다고?”

국경인“왕은 우리를 버렸습니다. 명에게 배신자 소리를 듣는 왕이 함경도 아전 하나를 기억이나 하겠습니까.”

가토는 국경인을 오래 내려다보았다. 이마에 흙이 묻어 있었다. 이 사내가 정말 왕자를 묶어 올 수 있을까. 묶어 온다면 길이 아니라 땅이 제 발로 걸어 들어오는 셈이었다.

나베시마가 국경인을 장막 밖으로 내보내고 나서 가까이 다가왔다. 목소리는 낮췄지만 눈이 들떠 있었다.

나베시마“대장님, 왕자 둘이면 조선 조정의 목줄을 쥐는 겁니다. 요양성 하나보다 무겁습니다. 태합께서도 그 값을 아실 겁니다.”

가토“약장수는 성을 땄지. 나는 왕자를 따고. …나쁘지 않은데.”

나베시마“고니시 쪽에서는 아마 반대할 겁니다. 조선 조정을 달래서 명과 강화를 맺으려 한다는 말이 있습니다.”

가토“강화는 무슨. 약장수 강화는 흥정이야. 흥정하려면 볼모가 있어야지. 그 볼모를 내가 쥐고 있으면? 약장수가 내 장막 앞에 와서 허리를 굽혀야지. 그 꼴 좀 보고 싶군.”

그때 장막 밖에서 소란이 일었다. 관찰사 유영립이 홀로 말을 달려 온 것이었다. 늙은 관찰사는 국경인을 보자 얼굴이 굳었다. 그는 역관을 앞세워 가토에게 또박또박 말했다.

유영립“장군, 조선은 길을 빌려 드렸지 땅을 드린 적이 없소. 왕자를 잡으시면 그날부터 함경도 백성은 손님이 아니라 원수를 맞게 될 것이오. 장군의 군사가 돌아갈 길은 철령 하나뿐인데, 그 고개 양쪽 산이 모두 조선 산이오.”

가토는 대답하지 않았다. 철령을 넘어오던 날이 떠올랐다. 좁은 고갯길에 군사들이 한 줄로 늘어서 반나절을 걸었다. 그 산 위에서 돌 하나만 굴러도 대열이 끊겼다.

가토“나무묘법연화경.”

그가 짧게 염불을 외었다. 장막 안의 누구도 그게 무슨 뜻이냐고 묻지 못했다. 열병 앓던 마타조가 장막 귀퉁이에서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가토는 소년의 얼굴을 보다가 국경인을 보았고, 다시 유영립을 보았다.

가토“약장수라면 지금 주판을 튕기겠지. 나는 주판이 없다.”

유영립“주판이 없으면 칼로 셈하시겠소?”

가토“칼로 하면 꼭 하나씩 틀려. …오늘 밤 생각하겠다. 둘 다 진영에서 자고 가. 이불은 내주마.”

가토 기요마사의 선택

III · 얻은 땅

그날 해 질 녘 함흥성 문루에서 조선의 깃발이 내려갔다. 대신 '나무묘법연화경' 흰 깃발이 올랐다. 성문 앞에 늘어선 조선 관리들은 아무도 고개를 들지 않았다.

유영립은 관아 안채에 갇혔다. 사흘 뒤 국경인은 회령에서 두 왕자를 밧줄에 묶어 끌고 왔다. 가토는 밧줄을 풀게 하고 왕자들에게 비단 장막 하나를 내주었다.

가토“손님이다. 굶기지 말고 때리지 마. 대신 문밖엔 못 나가.”

나베시마“태합께 바로 아뢰겠습니다. 조선 왕자 둘을 얻었다고.”

가토“써. 약장수 이름은 빼고.”

나베시마가 붓을 드는 동안 가토는 성벽 위를 걸었다. 성 아래 들판에서 조선 백성들이 곡식 단을 이고 산으로 줄지어 올라가고 있었다. 줄은 끝이 보이지 않았고, 저 곡식이 일본군 수레에 실릴 일은 이제 없을 터였다.

가토“얻은 땅이면 먹어야지. 먹으려면 씨부터 뿌려야 하는데, 씨 뿌릴 놈들이 다 도망간다. 허.”

혼자 하는 말이었고 대답하는 사람은 없었다. 마타조가 열이 내린 얼굴로 성벽 아래에서 그를 올려다보았다.

그날 밤 함흥에서 한양으로 가는 역참마다 말이 바쁘게 달렸다. 조선 조정은 왕의 두 아들이 일본 진중에 '손님'으로 있다는 소식을 받았다. 선조는 옥대 고리를 오래 만지작거렸다고 했다. 같은 시각 나고야로 떠난 가토의 서신은 고니시의 요양성보다 무거운 값을 달고 있었다.

열흘 뒤 철령 고갯길에서 일본군 짐바리 열둘이 굴러 내린 바위에 깔렸다. 바위를 굴린 사람은 끝내 찾지 못했다. 가토는 그 소식을 듣고 왕자들의 장막 앞에 보초를 둘 더 세웠다.

가토“손님 대접은 계속해. …우리한테 손님 대접해 줄 놈은 이제 이 땅에 하나도 없으니, 우리라도 해야지.”

다른 선택을 했다면…

칼을 거두었다면, 가토는 국경인을 묶어 유영립에게 넘겼을 것이다. 떠나는 왕자들의 가마를 배웅하지 않고 나고야에 군량을 청하는 서신부터 썼다.

III · 거둔 칼

가토는 국경인을 묶으라 했다. 아전은 비명을 지르며 끌려 나갔고, 가토는 그를 유영립에게 넘겼다.

가토“제 왕을 파는 놈은 나도 판다. 데려가.”

유영립은 한참 가토를 바라보다 깊이 고개를 숙였다. 두 왕자는 사흘 뒤 관찰사의 호위를 받아 남쪽 가마에 올랐다. 가토는 그 가마를 배웅하지 않았다.

나베시마“대장님, 왜 놓으셨습니까. 그건 요양성보다 큰 공이었습니다.”

가토“철령에서 돌 하나 굴러 봐라. 공이고 뭐고 다 같이 깔린다.”

나베시마는 더 묻지 않았다. 그날 장막 귀퉁이에서 대장이 마타조 얼굴을 한참 보던 것을 그도 보았다. 이 북쪽 땅에서 조선 백성을 원수로 만들면, 굶주린 2군은 돌아갈 길도 없이 겨울을 맞을 터였다.

그날 저녁 가토는 처음으로 나고야에 군량을 청하는 서신을 썼다. 조선 땅에서 더는 곡식을 짜낼 수 없으니 바다 건너 보내 달라는 내용이었다. 태합이 이 서신을 읽고 웃을지 화낼지 그는 알 수 없었다.

가토“약장수는 지금쯤 남의 장부에 제 이름 쓰고 있겠지. 나는 빚 문서나 쓰고. …나무묘법연화경.”

함흥 백성들은 그 겨울 산에서 내려왔다. 많지는 않았지만 몇 집이 연기를 올렸다. 유영립은 한양에 장계를 올렸다. 북쪽의 왜장은 칼을 거두었다고, 그 사람은 생각보다 셈이 길다고.

그해 겨울 마타조는 열병에서 일어나 다시 창을 들었다. 그는 대장 장막 앞 보초를 서면서, 밤마다 낮게 흘러나오는 염불 소리를 들었다.

마타조“대장님, 그때 왕자를 잡으셨으면 큰 상을 받으셨을 텐데요.”

가토“상? …너 그 열병은 다 나았냐. 그럼 됐다. 가서 보초나 서.”

마타조는 그 말을 고향에 보낼 편지에 그대로 적었다. 편지가 바다를 건널 수 있을지는 아무도 몰랐다.

다른 선택을 했다면…

강경하게 나갔다면, 함흥성 문루에서 조선의 깃발이 내려가고 흰 깃발이 올랐을 것이다. 가토는 붙잡혀 온 왕자들의 밧줄부터 풀게 했다.

제2장 · 루트 r3

두 얼굴이 들키다

1592년 5월 ~ 10월 · 왕의 봉서가 적의 손에 들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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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조는 왜에게 길을 열어 주면서 젊은 역관에게 봉서를 들려 요동에 먼저 알렸다. 고니시는 그 답서를 “조선 왕이 머리를 숙여 복속했다”로 고쳐 태합에게 올렸다. 태합은 조선을 제 발밑의 속국이라 믿었고, 명은 강가에서 칼을 갈며 기다렸다. 두 개의 거짓이 한 강가에서 마주친 여름, 조선 왕의 두 얼굴이 적의 손바닥 위에 놓인다.

시점 1 / 3권율광주목사

I · 성문 열쇠

칠월 스무날, 숭례문 앞 마당은 해가 지기도 전에 횃불로 환했다. 광주에서 올라온 군량 수레 서른 대가 문 앞에 멈춰 섰고, 맞은편에는 일본군 군관 하나가 조총수 스무 명을 거느리고 서 있었다.

권율은 말에서 내려 수레를 한 바퀴 돌았다. 쌀가마마다 새끼줄이 단단했고, 바퀴 쇠테도 이번엔 새것이었다. 트집 잡힐 데는 없겠다 싶었는데, 군관은 쌀가마 쪽은 쳐다보지도 않았다.

통사“장군께서 이르시기를, 조선은 태합 전하께 복속한 나라이니 도성의 문 열쇠는 마땅히 일본군이 맡아야 한다 하십니다. 오늘 밤 안으로 네 대문의 열쇠를 내놓으라 하십니다.”

권율“복속? …복속이라. 그 말은 누가 했다던가.”

통사“조선 왕께서 직접 머리를 숙였다고, 나고야에서 그리 들었다 합니다.”

권율은 대답하지 않고 군관 얼굴을 뜯어보았다. 거짓말하는 얼굴이 아니었다. 저 사람은 정말 그렇게 믿고 있었다. 길만 빌려준다고 쓴 답서가 바다를 건너는 사이 무엇으로 바뀌었는지, 권율로서는 알 길이 없었다. 볍씨 자루 이름표가 뒤바뀐 줄 모르고 남의 논에 모를 냈던 해가 떠올라 그는 괜히 수염을 쓸었다.

권율“득룡아, 우리 전하께서 머리를 숙이셨다는 말, 들은 적 있나.”

군관 한득룡“없습니다, 사또. 길만 빌려준다는 말만 들었습니다. 저잣거리에서도 다들 그리 압니다.”

권율“나도 그래. 그런데 저쪽은 머리 숙였다고 들었다는군. 한 논에 둘이 각자 다른 씨를 뿌렸다고 믿는 셈이야. 가을에 뭐가 올라올지, 원.”

유월에 압록강에서 큰 싸움이 있었다는 소문은 이미 도성 안에 파다했다. 강을 건너려던 일본군 선봉이 명나라 기병의 매복에 걸려 강물에 수백이 빠져 죽었다고 했다. 명나라가 어떻게 그 길목을 미리 알고 숨어 있었는지, 일본군 진영에서는 그때부터 이상한 말이 돌았다고 했다.

통사“장군께서 한 가지를 더 물으십니다. 명나라가 어찌 압록강 여울목을 미리 알았느냐고. 조선은 아는 바가 없느냐고.”

권율“나는 광주 목사요. 광주에서 압록강까지 얼마나 먼지 장군께 여쭤 보게. 나는 내 고을 논두렁 물길도 다 모르는 사람일세.”

통사가 그 말을 옮기는 동안 권율은 문루를 올려다보았다. 처마 아래 도성 사람들이 몰래 모여 이쪽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젖먹이를 업은 아낙 하나와 눈이 마주쳤다. 열쇠를 내주면 저 아낙은 오늘 밤부터 남의 나라 군사가 잠근 성 안에서 애를 재워야 했다.

II · 물꼬

그날 밤 권율은 성 밖 역참에 수레를 묶어 두고 혼자 앉아 있었다. 등잔 아래에는 한양 판윤이 보낸 짧은 쪽지 한 장이 놓여 있었다. 조정은 아무 결정도 내리지 않았으니 지응을 맡은 목사가 알아서 처리하라는 것이었다.

권율“알아서 하라. …알아서 하라, 허. 잘못되면 그것도 알아서 지라는 소리겠지. 늘 그래.”

한득룡“사또, 조정에서 무슨 일이 있는 모양입니다. 의주 쪽에서 역관 하나가 사라졌다는 말이 돌고 있습니다. 사역원 박 아무개라던데, 왜군이 그 사람을 잡아갔다고 합니다.”

권율은 등잔 심지를 조금 낮추었다. 사역원 역관이 의주에서 사라졌다. 명은 압록강 여울목을 미리 알고 있었다. 일본군은 조선이 복속했다고 믿는다. 세 가닥이 머릿속에서 한 줄로 엮이려 했고, 권율은 그 끝을 붙잡기 싫어서 괜히 심지를 다시 돋웠다.

권율“득룡아, 모내기할 때 물꼬를 어떻게 트는지 아나.”

한득룡“윗논부터 트지요. 아랫논부터 트면 물이 거꾸로 차오릅니다.”

권율“그래. 근데 지금 윗논에서 누가 물꼬를 트는지 모르겠단 말이야. 우린 맨 아랫논에 서서 물이 어디서 쏟아지나 목만 빼고 있고.”

밤이 깊어 일본군 군관이 다시 사람을 보냈다. 열쇠를 내놓지 않으면 내일 아침 도성 둘레 고을의 장정 이백을 짐꾼으로 끌어가겠다는 것이었다. 압록강에서 잃은 군사의 빈자리를 조선 사람으로 메우겠다는 뜻이었다.

한득룡“사또, 남쪽 소식도 좋지 않습니다. 여수 좌수영이 격군을 다 돌려보내서, 이제 왜놈 짐배가 남해 바다를 제 마당처럼 오간답니다. 바다로 들어오는 쌀이 많아지면 저놈들은 더 오래 버틸 겁니다.” 권율은 쓴웃음을 지었다. 바다 쪽 둑이 없으면 이쪽 둑을 그만큼 높여야 하는데, 삽 든 사람은 아무리 둘러봐도 자기뿐인 것 같았다.

한득룡“그래도 남쪽에서는 이상한 소문이 올라옵니다. 여수 앞바다에 등에 쇠못을 박은 배가 숨어 있다고, 왜놈 짐배들이 그 근처를 지날 때마다 돛을 내린다고요.” 권율은 고개를 끄덕이다 말고 피식 웃었다. 남쪽에도 조정 몰래 볍씨를 묻어 두는 사람이 있는 모양이었다.

권율은 아까 숭례문 앞에서 본 도성 사람들의 얼굴을 떠올렸다. 그리고 한양에서 서쪽으로 반나절 거리, 한강을 끼고 앉은 행주의 낮은 산을 떠올렸다. 버려진 옛 흙성이 있는 곳이었다.

권율“열쇠를 내주면 피는 안 나겠지. 대신 도성이 저쪽 곳간이 되네. 안 내주면 내일 장정 이백이 끌려가거나, 우리가 먼저 칼을 뽑아야겠지.”

한득룡“사또, 어느 쪽이든 조정은 우리를 탓할 겁니다.”

권율“조정이야 탓하라지. 그건 괜찮아. 백성이 손가락질하는 건… 그건 쉰다섯을 먹어도 못 견디겠더군.”

한득룡“사또께서는 늦게 급제하셔서 그런지, 다른 나리들과 셈이 다르십니다.”

권율“마흔여섯에 급제하면 그렇게 돼. 그 전까지 스무 해를 논두렁에서 남의 농사 구경만 했거든. 비만 오면 누가 먼저 삽 들고 둑으로 뛰나, 그런 거나 봤지. 쓸데없는 구경이었어.”

그는 등잔불을 끄고 어둠 속에서 한참 앉아 있었다. 창밖에서 일본군 순라꾼의 발소리가 지나갔고, 멀리 성안에서 개 한 마리가 짖다가 그쳤다.

권율의 선택

III · 남의 열쇠

새벽 첫 북이 울리기 전, 권율은 숭례문 앞으로 갔다. 판윤에게서 받아 온 쇠열쇠 꾸러미가 손안에서 차갑고 무거웠다.

권율“열쇠는 드리겠소. 대신 오늘부터 장정은 한 사람도 끌어가지 마시오. 짐이 필요하면 내 수레꾼이 지겠소. 그리고 해가 지면 문은 닫되, 아침에는 백성이 드나들게 여시오.”

통사가 옮기자 군관은 잠시 생각하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열쇠 꾸러미를 받아 들며 무어라 짧게 말했다.

통사“복속한 나라의 목사답다고 합니다.”

권율“전하게. 복속한 나라가 아니라 길 빌려준 나라 목사라고. …전했나? 왜 안 전하나. 전하라니까.”

군관은 그 말을 다 듣지 않고 돌아섰다. 열쇠가 남의 허리춤에서 짤랑거렸다. 문루 위 사람들은 아무 소리도 내지 않았다. 권율은 차라리 누가 돌이라도 하나 던졌으면 싶었다.

그날 저녁 권율은 장부에 '도성 사문 쇄약 이부'라고 적었다. 열쇠 넘겼다고 쉽게 쓰면 될 것을, 붓이 자꾸 어려운 글자 쪽으로만 갔다.

한득룡“사또, 그래도 피는 막았습니다.”

권율“막긴. 미룬 거야. …그래도 미루는 동안 벼는 크겠지.”

열흘 뒤, 일본군이 도성 안에서 조선 관원들을 하나씩 불러 압록강 일을 묻기 시작했다는 소문이 들렸다. 열쇠를 쥔 쪽은 이제 문만이 아니라 사람 입까지 열려 하고 있었다.

권율도 불려 갔다. 군관은 압록강 여울목 얘기를 다시 꺼냈고, 권율은 이번에도 광주 논두렁 얘기로 답했다. 군관은 끝내 웃지 않았다.

권율“득룡아, 저 사람들 묻는 게 달라졌다. 뭘 쥔 얼굴이야. 쥐고 있으면서 우리 입으로 한 번 더 듣고 싶어 하는 얼굴.”

한득룡“그럼 저희는 어찌합니까.”

권율“장부나 잘 써 두게. 언젠가 누가 이 열쇠값을 물으면, 그때 보여 줄 게 장부밖에 없으니까.”

다른 선택을 했다면…

열쇠를 품에 넣은 채 수레를 서쪽으로 돌린 새벽. 숭례문을 떠나는 수레 뒤로 장정들이 하나둘 따라붙기 시작한다. 무너진 흙성에 닿으면 권율도 소매부터 걷는다.

III · 품속의 열쇠

권율은 열쇠를 내주지 않았다. 판윤에게서 받은 쇠열쇠 꾸러미를 품속에 넣은 채, 새벽 첫 북이 울리기 전에 수레를 서쪽으로 돌렸다.

한득룡“사또, 열쇠를 들고 가시면 도성 문은 어찌합니까.”

권율“문은 안에서 빗장 걸면 되네. 열쇠 없으면 밖에서는 못 열어. 저쪽이 열려면 부숴야 하고, 부수는 순간 손님이 아니게 되지.”

수레 서른 대가 숭례문 앞을 떠나자 도성 둘레 마을 장정들이 하나둘 따라붙었다. 끌려갈 바에야 목사를 따라가겠다는 사람들이었다. 양주에서, 고양에서, 김포에서 사람이 왔다. 행주 산성에 닿았을 때 수는 칠백을 넘었다.

흙성은 무너진 데가 많았다. 권율은 장정들에게 흙짐을 지게 하고 자신도 소매를 걷었다.

권율“논둑 쌓는 거랑 똑같아. 새는 데부터 막고, 밟아. 더 밟아. 그렇게 살살 밟아서는 첫 비에 다 쓸려 가.”

장정 하나“사또, 왜군이 쳐들어오면 이 흙성으로 버틸 수 있습니까.”

권율“흙만 믿고 버티나. 자네가 버텨야지. …허리 펴고 밟게. 그러다 허리 나가.”

이레 뒤 한양에서 사위 이항복의 편지가 왔다. 일본군이 숭례문 빗장을 부수고 들어왔다고, 조정이 장인을 역적으로 몰자는 쪽과 감싸자는 쪽으로 갈렸다고 했다. 편지 끝에는 이런 줄이 있었다.

이항복“장인 어른, 의주에서 붙잡힌 역관 품에서 무엇이 나왔는지 아직 아무도 입 밖에 내지 않습니다. 그래도 다들 압니다. 지금 열쇠를 쥐고 계신 분이 장인 어른 한 분만은 아니라는 걸요.”

권율은 품속의 열쇠를 꺼내 노을에 비춰 보았다. 쇠가 붉게 달아 보였다. 그는 열쇠를 다시 품에 넣으며, 이 꾸러미가 언젠가 숭례문 자물쇠에 다시 들어갈 날이 올지 손가락을 꼽아 보다 말았다.

다른 선택을 했다면…

새벽 첫 북이 울리기 전에 쇠열쇠 꾸러미를 들고 숭례문으로 갔다면, 통사의 입을 거쳐 몇 마디가 오갈 것이다. 문루 위 사람들은 열쇠가 남의 허리춤에서 짤랑거리는 소리를 말없이 듣고 있다.

시점 2 / 3사명대사금강산 유점사의 승려

I · 붓 한 자루

팔월 초, 금강산 유점사의 계곡물은 장마 끝이라 소리가 컸다. 사명대사 유정은 그 물소리를 들으며 묘향산에서 온 스승 서산대사의 편지를 펼쳤다. 일흔셋 노승의 글은 언제나처럼 짧았다.

편지에는 이렇게 적혀 있었다. 임금이 두 손으로 두 사람에게 절을 하면 그 등은 누가 펴 주겠느냐고. 그게 다였다. 사명대사는 종이를 뒤집어 보았지만 뒷면에도 아무것도 없었다.

시자승“스님, 큰스님께서 또 수수께끼를 보내셨습니까. 지난번 것도 아직 못 풀었는데요.”

사명대사“자네는 수수께끼를 받으면 뭐부터 하나?”

시자승“답부터 찾지요.”

사명대사“그러니 아직 시자승이지. 나는 오늘은 스승님 얼굴부터 떠올려 보네. 이걸 쓰실 때 웃으셨을까, 혀를 차셨을까. …아마 둘 다 하셨겠지.”

그날 오후 산 아래에서 장꾼 하나가 소금 지게를 지고 올라왔다. 그는 공양간에 소금을 부려 놓고 물 한 그릇을 얻어 마시며 소식을 풀어 놓았다. 유월에 압록강에서 왜군 선봉이 명나라 매복에 걸려 크게 졌다는 것, 그 뒤로 왜군이 조선 사람을 보는 눈이 달라졌다는 것이었다.

장꾼“그리고 스님, 의주에서 한양 사역원의 역관 하나가 왜군에게 붙잡혔답니다. 그 사람 솜옷 안감에서 임금님 글씨가 나왔다지요. 명나라 장수에게 보내는 글이었다고들 합니다.”

사명대사는 물그릇을 받아 들고 있던 손을 멈추었다. 계곡물 소리가 갑자기 더 크게 들렸다.

사명대사“그 역관은… 살아 있소? 아직?”

장꾼“안변의 가토 진영에 끌려가 있답니다. 그 높은 투구 쓴 장수 말입니다. 그 장수가 역관을 죽이지 않고 데리고 다닌다더군요. 무슨 쓸모가 있는지, 원.”

사명대사“쓸모가 있으니 살려 두겠지. …죽였다는 소리보다 그 소리가 더 고약하오.”

장꾼이 내려간 뒤 사명대사는 법당 뒤 돌계단에 엉덩이가 식도록 앉아 있었다. 스승의 물음이 이제야 조금 보였다. 임금은 왜에게 길을 열어 주며 한 번 절하고, 명에게 몰래 글을 보내며 또 한 번 절했다. 그 두 번째 절이 적의 손에 들어갔다.

그때 법당 쪽에서 늙은 승려 처영이 지팡이를 짚고 걸어왔다. 스승 서산대사 아래서 함께 공부한 사형으로, 젊어서 산적을 몽둥이로 쫓아낸 적도 있을 만큼 성미가 불 같았다.

처영“유정, 산 아래 소식 들었는가. 왜놈들이 임금의 글을 쥐었다네. 이제 저놈들은 조선을 손님 대접하지 않을 걸세.”

사명대사“사형, 뭐가 더 속상하시오. 들킨 거요, 쓴 거요?”

처영“둘 다일세. 자네는 아닌가. 속도 없나.”

사명대사는 대답하지 않고 계곡 쪽을 보았다. 물은 바위에 부딪혀 둘로 갈렸다가 아래에서 다시 하나로 합쳐지고 있었다.

사명대사“사형, 저 물 좀 보시오. 바위가 물을 둘로 가른다고 물이 바위를 탓하오?”

처영“자네는 또 그 소리인가. 물은 탓을 안 하지만 사람은 하네. 백성들은 임금을 탓할 걸세. 두고 보게.”

사명대사“그럼 그 탓은 누가 받아 주나. …그게 걱정이오. 사형, 저녁이나 드십시다.”

II · 부름

닷새 뒤, 일본군 기마 무사 셋이 산문 앞에 닿았다. 그들은 말에서 내리지 않은 채 통사를 앞세워 가토 기요마사의 글을 내밀었다. 한문으로 적힌 글은 글씨가 투박했지만 뜻은 분명했다.

통사“장군께서 이르십니다. 금강산의 글 아는 중을 하나 안변으로 보내라. 조선 왕의 글씨를 아는 자여야 한다. 그 중이 보는 앞에서 조선 왕의 거짓을 밝히겠다.”

대중이 웅성거렸다. 시자승은 사명대사의 소매를 붙잡았고, 처영은 지팡이로 땅을 짚으며 앞으로 나섰다.

처영“이 절에 임금의 글씨를 아는 중은 없소. 중은 부처님 글씨만 아오. 그것도 반은 못 읽고.”

통사가 그 말을 옮기자 무사 하나가 짧게 웃었다. 그가 무어라 덧붙이자 통사의 얼굴이 굳었다.

통사“그렇다면 산을 뒤져 찾겠다 합니다. 장군께서는 중들이 명나라 첩자를 숨겨 주는 것도 알고 계시다 합니다.”

사명대사는 무사들 앞으로 걸어가 합장했다. 그러고는 통사를 거치지 않고 땅에 나뭇가지로 한자를 적었다.

사명대사“장군은 거짓을 밝히려 하오, 거짓을 쓰려 하오?”

무사들은 글자를 읽지 못했다. 통사가 대신 읽어 옮기자, 우두머리 무사가 잠시 생각하더니 대답했다.

통사“둘이 다르냐고 묻습니다.”

사명대사“다르오. …아니, 됐소. 길게 말해 봐야 옮기다 다 새겠지. 장군께 그냥 전하시오. 사흘 안에 답을 드리겠다고.”

그날 밤 선방에는 늦도록 불이 꺼지지 않았다. 처영은 칼을 들자고 했다. 금강산의 절마다 젊은 중이 수백이니, 산문을 닫고 버티면 왜군도 쉽게 오르지 못할 것이라 했다.

처영“유정, 저놈들이 원하는 건 조선 중의 입으로 조선 임금을 거짓말쟁이로 만드는 걸세. 그 자리에 가면 자네는 임금의 목에 밧줄을 거는 손이 되네. 안 가면 산이 불타겠지만, 적어도 그 손은 되지 않지.”

사명대사“사형, 산이 불타면 그 안의 중들은 누구 손에 죽소?”

처영“왜놈 손이지.”

사명대사“아니오. 문 닫자고 한 우리 손이지. …사형 손, 그리고 내 손.”

처영“그럼 자네는 가겠다는 겐가.”

사명대사“모르겠소. 가면 뭘 지고 가야 하는지는 알겠는데. 임금의 거짓이오. 임금이 못 지는 걸 산중 중이 대신 지고 내려가는 거지.”

시자승이 그 말을 듣고 울먹였다. 사명대사는 시자승의 머리를 한 번 쓰다듬었다. 손바닥 아래 깎은 머리가 따뜻했다.

사명대사“울지 말게, 아직 아무 데도 안 갔네. 스승님 편지를 다시 읽어 보게. 그 등은 누가 펴 주겠느냐고 하셨지. 펴 주는 사람이 꼭 임금 곁에 있어야 하는 건 아니네.”

사명대사의 선택

III · 산의 대답

사흘째 되는 날 아침, 사명대사는 산문 앞에 짧은 글 한 줄을 써 붙였다. 금강산에는 부처님 글씨를 아는 중만 있으니 임금의 글씨를 찾거든 임금께 가서 물으라는 것이었다.

그리고 산문의 빗장이 내려졌다. 표훈사, 장안사, 신계사에서 젊은 중들이 몽둥이와 낫을 들고 모여들었다. 처영이 그들을 골짜기마다 나누어 세웠다.

사명대사“그대들은 사람을 죽이러 왔는가, 산을 지키러 왔는가?”

젊은 승려“산을 지키러 왔습니다.”

사명대사“그럼 산을 오르는 자가 칼을 내려놓으면 어찌하겠는가?”

젊은 승려“길을 내주겠습니다.”

사명대사“그래. 그것만 잊지 않으면 그대들은 아직 중일세.”

열흘 뒤 가토의 군사 이백이 산 아래까지 왔다. 그러나 그들은 산을 오르지 않았다. 골짜기마다 횃불이 늘어선 것을 본 우두머리 무사가 한참 위를 올려다보다가 말머리를 돌렸다. 대신 산 아래 마을에 방을 붙였다. 금강산 중들이 조선 왕의 거짓을 감싸고 칼을 들었으니, 이제 조선은 복속한 나라가 아니라고.

처영“유정, 저 방을 보게. 우리가 칼을 든 것이 저놈들한테는 명분이 되었네.”

사명대사“우리가 안 들었으면 명분이 없었겠소? 저 사람들은 어떻게든 썼을 거요. 이번엔 우리 몽둥이가 먼저 눈에 띄었을 뿐이지.”

처영“그럼 이제 어찌하겠는가. 칼을 들었으니 내려놓을 데가 없네.”

사명대사“내려놓을 데야 많지요. 언제 내려놓느냐가 문제지. 사형, 그때가 오면 내게 좀 말해 주시오. 칼 든 뒤로 내 눈이 조금 흐려진 것 같소. 요새는 사람 얼굴보다 손에 뭘 쥐었나부터 보이니.”

그날 밤 사명대사는 홀로 법당에 앉았다. 승병이 일어났다는 소문은 벌써 산 아래로, 한양으로, 그리고 압록강 쪽으로 흘러가고 있었다.

다른 선택을 했다면…

시자승도 떼어 놓고 홀로 안변 진영에 닿으면, 진막 기둥에는 손이 묶인 젊은 역관이 기대어 있다. 가토가 낡은 봉서 한 장을 던지며 묻는다. 누구 글씨냐고.

III · 짊어진 거짓

사명대사는 시자승도 떼어 놓고 홀로 산을 내려갔다. 안변 진영의 목책 앞에서 지팡이로 땅에 이름을 적자 문이 열렸다.

가토는 진막 안에 앉아 있었다. 그 옆 기둥에는 젊은 역관 하나가 손이 묶인 채 기대어 있었다. 얼굴이 퉁퉁 부어 있었지만 눈은 내리깔지 않았다. 가토는 말없이 낡은 봉서 한 장을 사명대사 앞에 던졌다.

가토“읽어. 누구 글씨냐.”

사명대사는 봉서를 내려다보지 않았다. 그는 눈을 감고 합장했다.

사명대사“장군, 이 글을 내가 읽으면 무엇이 달라지오? 장군은 이미 누구 글씨인지 알지 않소?”

가토“안다. 네 입으로 듣고 싶다.”

사명대사“그럼 내 입으로 말하리다. 이 글을 쓴 자의 거짓은 내가 지겠소. 장군이 조선을 벌하고 싶거든 이 중의 목부터 베시오. 임금의 등은 백성의 등이오. 그 등을 베면 장군이 지나갈 길도 끊어지오.”

진막 안이 조용해졌다. 통사는 말을 옮기다 목소리가 떨렸다. 가토는 한참 사명대사를 보다가 갑자기 짧게 웃었다.

가토“나무묘법연화경. 중은 목을 내놓겠다 하고, 왕은 글이나 써 보내고. 이 나라는 셈을 거꾸로 하는군.”

사명대사“장군의 태합은 무엇을 내놓았소? 조선이 복속했다는 글을 믿었으니, 그 글값은 누가 치르겠소?”

가토의 웃음이 멎었다. 그는 기둥에 묶인 역관을 한 번 보고, 다시 사명대사를 보았다. 그 물음이 누구를 겨누는지 그는 알아들었다.

가토“가라. 목은 두고 간다. 언젠가 받으러 간다.”

사명대사가 진막을 나설 때, 묶인 역관이 고개를 들었다. 부은 입술이 몇 번 달싹이다가 겨우 소리를 냈다.

박의길“스님, 소인은 박의길이라 합니다. 전하께는 소인을 모른다 하시라고 전해 주십시오.”

사명대사는 돌아보지 않고 고개만 끄덕였다. 산길을 오르는 내내 그는 박, 의, 길, 세 글자를 입속으로 굴렸다.

다른 선택을 했다면…

산문 앞에 글 한 줄을 써 붙이고 빗장을 내렸다면, 표훈사와 장안사에서 몽둥이와 낫을 든 젊은 중들이 모여든다. 열흘쯤 지나면 산 아래 골짜기마다 횃불이 늘어선다.

시점 3 / 3가토 기요마사일본군 제2군 대장

I · 안감 속의 글

팔월 열사흘, 안변의 진막 위로 소나기가 한바탕 지나갔다. 가토 기요마사는 젖은 장막 자락을 걷고 들어와 등잔 앞에 앉았다. 상 위에는 기름종이에 싼 꾸러미 하나가 놓여 있었다.

이이다 가쿠베에“의주에서 잡은 역관의 솜옷 안감에 꿰매져 있던 것입니다. 실밥을 한 올씩 뜯어 꺼냈습니다. 찢어진 데는 없습니다.”

가토“잘했다. 의주에서 여기까지 몇 날 걸렸나.”

이이다“열이레 걸렸습니다. 도중에 둘을 잃었습니다. 산길에서 조선 의병의 화살에 맞았습니다.”

가토“이름 적어 둬. 구마모토 돌아가면 그 집에 쌀을 보낸다.”

가토는 꾸러미를 풀었다. 누런 종이 위에 단정한 해서가 줄지어 있었다. 그는 한문을 더듬더듬 읽다가 막히는 데서는 통사를 불렀다. 통사가 읽어 내려갈수록 진막 안이 조용해졌다.

통사“왜적이 길을 빌린다 하나 그 뜻은 요동에 있으니, 압록강 여울목 세 곳을 적어 올린다. 천조께서는 미리 군사를 숨기시라. 조선은 겉으로 길을 열되 속으로는 천조의 신하임을 잊지 않는다.”

가토“여울목 세 곳. 유월에 우리 선봉이 빠져 죽은 데가 거기다.”

이이다“예. 셋 중 둘이 맞습니다. 정확합니다.”

가토는 대답하지 않고 종이 끝을 손가락으로 눌렀다. 압록강에서 건져 올린 시신이 몇이었는지 그는 아직 기억하고 있었다. 구마모토 사람이 마흔둘이었고, 그중 열하나는 아비와 아들이 함께 빠졌다. 그는 젖은 갑옷을 벗기며 그 얼굴들을 하나씩 보았다.

가토“나무묘법연화경. 그날 강물은 조선 왕이 길을 알려 준 물이었군.”

이이다“대장, 이 글이 진짜라면 고니시 님이 올린 보고는 다 거짓이 됩니다. 조선 왕이 머리를 숙였다는 말도, 길을 내주며 복속했다는 말도요.”

가토“고니시야 장사꾼이니까. 팔기 좋게 말을 바꿨겠지. 그걸 태합께서 사신 거고.”

역관 박의길은 진막 기둥에 묶여 있었다. 잡혀 온 지 한 달이 넘었지만 그는 한 번도 살려 달라는 말을 하지 않았다. 가토가 다가가 쪼그려 앉자 박의길이 눈을 들었다.

가토“네가 들고 간 글이 우리 군사 마흔둘을 죽였다. 알고 있었나.”

박의길“소인은… 심부름꾼입니다. 글은 전하가 쓰셨고. 강물은, 소인이 어찌하겠습니까.”

가토“대답은 잘하는군. 그래서 아직 살려 둔 거다.”

가토는 일어나 진막 밖으로 나갔다. 비 그친 하늘 아래 동해 쪽 바다가 검게 출렁였다. 저 바다 건너 나고야의 태합은 지금도 조선 왕이 머리를 숙였다고 믿고, 그 믿음 위에 다음 해의 군량과 배와 사람을 쌓고 있을 것이었다. 가토는 기름종이 꾸러미가 생각보다 가벼워서 몇 번 손바닥 위에서 들었다 놓았다.

이이다“대장, 이걸 어찌하시겠습니까. 고니시 님 쪽에서도 벌써 냄새를 맡았을 겁니다. 의주에서 잡은 역관이 우리 진에 있다는 소문이 평양까지 갔습니다.”

가토“맡으라고 해. 장사꾼은 냄새 맡으면 흥정하러 오지. 누가 오나 보고 정하자.”

II · 장사꾼의 사자

구월 그믐, 평양의 고니시 유키나가가 보낸 사자가 안변에 닿았다. 비단옷을 입은 사카이 상인 출신의 사내였고, 말끝마다 허리를 굽혔다. 그는 고니시의 편지를 두 손으로 바치고는 바닥에 이마를 댔다.

고니시의 사자“장군, 저희 대장께서 간곡히 청하십니다. 그 봉서를 나고야에 올리지 마십시오. 조선이 등을 돌리면 평양에서 부산까지 이천 리 보급로가 끊깁니다. 겨울이 오면 다 굶어 죽습니다.”

가토“고니시가 겁내는 건 겨울이 아니라 태합이다. 제 거짓이 들킬까 봐.”

고니시의 사자“장군, 거짓이라 하셔도 그 거짓 덕에 우리는 칼 한 번 크게 뽑지 않고 여기까지 왔습니다. 조선 관원들이 길을 열고 쌀을 내주는 것도 그 거짓 덕입니다. 그것을 깨면 이 나라 백성이 모두 적이 됩니다.”

가토는 사자를 내려다보았다. 그는 이런 말투를 오래전부터 싫어했다. 셈은 맞는데 피 냄새가 나지 않는 말이었다. 압록강 물속에서 건져 올린 마흔두 얼굴은 그 셈 어디에도 들어 있지 않았다.

가토“이이다, 우리 진에 남은 쌀이 며칠 치냐.”

이이다“아껴 먹으면 마흔 날입니다. 조선 관아에서 받는 쌀이 끊기면 스무 날입니다.”

가토“들었나. 고니시 말도 셈은 맞다. 그게 더 짜증 나.”

사자가 물러간 뒤 가토는 밤늦도록 진막 밖을 걸었다. 시월 초의 바닷바람이 벌써 찼다. 군사들은 모닥불 둘레에 웅크려 앉아 조선 사람에게 얻은 솜옷을 겹쳐 입고 있었다. 한 젊은 병사가 그를 보고 일어나려다 다리를 절었다.

가토“앉아. 앉으라니까. 발은 왜 그러냐.”

젊은 병사“동상입니다, 대장. 짚신이 다 해졌습니다.”

가토“이이다, 내일 내 말안장 밑에 깐 가죽을 뜯어서 이놈 신을 만들어 줘라.”

이이다는 고개를 숙였다. 병사가 절뚝이며 모닥불 쪽으로 돌아가고 사람들이 멀어지자, 그는 가토 곁으로 바짝 다가서서 낮게 물었다.

이이다“대장, 어찌하시겠습니까. 봉서를 태합께 올리시면 조선을 칠 명분이 됩니다. 성마다 문을 열게 하고, 왕자를 볼모로 잡을 수 있습니다. 대신 이 나라 전체가 우리 등 뒤의 칼이 됩니다.”

가토“안 올리면.”

이이다“고니시 님만 치시면 됩니다. 봉서를 쥐고 계시다는 것만 알려도 고니시 님은 대장 앞에서 고개를 못 듭니다. 조선 땅은 지금처럼 조용할 겁니다. 다만 태합께서는 계속 거짓을 믿으십니다.”

가토는 걸음을 멈추고 진막 쪽을 보았다. 등잔 아래 기둥에 묶인 박의길의 그림자가 장막에 비쳐 있었다. 저 사내는 제 왕의 거짓을 옷 안감에 꿰매고 강을 건넜다. 가토는 저도 모르게 제 갑옷 안쪽을 더듬었다. 땀에 전 속옷 말고는 아무것도 손에 걸리지 않았다.

가토 기요마사의 선택

III · 바다를 건너는 글

가토는 봉서를 다시 기름종이에 싸서 밀랍으로 봉했다. 겉에는 자기 이름과 수결을 적었다. 고니시를 거치지 않고 태합께 바로 올라가는 글이었다.

가토“이이다, 전령은 누구로 하냐.”

이이다“제 조카 마고시로를 보내겠습니다. 바다에 익숙합니다.”

가토“조카를 보내도 되겠나. 이건 받는 쪽도 무겁지만 들고 가는 쪽도 무겁다. 잘못되면 네 누이 얼굴을 어찌 보려고.”

이이다“그래서 제 피붙이를 보냅니다.”

새벽 포구에서 작은 배가 떠났다. 가토는 배가 물마루 너머로 사라질 때까지 서 있었다. 그날 낮부터 그의 군사들은 안변 둘레 고을의 관아로 들어가 성문 열쇠를 거두었다. 열쇠를 내놓는 아전들은 하나같이 가토의 깃발 쪽으로 눈을 들지 않았다.

시월 중순, 함경도 북쪽으로 피난한 조선 왕자 둘이 회령에서 붙잡혀 왔다는 전갈이 닿았다. 그 고을 아전들이 제 손으로 묶어서 넘겼다고 했다.

가토“조선 사람이 제 손으로 왕자를 묶어 왔다고? …허. 왕이 두 얼굴이면 아전도 두 얼굴인가.”

이이다“대장, 왕자들을 어찌합니까.”

가토“따뜻한 방에 두고 밥을 잘 먹여라. 볼모는 살아 있어야 값이 있다. 그리고 우리 아이들 솜옷부터 챙겨. 이제 이 나라 사람 누구도 우리한테 옷을 주지 않는다.”

그날 밤 진막 밖에서 처음으로 화살 하나가 날아와 장막에 꽂혔다. 보초가 소리를 질렀지만 쏜 사람은 이미 어둠 속으로 사라진 뒤였다. 가토는 화살을 뽑아 들고 오래 들여다보았다. 화살대에는 서툰 글씨로 한 글자가 새겨져 있었다. 통사는 그것이 원수를 뜻하는 글자라고 했다.

가토“원수라. 길 빌려줄 때는 손님이라더니, 글 한 장에 원수가 됐군. 이이다, 오늘부터 보초를 두 배로 세워. 그리고 저 화살은 버리지 말고 내 진막에 걸어 둬. 내가 뭘 샀는지 잊지 않게.”

다른 선택을 했다면…

비단 상자에 짧은 편지 한 장만 담아 평양으로 보냈다면, 열흘 뒤 길고 공손한 답이 온다. 한편 안변 진영의 역관은 솜옷 한 벌과 따뜻한 방 한 칸을 받고 아침마다 짚신을 센다.

III · 쥐고 있는 칼

가토는 봉서를 태합께 올리지 않았다. 대신 짧은 편지 한 장을 평양으로 보냈다. 고니시의 사자가 바쳤던 비단 상자에 담아서였다.

가토“이이다, 고니시한테 이렇게만 써. 네 거짓은 내 손에 있다. 나는 그것을 아직 바다에 띄우지 않았다. 앞으로 태합께 올리는 글은 먼저 내게 보여라.”

이이다“그것뿐입니까. 고니시 님을 치실 줄 알았습니다.”

가토“뽑아서 한 번 베면 끝이야. 안 뽑고 들고만 있으면 그놈은 매일 목이 간지럽지. 장사꾼이 그걸 모를 리 없고.”

열흘 뒤 평양에서 답이 왔다. 고니시의 편지는 길고 공손했고, 끝에는 쌀 삼백 섬을 안변으로 보내겠다는 말이 붙어 있었다. 가토는 편지를 다 읽고 나서 통사에게 쌀 섬 수만 다시 읽게 했다.

그는 박의길의 결박을 풀어 주었다. 다만 진영 밖으로 내보내지는 않았다. 솜옷 한 벌과 따뜻한 방 한 칸을 주고, 아침마다 군사들의 짚신을 세게 했다.

박의길“장군, 어찌 소인을 살려 두십니까. 소인이 쓸모가 있습니까.”

가토“있다. 네가 살아 있는 동안 고니시는 내 말을 듣는다. 그리고 네 왕도 언젠가 너를 찾겠지. 안 찾으면, 그때 네가 누구 좋으라고 강을 건넜는지 알게 될 거다.”

박의길은 대답하지 않았다. 그는 그날부터 군사들의 해진 짚신을 세다가, 밤이면 짚을 꼬아 새 신을 삼았다.

초겨울 첫눈이 내리던 날, 가토는 마구간 앞에서 동상 걸린 병사의 발에 가죽 신을 신겨 주었다. 나무묘법연화경을 낮게 외는 그의 목소리를, 멀리 선 박의길이 처음으로 끝까지 들었다.

이이다“대장, 태합께서 언젠가 고니시 님 거짓을 아시게 되면, 그걸 알고도 덮은 대장도 함께 벌을 받으실 겁니다.”

가토“안다. 그러니까 안 버리고 쥐고 있지. 그날 오면… 이 종이를 내밀어야지. 내 목 대신.”

다른 선택을 했다면…

봉서를 다시 기름종이에 싸 밀랍으로 봉하고 자기 수결을 적었다. 새벽 포구에서 작은 배가 떠난 그날 낮부터, 안변 둘레 고을 아전들은 눈을 내리깐 채 열쇠를 내놓기 시작한다.

제2장 · 루트 r4

입조

1592년 5월 ~ 10월 · 왕더러 바다를 건너 절하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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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조는 명 황제의 칙서를 상자에 넣어 잠갔고, 고니시는 “길만 빌려준다”는 답서를 “조선 왕이 머리를 숙여 복속했다”로 고쳐 올렸다. 아무것도 모른 요동은 유월에 하루 만에 무너졌고, 태합은 들떠서 새 명을 내렸다. 복속한 조선 왕은 나고야로 건너와 직접 절하라는 것이었다. 한 사람의 거짓이 바다를 건너, 한 나라 왕의 무릎으로 돌아왔다.

시점 1 / 3권율광주목사

I · 공물 수레

칠월 그믐, 과천 남태령 아래 역참 마당에 수레 마흔 대가 늘어서 있었다. 광주목사 권율은 맨 앞 수레부터 거적을 하나씩 들추었다. 쌀가마인 줄 알았는데 아니었다. 인삼 궤짝, 호랑이 가죽, 매를 담은 대나무 장, 붉은 보자기에 싼 비단 필.

역관 최응룡“사또, 왜군 군관 말로는 이게 다 입조 행렬에 실려 갈 공물이랍니다. 경기 고을마다 이만큼씩 내라고요. 짐꾼도 고을마다 쉰씩 내라 합니다.”

권율“입조? 누가 어디로 들어가서 절을 한다고.”

최응룡“우리 전하께서요. 바다 건너 나고야로 가서 태합께 절하셔야 한답니다. 조선이 복속했으니 마땅하다고, 그리 말합디다.”

권율은 매 장 앞에서 걸음을 멈추었다. 장 안의 매가 그를 노려보며 깃을 부풀렸다. 그는 괜히 손가락으로 대나무 살을 한 번 튕겼다가 얼른 손을 뺐다.

권율“복속? 그건 처음 듣는 소린데. 우리는 길만 빌려준다고 들었어. …볍씨 자루는 그대론데, 누가 바다 건너가는 길에 이름표를 바꿔 달았구먼.”

군관 한득룡“사또, 도성은 벌써 그 얘기로 시끄럽답니다. 전하께서 가셔야 한다는 쪽하고, 목이 날아가도 안 된다는 쪽하고 둘로 갈렸다고요.”

권율“조정이 갈리는 게 어디 하루 이틀이냐. 그보다 이 수레는 누가 끄냐. 그게 문제지. 자네가 끌 텐가?”

한득룡“사또, 정말 전하께서 바다를 건너실까요?”

권율“내가 어찌 알아. 안 가시면 누가 대신 가겠지. 그 사람 짐은 또 딴 사람이 지고, 그 사람 짐은 또… 그렇게 내려오다 보면 맨 끝에 누가 서 있겠냐.”

유월에 요양성이 하루 만에 무너졌다는 소식이 올라온 뒤로 일본군은 눈에 띄게 달라졌다. 한양 남대문 밖 숙영지에서는 밤마다 북이 울렸다. 군관들은 조선 관원과 마주쳐도 허리를 덜 굽혔고, 오늘 아침 그 군관도 권율에게 턱 끝으로 수레를 가리켰다.

과천 고을 좌수 송 노인이 짚신을 끌며 다가왔다. 손에 든 장정 명부가 땀에 젖어 있었다.

송 노인“사또, 쉰을 내라는데 우리 고을 장정이 다 해서 일흔입니다. 쉰이 가면 가을걷이는 아녀자하고 늙은이 몫이고요. 그리고… 부산 갔다가 다 돌아온다는 말은 아무도 안 하더이다.”

권율“돌아오게 해야지. 내가 그 장부를 쥐고 있는 동안은.”

송 노인“사또가 끝까지 쥐고 계실 수 있습니까? 그 장부를요.”

권율은 대답하지 않고 노인 손에서 종이를 받았다. 두 번 접어 품에 넣으니 이름 쉰 개가 가슴께에서 바스락거렸다. 마흔여섯에 급제하기 전 스무 해 동안, 그는 남의 논두렁에 서서 마름이 일꾼 이름을 부르는 소리를 숱하게 들었다. 마름은 늘 곰방대를 물고 있었다. 권율은 빈 입술을 한 번 다셨다.

II · 두 장의 종이

팔월 초닷새, 사위 이항복의 편지가 왔다. 도승지의 글씨는 평소처럼 단정했는데 줄 끝마다 먹이 번져 있었다. 밤에, 등잔 하나 켜 놓고 급히 쓴 글이었다.

편지에 따르면 조정은 끝내 전하를 보내지 않기로 했다. 병환이 깊다고 일본에 알리고, 대신 왕자 임해군과 글 잘하는 사절 하나를 보낸다고 했다. 왜는 승려를 귀히 여기니 이름난 승려를 사절로 붙이면 노여움이 덜하리라는 셈이었다.

권율“왕은 앓아누우시고, 왕자는 배 타고, 중은 절하고. …그 셈에 백성은 어디 들어가 있나.”

한득룡“수레 끌지요, 사또.”

권율“그래. 그거야 늘 하던 거고. 누가 빼 주겠냐.”

그날 오후 도성에서 종이가 또 한 장 내려왔다. 성균관 유생들과 몇몇 대간이 연명한 상소문 사본이었다. 왕자를 적의 땅에 보내는 건 나라의 뼈를 내주는 일이니, 차라리 길을 닫고 싸우자는 내용이었다. 맨 끝에 지방 수령들 이름을 받는 빈칸이 있었다.

한득룡“사또, 여기 이름을 올리시면 행렬 군량 일에서는 빠지셔야 할 겁니다. 왜군도 가만있지 않을 거고요.”

권율“안 올리면? 내가 왕자를 부산까지 모셔다 바다에 띄우는 사람이 되겠지.”

한득룡“남쪽 바다 소식은 들으셨습니까. 여수 좌수영이 격군을 다 돌려보냈답니다. 이제 부산 앞바다엔 왜선뿐이라고요. 왕자 행차가 바다에 나서도 지켜 줄 우리 배가 한 척도 없다는 말입지요.” 권율은 눈을 감고 콧등을 한참 눌렀다. 둑은 벌써 헐렸는데, 그 물길로 왕자를 띄워 보내라는 얘기였다.

한득룡“그래도 남쪽에선 이상한 말이 올라옵니다. 여수 앞바다에 등에 쇠못 박은 배가 숨어 있다나요. 왕자 행차가 바다에 나서면 그 배가 멀리서라도 따라붙지 않겠느냐고들 합니다.” 권율은 피식 웃었다. 뜬소문인 줄 알면서도, 그는 쇠못 박힌 배 한 척을 머릿속에 그려 보고 있었다.

해 질 녘 일본군 군관이 다시 역참에 왔다. 짐꾼 수가 모자란다며, 내일 아침까지 못 채우면 군사를 풀어 마을에서 직접 끌어가겠다고 했다. 뒤에 선 조총수들은 벌써 심지에 불을 붙여 두고 있었다.

최응룡“사또, 저자가 그럽니다. 복속한 나라 관원이 어째 이리 굼뜨냐고. 표정이 영 안 좋습니다.”

권율“전하게. 복속이고 뭐고, 늙은이라 굼뜬 거라고. 그리고 농사꾼은 볍씨 뿌리기 전에 하늘을 한 번 더 쳐다본다고, 그것도 전해.”

그는 품속의 종이 두 장을 꺼내 등잔 아래 나란히 놓았다. 과천 장정 쉰의 이름, 그리고 빈칸이 남은 상소문이었다. 어느 쪽에 먹을 묻혀도 다른 쪽 이름들이 눈에 걸렸다.

권율“득룡아, 행주 덕양산 옛 성터에 샘이 아직 나오던가.”

한득룡“봄에 가 보니 나왔습니다, 사또. …그건 왜 물으십니까?”

권율은 고개만 끄덕이고 등잔불을 낮추었다. 창밖에서 조총 심지 불이 반딧불처럼 흔들렸다.

권율의 선택

III · 남쪽으로 가는 길

이튿날 새벽, 과천 장정 쉰이 역참 마당에 모였다. 권율은 품속 종이를 펼쳐 이름을 하나씩 불렀다. 뒤로 갈수록 대답하는 목소리가 작아졌다.

권율“이 종이, 내가 부산까지 들고 간다. 돌아올 때 이 이름을 다시 하나씩 부를 거다. 대답 못 하는 놈 있으면 그건 내 탓이고.”

송 노인“사또가 가신다고요? 아니, 목사가 짐꾼 행렬을 따라가는 데가 어디 있습니까.”

권율“없지. 그래도 이 종이를 남한테 맡길 수는 없잖은가.”

행렬은 왕자의 가마를 가운데 두고 남쪽으로 내려갔다. 앞뒤로 일본군이 섰고, 조선 짐꾼들은 그 사이에서 공물 수레를 끌었다. 길가 마을들은 문을 닫아걸고 틈으로만 내다보았다.

문경새재를 넘던 날, 짐꾼 하나가 고갯마루에서 쓰러졌다. 일본군 군관이 채찍을 드는 것을 보고 권율이 그 앞을 막아섰다.

권율“이 사람 짐은… 내가 지겠소. 대신 물 한 바가지 마실 동안만 기다리시오.”

군관은 늙은 목사가 정말로 지게를 지는 것을 보고 채찍을 내렸다. 그날 저녁 짐꾼들 사이에서 목사를 욕하는 소리가 처음으로 들리지 않았다.

권율“득룡아, 오늘 몇이냐.”

한득룡“쉰 모두 있습니다, 사또.”

권율은 장부에 '쉰'이라고 적었다. 그 옆에 아무도 못 읽을 작은 글씨로 '왕자 하나'라고 덧붙였다. 돌아올 때 이 칸에 무어라 적게 될지 몰랐다.

밤이 깊어 짐꾼 하나가 모닥불 곁으로 와 주먹밥 반 덩이를 내밀었다. 낮에 고갯마루에서 쓰러졌던 사내였다.

짐꾼“사또, 드십시오. 저희는… 사또가 왜놈 편인 줄 알았습니다.”

권율“편? 모르겠다. 나는 이 장부 편이야. 여기 적힌 놈들 다 데리고 돌아가야 하거든. 너도 여기 있어.”

다른 선택을 했다면…

상소 빈칸에 이름을 적어 올린 밤. 새벽 한강 나루에는 처자식과 소를 끌고 온 장정들이 모여들어 나룻배에 나뉘어 탄다. 덕양산 위에서는 어느 날 강가에 횃불이 줄지어 나타난다.

III · 빈칸의 이름

권율은 그날 밤 상소문 빈칸에 이름을 적었다. 광주목사 권율. 먹이 마르기도 전에 종이를 접어 한득룡에게 건넸다.

권율“이거 도성에 올려라. 오늘 밤 안으로. 과천 장정들은 집으로 돌려보내고. 짐꾼은 오늘부터 한 놈도 없다.”

한득룡“사또, 그럼 왜군이 마을로 들이닥칠 겁니다.”

권율“그러니까 마을을 비우는 거지. 장정들한테 볍씨 독 지고 행주로 오라 일러라. 가을걷이는 산 위에서 하자고.”

새벽이 오기 전 한강 나루에 사람들이 모였다. 과천, 시흥, 양천에서 장정들이 처자식과 소를 끌고 왔다. 권율은 나룻배마다 사람을 나누어 태우며 이름을 받아 적었다. 행주 덕양산에 닿았을 때 이름은 오백을 넘었다.

일본군 짐꾼 행렬은 사흘 늦게 떠났다. 조선 짐꾼 대신 일본 아시가루가 공물 수레를 끌었다는 소문이 산 위까지 올라왔다. 장정들은 그 말에 오랜만에 소리 내어 웃었다.

이레 뒤 이항복의 편지가 왔다. 상소에 이름을 올린 수령은 권율까지 넷뿐이라고 했다. 조정은 그 넷을 파직하자는 쪽과 감싸자는 쪽으로 또 갈렸다고 했다.

이항복“장인 어른, 전하께서는 장인 어른 이름을 보시고 옥대 고리를 오래 만지셨다 합니다. 화가 나신 건지 부러우신 건지, 아무도 모르겠답니다.”

권율“부러우셨겠지. 왕은 빈칸에 이름을 못 적으시니까.”

그는 편지를 접고 샘으로 가서 얼굴을 씻었다. 물이 차서 이가 시렸다. 석 달은 안 마르겠다 싶어 한 번 더 떠 마셨다.

그날 밤 산 아래 강가에 일본군 횃불이 처음으로 줄지어 나타났다. 횃불은 다가오지 않았다. 강둑을 따라 오래 서성이다가 새벽녘에 사라졌다.

한득룡“사또, 저놈들이 재 보고 간 겁니다.”

권율“재 보라 그래. 덕분에 우리도 둑 높이를 알았다. 내일 한 자 더 쌓자.”

다른 선택을 했다면…

품속 종이에 쉰 사람 이름을 적어 행렬을 따라나섰다면, 왕자의 가마 앞뒤로 일본군이 서고 조선 짐꾼들은 그 사이에서 공물 수레를 끈다. 문경새재 고갯마루에서 누군가 쓰러진다.

시점 2 / 3사명대사금강산 유점사의 승려

I · 교지

팔월 열흘, 금강산 유점사 산문 앞으로 예조 낭관 하나가 가마를 타고 올라왔다. 가마꾼들은 비탈길에 지쳐 숨을 몰아쉬었다. 낭관은 가마에서 내리자마자 비단 보자기를 풀어 누런 교지를 높이 받쳐 들었다.

예조 좌랑 정희원: “유점사 승려 유정은 교지를 받으라. 그대를 일본 입조 사절의 부사로 삼는다. 왕자 임해군 마마를 모시고 나고야로 건너가, 전하를 대신하여 태합께 예를 올리라.”

마당에 모인 승려들이 웅성거렸다. 젊은 승려 혜구는 빗자루를 든 채 굳어 있었다. 사명대사는 합장하고 교지를 받았지만 펼쳐 보지는 않았다. 쓸다 만 낙엽 더미가 먼저 눈에 들어왔다.

사명대사“좌랑, 전하를 대신해 예를 올리라 하셨소. 예요, 절이요?”

정희원“그게 무엇이 다르오? 예나 절이나.”

사명대사“다르지요. 서서 하느냐, 엎드려 하느냐. 소승 무릎이 요새 시원찮아서 여쭙는 거요.”

정희원의 얼굴이 붉어졌다. 그는 목소리를 낮추어, 대신들이 밤새 다투어 겨우 낸 결론이라고 했다. 전하는 병환이 깊다고 알리고, 왕자와 승려를 보낸다. 왜는 승려를 귀히 여기니 이름난 고승이 가면 태합의 노여움도 덜하리라는 셈이었다.

정희원“스님, 솔직히 말씀드리리다. 일이 잘되면 조정 공이고, 틀어지면 산중 중 하나가 말을 잘못한 탓이 되오. 조정은 그래서 스님을 고른 거요.”

사명대사“좌랑은 정직하구려. 그래 가지고 조정에서 오래 버티시겠소?”

정희원“이미 못 버텼소. 그러니 이 산길을 오르고 있지. 가마 타고.”

사명대사는 처음으로 웃었다. 그는 좌랑을 공양간으로 데려가 보리밥 한 그릇을 내주었다. 좌랑은 두어 번 사양하다 숟가락을 들더니, 그릇을 다 비우고 나서야 산을 오르는 내내 아무것도 못 먹었다고 털어놓았다.

그날 저녁 묘향산의 스승 서산대사에게서 편지가 왔다. 교지보다 이틀 늦게 떠나 하루 늦게 닿은 편지였다. 일흔셋 노승의 글씨는 여전히 대나무처럼 곧았다.

혜구“스님, 큰스님께서는 뭐라 하십니까? 또 물음만 보내셨지요?”

사명대사“무릎은 하나인데 절할 곳은 셋이라. 부처, 임금, 백성. 어디부터 꿇겠느냐, 하시네.”

혜구“그럼 답은 뭐라고 적으셨습니까?”

사명대사“늘 그렇듯 안 적으셨다. 물음만 던져 놓고 답은 나더러 찾으라시지. 내가 열여섯에 처음 찾아갔을 때부터 그러셨어.”

혜구“스님께서는 어디에 먼저 꿇으시렵니까? 저는 그게 궁금해서…”

사명대사“글쎄다. 부처님은 기다려 주시고, 임금은 재촉하시고… 백성은 아무 말이 없지. 그게 제일 마음에 걸린다. 아무 말이 없으니 어디가 아픈지를 모르겠어.”

그날 밤 정희원은 객방에서 일찍 곯아떨어졌다. 사명대사는 교지와 스승의 편지를 불단 앞에 나란히 펼쳐 놓고 오래 앉아 있었다. 촛불이 흔들릴 때마다 그는 손바닥으로 두 종이의 귀퉁이를 번갈아 눌렀다.

II · 대신 꿇는 무릎

사흘 동안 유점사에는 산 아래 소식이 잇달아 올라왔다. 왕자 임해군의 행차가 한양을 떠날 채비를 한다는 말, 경기 고을마다 짐꾼과 공물을 거둔다는 말, 어느 고을 목사가 상소에 이름을 올렸다는 말까지 있었다. 그사이 일본군은 금강산 아래 회양에도 군사를 보내 길을 닦았다.

나흘째 밤, 늙은 사형 처영이 지팡이를 짚고 선방에 들어왔다. 성미가 불 같은 그는 교지 이야기를 듣고 이틀 동안 입을 닫고 있었다.

처영“유정, 가지 말게. 왕이 병을 핑계로 숨고 중을 내밀었어. 자네가 가서 엎드리면 그건 조선 임금 무릎이 아니라 우리 불가 무릎이 꺾이는 걸세.”

사명대사“사형, 내가 안 가면 누가 가오? 사형이 가시겠소?”

처영“아무도 안 가면 되지. 산문 닫고 승병을 모으세. 금강산 골짜기마다 젊은 중이 수백이야. 교지 안 받았다고 조정이 우리를 치러 오겠나, 왜놈이 치러 오겠나. 오면 오라지.”

사명대사“둘 다 오겠지요. 조정은 교지를 거역했다고, 왜는 입조를 막았다고.”

처영“그럼 둘 다 맞지 뭐. 최소한 남의 거짓을 대신 지고 가지는 않잖나.”

문밖에서 듣던 혜구가 들어와 꿇어앉았다. 그는 산 아래 마을에 부모를 둔 승려였고, 그 마을 장정들도 이번에 짐꾼으로 뽑혀 갔다.

혜구“스님, 마을에서 들은 말이 있습니다. 어머니가 사람 편에 전해 왔는데요, 왕자 마마가 성미가 사나워서 행차 길에 벌써 아전 둘을 매질했답니다. 그런 분 모시고 바다를 건너시면, 마마가 저쪽에서 무슨 일을 저지르시든 그 탓이 다 스님께 돌아옵니다.”

사명대사“그렇겠지. 조정이 그래서 날 고른 거다. 탓 받아 줄 사람이 필요했으니까.”

처영“알면서 왜 가려 하나. 응?”

사명대사는 대답 대신 창을 열었다. 달빛 아래 계곡물이 바위에 부딪혀 둘로 갈렸다가 다시 합쳐지고 있었다.

사명대사“사형, 저 물 좀 보시오. 바위에 막히면 그냥 돌아가잖소. 싸우지도 않고. 그래도 저 바위 모서리 좀 보시오. 반들반들하지. 내가 저기 앉아서 삼 년을 봤소.”

처영“그래서 자네는 백 년을 기다리겠다는 겐가.”

사명대사“아니, 그런 말이 아니라… 모르겠소. 물이 될지 둑이 될지. 듣고 보니 사형 말이 맞는 것도 같고. 지금이 어느 땐지, 그걸 모르겠단 말이오.”

처영“모르면 물어보게. 산 아래 짐꾼들한테. 이 거짓을 지고 가는 첫 등짝이 그 사람들이니까.”

혜구“제 아비도 그 짐을 졌습니다, 스님. 공물 수레가 고개를 못 넘으면 사람이 대신 진다고 했습니다.”

사명대사는 한참 혜구를 내려다보았다. 젊은 승려의 손등에는 어릴 적 지게 끈에 쓸린 흉터가 아직 허옇게 남아 있었다. 그는 저도 모르게 그 흉터에 손가락을 대 보았다가 거두었다.

처영은 지팡이로 바닥을 한 번 쳤다. 그러고는 아무 말 없이 나갔다. 혜구는 그 자리에 남아 스님의 낡은 짚신을 집어 끈을 고쳐 매기 시작했다.

사명대사의 선택

III · 돌려보낸 교지

이튿날 새벽, 사명대사는 교지를 다시 비단 보자기에 싸서 정희원에게 돌려주었다. 계곡 돌다리 위였다. 안개에 젖은 보자기가 손에 척척 감겼다.

사명대사“좌랑, 전하께 아뢰시오. 산중 중은 부처님께 꿇는 무릎밖에 없어서 임금 대신 꿇어 드릴 수가 없다고. 그 대신 이 산은 이 산 중들이 지키겠다고.”

정희원“스님, 이러시면 교지를 거역한 죄가 됩니다.”

사명대사“알고 있소. 그 죄는 내가 지지. 남의 거짓 지는 것보다는 내 고집 지는 게 덜 억울하오.”

정희원은 한참 사명대사를 바라보다가 보자기를 받았다. 다리 아래로 안개가 흘렀고, 바위 비탈에 늘어선 젊은 승려들의 몽둥이 끝에 이슬이 맺혀 있었다. 그는 돌아서다 말고 낮게 말했다.

정희원“나도 그 상소에 이름을 올리고 싶었소. 그런데 나는 예조 낭관이라… 교지를 들고 와야 했지요.”

그날부터 유점사 산문에 빗장이 걸렸다. 처영이 표훈사, 장안사, 신계사를 돌며 젊은 승려들을 모았다. 열흘 만에 삼백이 넘었다.

사명대사“사람 베자고 모인 거 아니네. 이 산 밟고 지나가는 거짓을 막자는 거지. 칼 내려놓고 오는 자한테는 길을 내줘. 알겠나? 내주라고.”

보름 뒤 왕자 행차가 사절 없이 남쪽으로 떠났다는 소식이 올라왔다. 조정은 사명대사 대신 예조의 늙은 당상관 하나를 부사로 붙였다고 했다. 그리고 회양과 철원에는 금강산 승려들이 교지를 거역하고 칼을 들었다는 방이 나붙었다.

처영“유정, 이제 자네는 역적일세.”

사명대사“사형도 같이요. 둘이니 심심하지는 않겠구려.”

처영이 오랜만에 소리 내어 웃었고, 혜구까지 따라 웃었다. 그래도 그날 밤 산문 보초는 두 배로 늘었다. 사명대사는 새벽까지 염불을 하며 산 아래 길 쪽으로 귀를 기울였다. 올라오는 게 조정 군사일지 일본 군사일지 아무도 몰랐다.

다른 선택을 했다면…

혜구가 고쳐 맨 짚신에 지팡이 하나만 짚고 산을 내려가면, 철원에서 스물한 살 왕자가 가마 창을 열고 늙은 승려를 위아래로 훑는다. 이튿날 그는 혼자 가토의 진막을 찾는다.

III · 먼저 가는 무릎

사명대사는 교지를 받들었다. 혜구가 고쳐 맨 짚신을 신고 지팡이 하나만 짚은 채 산을 내려갔다. 끈이 너무 단단해 발등이 조금 아팠다.

철원에서 왕자 행차와 만났다. 임해군은 가마 창을 열고 늙은 승려를 위아래로 훑었다. 스물한 살 왕자의 눈가가 자꾸 씰룩거렸다. 겁이 난 건지 짜증이 난 건지, 아마 둘 다였다.

임해군“네가 나 대신 절을 해 줄 중이냐.”

사명대사“마마, 소승은 대신 절하러 온 게 아니라… 마마가 절하지 않으셔도 되게 해 보려고 왔습니다.”

임해군“그게 무슨 소리냐.”

사명대사“나고야에 닿기 전에 길이 바뀔 수도 있다는 소리지요.”

이튿날 사명대사는 행렬을 떠나 홀로 일본군 진영으로 갔다. 행렬을 부산까지 모시는 장수가 가토 기요마사라고 들었다. 법화경을 받든다는 장수라면, 바다를 건너기 전에 말 한마디는 붙여 볼 수 있을 것 같았다.

가토는 진막 안에서 그를 맞았다. 높은 투구를 벗어 무릎에 올려놓고, 늙은 승려를 오래 바라보았다.

가토“중이 왜 왕자보다 먼저 왔나.”

사명대사“왕자는 바다를 건너면 볼모지만, 중은 건너도 그냥 중이오. 그러니 가벼운 쪽이 먼저 와서 길을 재 보는 거요.”

가토“나무묘법연화경. 재 보니 어떤가.”

사명대사“장군의 태합이 원하시는 건 조선 왕의 무릎이오. 그런데 지금 가는 건 왕자 무릎하고 중 무릎이오. 태합께서 그 차이를 아시면 누구를 꾸짖으시겠소? 무릎을 바꿔치기한 조선 조정이오, 아니면 처음부터 복속했다고 아뢴 그 사람이오?”

가토는 대답하지 않았다. 다만 그날 밤 사명대사에게 따뜻한 진막 한 칸을 내주었다. 진막 앞에는 보초 대신 늙은 아시가루 하나가 화로를 지키며 꾸벅꾸벅 졸았다. 사명대사는 그 화롯불에 손을 쬐며, 이 장수가 아직 칼끝을 어디로 둘지 못 정했다고 생각했다.

다른 선택을 했다면…

교지를 비단 보자기에 도로 싸 안개 낀 돌다리 위에서 건넨다면, 젖은 보자기가 손에 척척 감긴다. 그날부터 유점사 산문에 빗장이 걸리고 처영은 절마다 돌며 젊은 승려들을 모은다.

시점 3 / 3가토 기요마사일본군 제2군 대장

I · 가마꾼의 장수

팔월 그믐, 한양 남산 아래 일본군 진영에 나고야의 사자가 닿았다. 태합의 붉은 인장이 찍힌 서신이었다. 가토 기요마사는 무릎을 꿇고 두 손으로 서신을 받았고, 통사가 읽기도 전에 제 눈으로 먼저 훑었다.

통사“조선 왕자의 입조 행렬을 부산포까지 호위하라. 길에서 털끝 하나 다치지 않게 하고, 예를 갖추어 모시라. 이 일은 가토 가즈에노카미에게 맡긴다.”

가토“모시라. 태합께서 나더러 가마를 모시라신다. 가마를.”

이이다 가쿠베에“대장, 영예로운 일입니다. 조선 왕실을 태합께 바치는 길을 대장께서 여시는 겁니다.”

가토“영예라. …요양성은 누가 떨어뜨렸더라.”

이이다는 대답하지 못했다. 칠월에 요양성이 떨어졌을 때 그 공은 고스란히 고니시 유키나가에게 갔다. 조선이 길을 열고 명이 아무것도 몰랐으니, 압록강을 먼저 건넌 고니시는 칼 한 번 크게 뽑지 않고 요동의 큰 성을 얻었다. 그사이 가토는 함경도의 험한 고갯길을 넘어 두만강까지 갔다가, 여진 부락 몇 곳을 태우고 빈손으로 돌아왔다. 그때 얼었던 왼발 새끼발가락이 지금도 비만 오면 쑤셨다.

가토“장사꾼은 성을 얻고, 나는 가마를 얻었군. 나무묘법연화경. 부처님도 주판을 놓으시나.”

이튿날 가토는 경복궁 근정전 앞뜰에서 임해군을 처음 보았다. 스물한 살 왕자는 붉은 비단 철릭 차림으로 가마 곁에 서 있다가, 일본 장수가 다가오자 턱을 치켜들었다. 그러나 가토의 높은 투구가 그림자를 드리우자 왕자의 손끝이 옷자락을 움켜쥐었다.

임해군“네가 나를 호위한다는 왜장이냐. 내 가마 앞에서 말을 타지 마라. 조선에서는 왕자 앞에서 말을 탄 자의 다리를 부러뜨린다.”

가토“통사, 전해라. 일본에선 장수 말을 빼앗는 놈은 목을 벤다고.”

통사가 머뭇거리며 말을 옮기자 임해군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왕자 곁에 서 있던 늙은 내관 하나가 얼른 앞으로 나와 허리를 깊이 굽혔다. 머리가 희고 등이 굽은 노인이었다.

내관 엄세창“장군, 마마께서는 먼 길이 처음이라 말씀이 앞서십니다. 노여움은 이 늙은 것한테 푸십시오. 마마께서 지금… 무서우셔서 그러십니다.”

가토는 노인을 오래 내려다보았다. 구마모토에도 저런 늙은이가 있었다. 주군이 실수할 때마다 먼저 엎드리더니 첫 싸움에서 주군보다 먼저 죽었다. 가토는 아직 그 이름을 기억했다.

가토“노인, 이름이 뭐냐.”

엄세창“엄세창이라 합니다. 마마를 젖먹이 때부터 업어 키웠습니다. 쇤네 등이 이리 굽은 것도 그 탓입지요.”

가토“그럼 업은 채로 바다를 건너게 될지도 모르겠군.”

그날 밤 가토는 진막에서 혼자 술을 마셨다. 이이다가 들어오자 그는 잔을 내려놓았다. 화로 위에서 숯이 갈라지는 소리가 났다.

가토“이이다, 그 왕자 봤나. 거만하고 겁이 많아. 그런 놈은 말이지… 이쪽으로도 저쪽으로도 쓸 수가 있다.”

이이다“쓰신다니요, 대장. 태합께서는 모시라 하셨습니다.”

가토“모시라 하셨지. 그런데 조선 왕은 안 왔어. 병이 깊다고. 태합께서 그걸 믿으실 것 같나. 나라면 안 믿는다.”

II · 두 통의 서신

구월 초, 행렬은 한강을 건너 남쪽으로 내려갔다. 왕자의 가마와 공물 수레, 조선 짐꾼 수백이 늘어서 하루 삼십 리를 겨우 걸었다. 가토의 군사들은 행렬 앞뒤에서 창을 세우고 걸었고, 길가 마을 사람들은 문틈으로 그걸 지켜보았다. 아이 하나가 돌을 쥐었다가 어미에게 손목을 잡혀 끌려 들어갔다.

충주를 지날 무렵 나고야에서 두 번째 서신이 왔다. 가토는 말 위에서 그것을 읽었고, 다 읽고 나서도 한참 말을 세운 채 있었다.

통사“조선 왕이 병을 핑계로 오지 않는다면, 그 왕자를 볼모로 나고야에 데려오라. 왕이 몸소 바다를 건너올 때까지 왕자는 돌려보내지 않는다.”

이이다“대장, 그러면 손님이 아니라 볼모입니다. 조선 사람들이 알면 이 행렬부터 무너집니다. 짐꾼들부터 달아날 겁니다.”

가토“태합께서 언제 손님을 원하셨나. 무릎을 원하셨지.”

그날 저녁 문경새재 아래에서 이번에는 고니시의 사자가 행렬을 따라잡았다. 비단옷을 입은 사카이 상인 출신 사내였다. 그는 가토의 진막에 들어서자마자 엎드렸다.

고니시의 사자“장군, 저희 대장께서 간곡히 청하십니다. 왕자는 꼭 손님으로 모셔 주십시오. 볼모로 다루시면 조선이 등을 돌리고, 조선이 등을 돌리면 왜 조선 왕이 직접 오지 않았는지 태합께서 캐물으실 겁니다.”

가토“캐물으시면 어쩔 건데. 응? 말해 봐.”

고니시의 사자“그러면 조선이 처음부터 복속한 적이 없다는 게 드러납니다. 저희 대장의 글도, 장군이 지금 하시는 호위도, 다 거짓 위에 선 셈이 됩니다.”

가토는 웃었다. 진막 밖까지 들릴 만큼 크게 웃었다. 고니시가 뭘 겁내는지 뻔했다. 요양성의 공도, 태합의 총애도, 다 조선 왕이 머리를 숙였다는 한마디 위에 올려져 있었다. 그 한마디가 빠지면 맨 먼저 깔리는 건 그 약장수였다. 생각만 해도 술맛이 돌았다.

가토“돌아가서 전해라. 약장수가 팔아 놓은 물건을 내가 대신 배달하는 중이라고. 배달은 내 식으로 한다고.”

사자가 물러간 뒤 가토는 진막을 나와 왕자의 가마가 놓인 데로 걸어갔다. 엄세창이 가마 곁 모닥불 앞에 쪼그려 앉아 왕자의 버선을 말리고 있었다. 노인은 가토를 보자 일어나려 했다.

가토“앉아, 앉아. 왕자는 자나.”

엄세창“잠드셨습니다. 밤마다 바다 꿈을 꾸신다며 우십니다. 낮에는 아무한테나 소리를 지르시고, 밤에는 쇤네 소매를 붙드십니다.”

가토“노인, 하나만 묻자. 네 왕은 정말 아픈가. 솔직히.”

엄세창은 버선을 뒤집어 다시 불 쪽으로 내밀었다. 대답은 한참 뒤에 나왔다. 불빛 때문인지 노인의 눈가가 젖어 보였다.

엄세창“장군, 쇤네는 궁에서 쉰 해를 살았습니다. 임금께서 아프다 하시면 아프신 거고, 안 아프다 하시면 안 아프신 겁니다. …그래도 자식을 바다 건너로 보내면서 안 아픈 아비가 어디 있겠습니까.”

가토“그래서 그 아비 대신 아들이 건너는 거고. 편하군.”

엄세창“장군께서 건네주시면 건너시겠지요. 안 건네주시면 안 건너실 테고. 마마 길은 이제 장군 손에 있습니다. 쇤네는 그 손이 칼 쪽인지 노 쪽인지, 그것만 여쭙니다.”

가토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는 모닥불 너머 가마의 휘장을 보았다. 휘장 틈으로 잠든 왕자의 손이 삐져나와 있었다. 굳은살 하나 없는 말랑한 아이 손이었다. 가토는 저도 모르게 제 손바닥 굳은살을 엄지로 문질렀다.

가토 기요마사의 선택

III · 바다를 건너는 볼모

구월 스무날, 행렬은 부산포에 닿았다. 가토는 객사로 향하던 가마를 부두 쪽으로 돌리게 했다. 엄세창이 제일 먼저 눈치채고 가마 앞을 막아섰지만, 아시가루 둘이 창대로 노인을 밀어냈다.

임해군“이게 무슨 짓이냐. 나는 사절이다. 예를 갖추어 태합을 만나러 가는 왕자란 말이다! 이놈들!”

가토“통사, 전해라. 이제부터 당신은 사절이 아니라 약속이라고. 당신 아비가 바다를 건너오는 날, 당신은 집에 간다고.”

왕자는 소리를 지르다가, 배에 오르는 널빤지 앞에서 갑자기 조용해졌다. 그는 부두 끝에 꿇어앉은 엄세창을 돌아보았다. 노인은 창에 가로막힌 채 손을 뻗고 무어라 외쳤지만, 바닷바람이 그 소리를 찢어 놓았다.

이이다“대장, 노인도 태울까요. 마마 곁에 아무도 없으면 바다 위에서 죽겠다고 할 겁니다.”

가토“태워. 볼모는 살아 있어야 값이 나간다. 업어 키운 놈이 곁에 있어야 밥이라도 넘길 거고.”

배가 떠난 그날 오후부터 가토의 군사들은 부산진과 동래, 양산의 성문 열쇠를 거두었다. 조선 관원들은 항의했지만 창 앞에서 오래 버티지 못했다. 관아 곡식 창고에는 일본 군사가 보초를 섰고, 성루의 조선 깃발은 내려졌다.

시월 초, 동래 고을 아전 하나가 밤에 몰래 곡식 창고에 불을 질렀다가 붙잡혀 왔다. 그는 끝까지 이유를 말하지 않았다. 다만 끌려 나가면서 통사에게 한마디를 남겼다고 했다. 통사는 한참 망설이다가 그 말을 옮겼다.

통사“왕자를 판 나라에 쌀을 줄 수는 없다고 했습니다.”

가토“판 건 조선 조정이야. 나는 받았을 뿐이고. …그래도 그놈 말이 아주 틀린 건 아니군. 이이다, 오늘부터 창고마다 보초를 두 배로 세워.”

다른 선택을 했다면…

행렬이 부산포 대신 동래 객사에 든 밤, 가토는 문 앞 보초를 모두 물린다. 통사도 부르지 않고 투구를 벗은 채 등잔 아래서 제 손으로 붓을 쥐는데, 방문 앞에는 노인 하나가 졸고 있다.

III · 왕 없이는

구월 스무날, 행렬은 부산포 대신 동래 객사에 들었다. 가토는 왕자를 객사의 가장 따뜻한 방에 들이고, 문 앞 보초를 모두 물렸다. 대신 엄세창이 그 자리에 앉았다.

이이다“대장, 태합의 명은 볼모였습니다. 이러시면 명을 어기시는 겁니다.”

가토“어기는 게 아니다. 다시 여쭙는 거지. 태합께서 원하신 건 조선 왕 무릎이지, 겁먹은 애 무릎이 아니잖나.”

그날 밤 가토는 투구를 벗고 등잔 아래 앉아 직접 붓을 들었다. 통사를 부르지 않고 제 손으로 썼다. 글씨는 크고 거칠었지만 한 줄도 지우지 않았다. 다 쓰고 나니 손목이 저렸다.

가토“조선 왕은 오지 않았습니다. 왕자를 데려가면 조선은 아들을 빼앗겼다고 말할 것이고, 왕을 데려오지 못하면 태합께서는 무릎 없는 절을 받으시게 됩니다. 왕 없이는 바다를 건널 수 없습니다. 이 가토가 직접 조선 조정에 다시 묻겠습니다.”

서신을 봉한 뒤 그는 마당으로 나갔다. 엄세창이 방문 앞에서 꾸벅꾸벅 졸다가 인기척에 눈을 떴다. 노인은 무릎을 세우며 일어나려 했다.

엄세창“장군, 그 손은 노 쪽이었습니까.”

가토“아직은 아니다. 칼집에 넣었을 뿐이지. 노인, 태합께서 답을 보내시면 그땐 나도 어쩔 수 없어. 그 전까지만이다.”

엄세창“그 전까지면 됩니다, 장군. 쇤네 나이엔 열흘도 길지요. 마마께는 더 길고요.”

열흘 뒤 동래 장터에 조선 아낙들이 일본 군사들에게 떡을 팔러 나왔다. 왕자를 배에 태우지 않았다는 소문이 고을마다 돌았다고 했다. 가토는 진막 앞에서 그 떡을 하나 집어 먹었고, 이이다에게도 하나 던져 주었다.

가토“고니시 놈이 이걸 알면 배 아파 죽겠군. 지가 지키려던 거짓을 내가 지켜 줬으니.”

다른 선택을 했다면…

객사로 가던 가마를 부두 쪽으로 돌리게 했다. 늙은 신하가 앞을 막아서지만 창대에 밀려나고, 왕자의 고함은 배에 오르는 널빤지 앞까지 이어진다. 그날 오후 성문 열쇠를 거두는 군사들이 흩어진다.

제3장 · 루트 T1

조명 연합군

1592년 11월 ~ 1593년 3월 · 손님이 포위된 적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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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율은 조약을 깨고 행주 산성에 들어가 버텼고, 가토는 칼을 뽑을 수 있었던 자리에서 칼을 거두었다. 일본군 장수 하나가 머뭇거린 그 짧은 틈에, 조선 조정은 처음으로 고개를 북쪽으로 돌렸다. 길을 열어 준 나라가 이제 그 길을 닫으려 한다. 1593년 봄, 조선 한가운데의 손님들은 자기들이 포위되었다는 것을 깨닫기 시작한다.

시점 1 / 3도요토미 히데요시태합

I · 여섯 번째 손가락

명은 처음부터 알고 있었다. 압록강 건너편에는 명나라 요동군이 진을 쳤고, 고니시의 선봉은 강가에서 한 걸음도 못 나아간 채 겨울을 맞았다. 그사이 광주목사 권율은 군량 수레를 돌려 행주 산성으로 들어갔고, 함경도의 가토는 조선 왕자들을 남쪽으로 돌려보냈다. 태합은 아직도 조선이 정직하게 길만 빌려주었다고 믿고 있었다.

요양성은 유월에 하루 만에 무너졌고, 명은 조선을 배신자라 불렀다. 그 뒤로 일본군의 군량 요구는 끝이 없었다. 그러다 광주목사 권율이 징발대를 막고 덕양산 옛 성터에 들어앉았고, 함경도의 가토는 국경인을 묶어 조선 관찰사에게 넘기며 칼을 거두었다. 승전에 들뜬 나고야에 처음으로 이상한 소식들이 닿기 시작했다.

조선 왕의 봉서는 가토의 손에 들어갔지만, 가토는 그것을 바다에 띄우지 않았다. 봉서는 고니시의 목줄로만 쥐고, 조선 땅에는 칼을 대지 않았다. 그사이 광주목사 권율은 도성 열쇠를 품에 넣은 채 행주 산성으로 들어갔다. 태합은 여전히 조선이 머리를 숙였다고 믿었고, 그 믿음 곁에 선 사람들은 저마다 다른 이유로 입을 다물고 있었다.

조선 왕은 오지 않았다. 대신 온 왕자는 부산포가 아니라 동래 객사에 머물렀고, 호위를 맡은 가토는 “왕 없이는 바다를 건널 수 없다”는 서신을 제 손으로 써 올렸다. 그사이 광주목사 권율은 입조를 막는 상소에 이름을 올리고 행주 산성으로 들어갔다. 태합이 기다리던 무릎은 끝내 바다를 건너오지 않았다.

십일월 초, 나고야성 천수각 다다미방에 늦가을 햇살이 비스듬히 들었다.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금박 병풍 앞에 앉아 조선 지도를 무릎에 펼쳐 놓고 있었다. 오른손 엄지 옆에 붙은 작은 여섯 번째 손가락이 지도 위 강줄기를 천천히 따라 내려갔다.

히데요시“미쓰나리, 이 행주라는 데가 어디냐. 이름이 예쁘구나. 배가 지나가는 고을이란 뜻이냐? 응?”

이시다 미쓰나리“한양 서쪽, 한강 가의 작은 산성입니다, 전하. 광주 목사라는 늙은 문관이 관군과 장정 몇천을 끌고 들어앉았습니다. 우리 징발대를 막고 조약을 깼습니다.”

히데요시“늙은 문관이라. 이 원숭이도 늙었는데 말이야.”

그는 껄껄 웃었고, 곁에 선 시동들도 따라 웃었다. 미쓰나리가 두 번째 서신을 펼치자 웃음소리가 하나씩 꺼졌다. 시동들이 먼저였고 히데요시가 맨 나중이었다.

이시다 미쓰나리“가토 님의 서신입니다. 산성을 치지 않겠다고 하십니다. 조선 땅에 칼을 대면 조선 전체가 일어나고, 그러면 우리 군사는 이천 리 길 위에서 앞뒤로 막힌다 하셨습니다.”

히데요시“도라노스케가? 그 애가 칼을 거두자고 했다고? 다시 읽어 봐라.”

히데요시는 지도를 내려놓았다. 가토 기요마사는 그가 열두 살 때부터 데려다 키운 아이였다. 밥을 먹이고 칼을 쥐여 주고 첫 투구를 씌워 준 것도 그였다. 그 아이가 먼저 물러서자고 한 적은 지금껏 한 번도 없었다. 여섯 번째 손가락이 지도 귀퉁이를 접었다 폈다 했다.

히데요시“그 애가 겁을 먹었다면… 저기 뭐가 있는 거다. 미쓰나리, 바다 건너에서 올라온 글 다 가져와. 고니시 것만 말고, 하급 무사들 것까지 싹 다.”

그날 밤 천수각에는 등잔 열두 개가 켜졌다. 미쓰나리와 서기 셋이 밤새 조선에서 온 글을 읽어 올렸다. 군량이 줄어든다는 글, 조선 아전들이 창고 열쇠를 숨긴다는 글, 밤마다 진막에 화살이 날아든다는 글, 길가 마을이 텅 비었다는 글이었다.

히데요시“고니시 글에는 왜 이런 말이 하나도 없지?”

이시다 미쓰나리“고니시 님은 늘 좋은 소식만 올리십니다. …본래 장사꾼 집안이시니까요.”

히데요시“그래, 장사꾼이지. 그 장사꾼이 이 원숭이한테 뭘 팔았는지, 이제 값을 좀 따져 봐야겠구나.”

II · 포위된 손님

십이월 그믐, 눈발이 나고야 앞바다를 덮었다. 조선에서 건너온 배 한 척이 거의 부서진 채 항구에 닿았다. 배에서 내린 사자는 무릎을 꿇기도 전에 쓰러졌고, 품에서 피 묻은 서신 한 통이 나왔다.

이시다 미쓰나리“전하, 명나라 제독 이여송이 사만 대군을 이끌고 압록강을 건넜습니다. 조선 조정은 그 군사를 막지 않고, 도리어 길을 열고 군량을 내주고 있다 합니다.”

히데요시“길을 열어? 우리한테 열어 준 그 길을, 이번엔 명한테 열어 줬다고?”

이시다 미쓰나리“그렇습니다. 그리고 조선 남쪽 바다의 수군이 겨우내 배를 손본다는 소문도 있습니다. 아직 칼을 뽑지는 않았습니다만… 칼집은 닦고 있는 듯합니다.”

히데요시는 한참 아무 말이 없었다. 그러다 갑자기 일어나 맨발로 툇마루까지 걸어 나갔다. 눈송이가 그의 흰 머리 위에 내려앉았다. 시동이 털옷을 들고 쫓아 나왔지만 그는 손을 내저었다.

히데요시“미쓰나리, 조선 땅에 우리 군사가 몇이냐.”

이시다 미쓰나리“십오만이 넘습니다, 전하.”

히데요시“십오만이 남의 집 안방에 앉아 있는데, 주인이 대문을 걸어 잠그고 이웃을 불렀단 말이지. 그럼 우린 뭐냐. 손님이냐, 도둑이냐.”

이시다 미쓰나리“지금은… 갇힌 손님입니다, 전하. 문을 부수고 나가면 그때부터 도둑이고요. 주인하고 흥정을 하면, 손님으로 나갈 수는 있겠지요.”

히데요시는 웃지 않았다. 그는 오른손을 펴서 눈발 속에 내밀었다. 여섯 번째 손가락 위에 눈송이 하나가 내려앉았다가 녹았다. 어린 쓰루마쓰가 죽던 날에도 그는 이렇게 손을 내밀고 서 있었다. 그 아이를 묻고 나서 그는 더 큰 땅을 원했다. 아무도 다시는 손대지 못할 만큼 큰 땅을.

히데요시“이 원숭이는 평생 남의 집 대문을 부수고 들어갔어. 오와리 흙바닥에서 오사카성까지, 문 열어 준 놈은 하나도 없었지. 그런데 이번엔 열어 주더니 다시 잠가? 고약한 집이야, 조선은. 고약해.”

이시다 미쓰나리“전하, 고니시 님과 가토 님이 서로 다른 말을 올립니다. 고니시 님은 조선과 흥정하자 하시고, 가토 님은 칼을 거두되 퇴로를 지키자 하십니다. 그리고 몇몇 장수는 전하께서 직접 바다를 건너시라 청합니다.”

히데요시“직접이라. 쉰여섯 먹은 원숭이더러 배를 타라고? 허.”

그는 툇마루 끝에 앉아 눈 덮인 바다를 내려다보았다. 바다 저편 어딘가에서 그의 십오만도 이 눈을 맞고 있을 터였다. 미쓰나리가 장부를 안고 뒤에 서 있었지만, 그는 돌아보지 않았다.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선택

III · 금빛 갑옷

정월 초이레, 히데요시는 금빛 갑옷을 꺼내 입었다. 나가시노와 시즈가타케에서 입었던 그 갑옷이었다. 몸이 줄어 허리끈을 두 번 감아야 했다. 그래도 그는 거울 앞에서 한참 웃었다.

히데요시“어떠냐, 미쓰나리. 이 원숭이 아직 쓸 만하냐? 응?”

이시다 미쓰나리“전하, 바다가 거칩니다. 의원들도 겨울 뱃길은 안 된다 합니다. 부디…”

히데요시“그럼 봄에 간다. 그 전에 십만을 먼저 보내라. 조선의 성이란 성은 다 접수하고, 대문 잠근 놈들은 목을 베어 문간에 걸어. 조선 왕이 무릎 꿇으러 안 오면, 이 원숭이가 가서 꿇려 주마.”

명령은 그날로 사방에 퍼졌다. 규슈와 시코쿠의 영주들이 군사를 다시 모았고, 항구마다 배가 늘어섰다. 봄 모내기를 앞둔 농부들이 또 끌려갔다. 미쓰나리는 군량 장부를 펼쳐 놓고 밤새 붓을 놓지 못했다.

이시다 미쓰나리“전하, 쌀이 모자랍니다. 작년에 보낸 것도 아직 조선 길 위에서 썩고 있습니다.”

히데요시“모자라면 조선에서 가져와. 이제 거긴 우리 땅이다. 몇 번을 말하냐.”

그러나 그날 밤 혼자 갑옷을 벗을 때 그의 손은 오래 떨렸다. 투구 끈을 풀다가 여섯 번째 손가락이 걸려 피가 났다. 시동이 놀라 약을 가져왔지만 그는 손가락을 입에 물고 빨기만 했다.

히데요시“미쓰나리, 쓰루마쓰가 살아 있었으면 올해 몇 살이냐.”

이시다 미쓰나리“다섯 살이 되셨을 겁니다, 전하.”

히데요시“다섯 살이면… 갑옷 끈 정도는 묶어 줬겠구나. 됐다, 나가 봐라. 배는 봄에 뜬다. 그때까지 이 원숭이 손이 떨린다는 말이 성 밖으로 나가면, 그 입부터 꿰매 버린다.”

미쓰나리는 물러나며 등잔 하나를 끄고 갔다. 남은 불빛에 금빛 갑옷만 번쩍였다. 그 앞에 쪼그려 앉은 노인은 아직 손가락을 입에 문 채였고, 갑옷보다 훨씬 작았다.

다른 선택을 했다면…

고니시를 나고야로 불러들인 정월 보름. 문지방 너머에서 엎드린 그에게 첫마디가 떨어진다. 네 혀가 필요하다고. 그날 밤 구겨진 종이가 노인의 무릎 옆에 수북해진다.

III · 원숭이의 흥정

히데요시는 고니시를 나고야로 불러들였다. 고니시는 정월 보름에 닿았고, 문지방을 넘자마자 엎드려 이마를 바닥에 댔다. 손에는 늘 그렇듯 묵주가 감겨 있었다.

히데요시“일어나라, 약장수. 네 거짓은 나중에 따지자. 지금은 네 혀가 필요하다.”

고니시“전하, 무슨 말씀이신지.”

히데요시“조선과 흥정해라. 군사를 경상도 바닷가까지 물리겠다. 그 대신 조선은 우리 군사가 바다를 건너 돌아갈 때까지 길을 막지 말고, 명과 손잡은 일도 덮어 두라. 길값은 은으로 치르겠다.”

고니시의 얼굴에 처음으로 놀란 빛이 스쳤다. 태합이 먼저 물러서자는 말을 하는 건 처음 들었다. 그는 할 말을 찾지 못하고 이마를 더 깊이 바닥에 댔다.

고니시“전하, 조선은 이미 명나라 군사를 들였습니다. 흥정이 쉽지 않을 겁니다.”

히데요시“쉬우면 너를 불렀겠냐. 거짓 팔 때처럼 이번엔 참말을 팔아 봐라. 값은 그쪽이 더 나갈 거다.”

그날 밤 히데요시는 직접 붓을 들어 조선 왕에게 보낼 서신의 첫 줄을 썼다. 쓰고 구기고 또 썼다. 구겨진 종이가 무릎 옆에 수북해진 뒤에야 짧은 첫 줄 하나가 남았다.

히데요시“조선 국왕께. 길을 빌려준 은혜를 이 원숭이는 잊지 않았소.”

고니시가 물러간 뒤, 미쓰나리가 조용히 물었다. 정말 조선과 손을 잡으실 생각이냐고. 히데요시는 붓을 씻으며 대답했다.

히데요시“손을 잡는 게 아니다. 빼는 거지. 빼다가 손목 부러지지 않게, 살살.”

이시다 미쓰나리“조선이 그 손을 놓아 줄까요.”

히데요시“놓아 주겠지. 조선도 십오만 손님을 오래 먹일 쌀은 없어. 둘 다 배가 고프면 얘기가 빨라져. 다만 이 원숭이가 먼저 손을 내밀었다는 말은 절대 새어 나가선 안 된다. 바깥에는 태합께서 너그러이 길을 터 주셨다고 해라. 알겠지?”

미쓰나리는 고개를 숙였다. 그는 그 말을 장부 맨 앞장에 옮겨 적었고, 그 아래에 조선으로 보낼 은의 무게를 한 냥 단위까지 적어 넣었다.

다른 선택을 했다면…

정월 초이레에 금빛 갑옷을 꺼내 입었다면, 줄어든 몸 때문에 허리끈을 두 번 감아야 한다. 거울 앞에서 한참 웃는 노인 뒤로 항구마다 배가 늘어서고, 군량 장부는 밤새 펼쳐져 있다.

시점 2 / 3이순신전라좌수사

I · 날씨만 적은 일기

계사년 정월 초하루, 여수 전라좌수영 동헌 마루에 새벽 서리가 하얗게 앉았다. 이순신은 등잔을 끄고 창을 열었다. 바다는 잔잔했고, 돌산도 너머로 해가 붉게 올라오고 있었다. 그는 붓에 먹을 찍어 일기장을 펼쳤다.

일기에는 이렇게 적혔다. 맑음. 새벽에 어머니 계신 고음천에 사람을 보냈다. 동헌에서 군관들과 세배를 나누었다. 바람이 없어 배를 띄우기 좋은 날이었으나 띄우지 않았다.

송희립“사또, 한양에서 사람이 왔습니다. 좌의정 대감의 사사로운 편지랍니다. 공문이 아니라고, 사또 손에 직접 드리라 했답니다.”

이순신“들이게. 그리고 그 사람한테 따뜻한 국부터 먹이고. 한양서 여기까지 내내 눈길이었을 텐데.”

류성룡의 편지는 길지 않았다. 조정이 명나라 제독 이여송의 군사를 압록강 너머에서 맞아들였다는 것, 그러나 왜와 맺은 화친의 문서는 아직 찢지 않았다는 것, 전하께서 아직 어느 쪽에도 마지막 말을 하지 않으셨다는 것이었다. 끝에는 한 줄이 따로 적혀 있었다. 바다에는 아직 명령이 없으니, 명령이 올 때 배가 있게 하라.

이순신은 편지를 접고 선소로 내려갔다. 지난봄 어명대로 판옥선 건조를 멈추고 격군 절반을 고향으로 돌려보낸 뒤로 선소는 반쯤 비어 있었다. 거적에 덮인 용머리가 서리를 맞아 하얗게 얼어 있었다. 그는 거적 끝을 들추고 나무가 썩지 않았는지 손톱으로 눌러 보았다. 나대용이 겨우내 몰래 송진을 발라 둔 덕에 나무는 아직 단단했다.

이순신은 편지를 접고 선소로 내려갔다. 장부에 조운선 수리라고 적어 둔 그 배가 물가에 묶여 있었다. 지난 삼월 포 시험 뒤로 거북선은 한 번도 바다에 나가지 않았지만, 나대용은 겨우내 등판의 쇠못을 하나하나 갈아 끼웠다. 용머리 아가리에 서리가 끼어 있었다. 그는 손바닥으로 서리를 쓸어 냈다.

나대용“사또, 한양 소식이 좋습니까, 나쁩니까.”

이순신“날씨 같은 소식이네. 맑은데, 바람이 어느 쪽으로 불지 모르겠어.”

나대용“소인은 배만 지을 줄 압니다. 바람은 사또가 읽으십시오. 그래도 못은 바람 불기 전에 박아야 합지요. 불고 나서 박으면… 그땐 늦습니다, 사또.”

이순신“알고 있네. 그러니 못은 계속 박게. 장부에는 수리라고 적고.”

그날 오후 그는 말을 타고 고음천에 갔다. 어머니는 툇마루에 앉아 볕을 쬐고 있었다. 여든을 바라보는 노모는 아들 얼굴을 한참 들여다보더니, 수염에 서리가 앉았다며 손으로 털어 주었다.

어머니“얘야, 얼굴이 어둡구나. 나라 일이 어지러우냐.”

이순신“아닙니다, 어머니. 바람이 차서 그렇습니다.”

어머니“너는 어려서부터 속이 상하면 날씨 탓을 했지. 가거라. 늙은 어미 걱정은 말고, 네 배나 걱정해라.”

이순신“어머니, 배가 바다에 나가면 한동안 못 찾아뵐 수도 있습니다.”

어머니“그럼 나가기 전에 한 번 더 오너라. 그거면 됐다. 올 때는 그 수염 좀 다듬고 오고.”

돌아오는 길에 그는 말을 세우고 한참 바다를 보았다. 어머니가 털어 준 수염 끝이 아직 따뜻한 것 같았다. 그날 밤 그는 일기에 어머니를 뵈었다고 적고, 날씨 아닌 말을 처음으로 한 줄 더 적었다. 배는 준비되어 있어야 한다.

II · 물마루 너머의 쌀배

이월 초, 녹도만호 정운이 정탐선을 몰고 돌아왔다. 그는 배에서 뛰어내리자마자 동헌으로 달려왔다. 바닷바람에 붉어진 얼굴에 눈이 번들거렸다.

정운“사또, 부산포에서 왜선 쉰 척이 나왔습니다. 전부 쌀배입니다. 웅천과 거제 사이로 돌아 서쪽으로 갑니다. 낙동강을 거슬러 한양 쪽 왜군에게 군량을 대려는 겁니다.”

이순신“호위는 몇이나.”

정운“전선 열 척 남짓입니다. 왜놈들은 우리 수군이 아직 화친에 묶여 있는 줄 압니다. 돛을 활짝 펴고 북도 안 칩니다.”

송희립이 지도를 펼쳤다. 이순신은 손가락으로 거제 앞바다를 짚고 속으로 셈을 했다. 쌀배 쉰 척이면 한양 아래 왜군 만 명이 한 달을 먹는다. 그 쌀이 끊기면 한강 가의 왜군은 굶고, 평양 앞까지 내려온 명군 앞에서 등이 빈다.

정운“사또, 지금입니다! 명군이 북쪽에서 내려오고 행주에서 권 목사가 버티는 이때, 바다에서 쌀길만 끊으면 왜놈들은 독 안에 든 쥐가 됩니다.”

이순신“명령이 없네.”

정운“명령이요? 사또, 조정은 지금 명나라 눈치, 왜놈 눈치 보느라 바다는 쳐다보지도 않습니다. 명령 기다리다 저 쌀배가 다 지나가면, 그 쌀로 배부른 왜놈이 행주를 칩니다.”

이순신“녹도, 우리가 먼저 쏘면 화친을 깬 쪽은 조선이 되네. 그것도 조정이 아니라 전라좌수사 한 사람이. 조정이 아직 문서를 찢지 않았는데 바다에서 먼저 찢으면, 전하는 날 베어 왜에게 보여 주실 수도 있어.”

정운“그러면 베이시면 됩니다. 소인도 같이 베이겠습니다.”

송희립“녹도, 말이 지나치오. 사또께서 베이시면 이 수영은 누가 지키오.”

정운“지킬 바다가 남아 있어야 지키지요! 왜놈 쌀배가 제집처럼 드나드는 바다를 지켜서 뭐 합니까.”

이순신은 웃지 않았다. 그는 창밖을 보았다. 바람이 북서쪽에서 불고 있었다. 거제 쪽으로 배를 몰기에 좋은 바람이었고, 사흘은 갈 바람이었다.

이순신“송희립, 오늘 날씨를 적게.”

송희립“맑고 북서풍입니다, 사또.”

이순신“그래. 맑고 북서풍. 배 띄우기 좋은 날이군. …그렇게만 적어 두게. 다른 말은 말고.”

그는 일기장을 펼쳤다가 덮었다. 그날 밤 동헌의 등잔은 늦도록 꺼지지 않았다. 정운은 마당에 서서 그 불빛을 지켜보았고, 선소에서는 나대용이 아무도 시키지 않았는데 노를 하나씩 꺼내 기름을 먹이고 있었다.

이순신의 선택

III · 먼저 찢은 문서

이튿날 새벽, 전라좌수영의 배들이 소리 없이 포구를 빠져나갔다. 북은 치지 않았다. 이순신은 맨 앞 배 뱃머리에 서서 북서풍을 등으로 받았다.

거제 앞바다에 닿은 것은 사흘째 밤이었다. 왜의 쌀배들은 섬 그늘에 닻을 내리고 불을 밝힌 채 쉬고 있었다. 호위선 보초들은 화톳불 곁에서 졸았다. 조선 수군이 화친에 묶여 있다고 믿고 있었으니까.

이순신“불화살부터. 사람 말고 쌀부터 태워. 쌀이 타면 사람은 알아서 물러간다.”

불화살이 밤하늘을 갈랐다. 쌀배의 돛이 하나씩 불붙었고, 왜병들이 물로 뛰어들었다. 호위선 몇 척이 맞서 왔지만 판옥선의 총통 소리에 금세 흩어졌다. 정운은 뱃전에서 소리를 지르며 활을 쏘았다.

새벽이 밝았을 때 쌀배 쉰 척 가운데 서른여덟 척이 가라앉아 있었다. 조선 쪽 사상자는 다섯이었다. 이순신은 그 다섯의 이름을 하나씩 불러 적게 했다.

정운“사또, 이겼습니다! 서른여덟 척입니다. 이제 조정이 뭐라 하든 상관없습니다.”

이순신“상관있네. 오늘부터 우리는 화친을 먼저 깬 수군이야. 장계를 쓰게. 있는 그대로. 내가 명령 없이 나갔다고.”

그날 밤 일기에는 날씨만 적혔다. 맑음, 북서풍. 그러나 그 아래 한 줄이 더 있었다. 오늘 바다에서 문서를 먼저 찢었다. 그 값은 내가 치른다.

보름 뒤 한양에서 선전관이 내려왔다. 이순신은 갑옷을 벗고 마당에 꿇어앉아 교지를 기다렸다. 그러나 선전관이 펼친 것은 꾸짖는 교지가 아니라 류성룡이 따로 보낸 짧은 편지였다.

송희립“사또, 뭐라 적혀 있습니까. 벌입니까?”

이순신“쌀배가 끊기자 한양 아래 왜군이 행주에서 물러났다고. 그리고 전하께서 장계를 읽으시고 한참 말씀이 없으셨다고. 벌도 상도 아직 없다는 뜻이지. 날씨로 치면 흐림이네.”

다른 선택을 했다면…

판옥선을 돌산 뒤 좁은 포구로 옮기고 소나무 가지와 거적을 덮게 했다. 언덕에 선 이순신은 먼바다를 지나는 쌀배를 하나하나 세고, 정운은 주먹을 쥔 채 고개를 돌린다.

III · 지나가는 쌀배

이순신은 배를 띄우지 않았다. 대신 판옥선을 모두 돌산 뒤 좁은 포구로 옮기고, 소나무 가지와 거적으로 덮게 했다. 바다 쪽에서 보면 그저 숲이 우거진 갯가였다.

정운“사또, 숨기기만 하실 겁니까. 저 쌀배가 지나갑니다. 지금 저기!”

이순신“보고 있네. 하나도 빼지 않고 세고 있어.”

쌀배 행렬은 이틀에 걸쳐 먼바다를 지나갔다. 이순신은 언덕 위에 서서 그 배들을 하나하나 셌다. 쉰한 척이었다. 정운이 처음 본 것보다 한 척 많았다. 그는 배마다 돛 모양과 깃발, 흘수를 송희립에게 적게 했다.

송희립“사또, 이걸 적어서 어디에 쓰십니까. 손이 다 곱습니다.”

이순신“명령이 오면 쓰지. 저 배들이 언제 나와서 어느 물길로 다니고 어디서 쉬는지, 그걸 알면 한 번 나갈 때 열 번 나간 만큼 칠 수 있네.”

정운은 끝내 대답하지 않았다. 그는 주먹을 쥔 채 고개를 돌렸고, 그날 밤 혼자 술을 마셨다. 이순신은 그 술자리에 가지 않았다. 대신 정운의 방 앞에 따뜻한 국 한 그릇을 놓아두게 했다.

열흘 뒤, 한양에서 왜군이 행주 산성을 크게 쳤다는 소식이 내려왔다. 산성은 버텼지만 사람이 많이 죽었다고 했다. 이순신은 그 소식을 듣고 일기를 펼쳤다.

일기에는 날씨만 적혔다. 흐림, 동풍. 그러나 붓끝이 그 두 글자에서 오래 멈추어 있었고, 종이에 먹이 번졌다.

이튿날 아침 그는 정운을 불렀다. 정운은 눈이 붉게 부어 있었지만 똑바로 서 있었다. 이순신은 송희립이 적은 쌀배 장부를 그에게 내밀었다.

이순신“녹도, 이걸 외우게. 다음에 저 배들이 나오면 자네가 맨 앞에 서야 하네.”

정운“다음이 언제입니까, 사또.”

이순신“명령이 오는 날. 아니면 내가 명령을 기다리지 않기로 하는 날이겠지. 어느 쪽이 먼저 올지는 나도 모르네.”

다른 선택을 했다면…

북도 치지 않고 포구를 빠져나가 북서풍을 등에 받으며 사흘 밤을 달린다면, 거제 앞바다 섬 그늘에서 불을 밝힌 쌀배들이 쉬고 있다. 호위선 보초들은 화톳불 곁에서 졸고 있다.

시점 3 / 3선조조선 국왕

I · 옥대 고리

계사년 이월 열엿새 밤, 경복궁 사정전에는 촛불 두 자루만 켜져 있었다. 선조는 용상에서 내려와 마루에 앉아 있었고, 맞은편에는 좌의정 류성룡이 무릎을 꿇고 있었다. 남산 쪽에서 일본군 진영의 북소리가 바람을 타고 간간이 넘어왔다.

선조“행주는 버텼다고 하였소.”

류성룡“예, 전하. 사흘 밤낮을 버텼습니다. 권율이 산성 안의 아낙들까지 앞치마에 돌을 날라 싸웠다 합니다. 왜군은 끝내 산성을 넘지 못하고 물러났습니다.”

선조“조약을 깬 목사가 이겼구려. …과인은 조약을 지켰는데.”

류성룡은 대답하지 않았다. 선조는 옥대 고리를 손가락으로 천천히 돌렸다. 생각이 깊어지면 저도 모르게 나오는 버릇이었다. 고리가 한 바퀴 돌 때마다 작게 딸깍 소리가 났다.

선조“명군은 어디까지 왔소.”

류성룡“이여송의 선봉이 개성 북쪽에 닿았습니다. 그쪽에서는 길을 열어 달라 합니다. 우리가 왜에게 열어 준 그 길을 이번에는 저희에게 열라고요. 군량도 청합니다.”

선조“열어 주면 왜는 뭐라 하겠소.”

류성룡“조선이 두 번 배신했다 하겠지요. 명은 명대로 또 그리 말할 테고요.”

선조“두 번이라. 과인은 한 번도 마음을 정한 적이 없는데… 남들은 벌써 두 번씩이나 셈을 해 두었구먼.”

그는 혼잣말처럼 웃었다. 류성룡은 그 웃음을 알았다. 왕은 늘 마지막 말을 하지 않았다. 신하가 하게 두었다가, 일이 틀어지면 그 신하를 버렸다. 류성룡은 이십 년을 그 곁에 있었고, 아직 버려지지 않았기에 지금 이 마루에 단둘이 앉아 있었다.

선조“금강산의 중들이 칼을 들었다는 방은 거두었소.”

류성룡“거두지 않았습니다, 전하. 그 승병들이 지금 회양과 철원의 왜군 보급로를 막고 있습니다. 처음엔 삼백이었는데 이제 천이 넘는다 합니다. 교지를 거역한 역적들이 지금은 조선에서 가장 먼저 싸우는 군사입니다.”

선조“역적이 충신 노릇을 하는구려. 그럼 충신들은 그동안 다 어디 있었소.”

선조“그 중이 가토의 진영에서 돌아왔다고 하였소.”

류성룡“예, 사명대사 유정입니다. 가토가 칼을 거둔 데에는 그 승려의 말이 컸다 합니다. 그가 전하께 올리라며 한마디를 남겼습니다. 가토는 칼을 거두었으나, 태합의 마음은 아직 바다 건너에 있다. 지금이 칼집에 든 칼과 흥정할 마지막 때라고요.”

선조“중이 왕한테 때를 일러 주는구려. …과인이 그걸 바라고 그 중을 보냈던가. 기억이 안 나는구먼.”

선조는 일어나 창가로 갔다. 남산의 일본군 진영에 횃불이 점점이 박혀 있었다. 열 달 전 그는 저 군사들에게 길을 열어 주었다. 거절하면 칼이 먼저 올 것이었고, 열어 주면 대국이 등을 돌릴 것이었다. 그는 칼을 피했다. 그 칼이 지금 남산 위에서 그의 궁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선조“경, 과인은 방계로 이 자리에 올랐소. 하성군 시절에는 아무도 과인을 임금감으로 안 봤지. 그래서 과인은 늘 셈을 했소. 누가 과인을 버리지 않을지, 누가 끝까지 남을지.”

류성룡“전하, 신은 남아 있습니다.”

선조“알고 있소. 그래서 경에게 묻는 거요. 이번 셈은 어느 쪽이 맞소. 말해 보시오.”

II · 두 사자

삼월 초하루, 두 사자가 같은 날 궁에 들었다. 아침에는 명나라 제독 이여송이 보낸 참장이 붉은 갑옷 차림으로 근정전 앞뜰에 섰고, 오후에는 왜의 승려 외교관 겐소가 검은 가사를 걸치고 사정전 섬돌 아래 엎드렸다.

명의 참장“조선 국왕은 들으시오. 천조의 대군이 이미 개성에 닿았소. 조선이 지금 왜의 퇴로를 끊고 남쪽 고을마다 의병을 일으킨다면, 지난날 왜에게 길을 연 죄는 묻지 않겠소. 그러지 않는다면 천조는 조선을 왜와 한 무리로 보겠소.”

선조는 옥대 고리를 돌리며 끝까지 들었다. 참장이 물러간 뒤에도 한동안 말이 없었다. 오후에 겐소가 엎드렸을 때, 그 승려의 말은 부드러웠는데 듣고 있으면 등이 서늘했다.

겐소“전하, 태합께서는 조선이 길을 빌려준 은혜를 잊지 않으셨습니다. 지금 화친을 지키시면 바다 건너 새 천하에서 조선의 자리는 높을 것입니다. 명이 무너지면 그 땅의 한 귀퉁이를 조선에 나누어 드릴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명과 손을 잡으신다면, 바다 건너에는 아직 십만이 더 남아 있습니다.”

선조“스님, 나누어 준다는 땅은 누구 땅이오.”

겐소“이기는 쪽의 땅입니다, 전하.”

겐소가 물러간 뒤 선조는 대신들을 모두 불렀다. 사정전은 금세 둘로 갈라졌다. 한쪽은 명과 손잡고 왜를 몰아내자 했고, 다른 쪽은 화친을 지키며 이기는 쪽을 기다리자 했다. 목소리가 높아지자 선조는 손을 들어 모두를 물렸다. 류성룡 한 사람만 남았다.

선조“경도 들었지요. 하나는 죄를 덮어 주겠다 하고, 하나는 땅을 떼어 주겠다 하오. 둘 다 과인더러 고르라는데… 둘 다 과인을 안 믿어.”

류성룡“전하, 고르시면 고른 쪽은 믿을 겁니다. 안 고르시면 양쪽 다 끝까지 안 믿을 겁니다. 지난 열 달이 그랬습니다.”

선조“그 말은 경의 말이오, 과인의 말이오.”

류성룡“신의 말입니다. 틀리면 신을 베십시오.”

선조는 옥대 고리를 돌리던 손을 멈추었다. 딸깍 소리가 멎자 사정전 안이 갑자기 조용해졌다. 그는 처음으로 류성룡의 얼굴을 오래 들여다보았다. 이 신하는 이번에는 마지막 말을 대신 해 주지 않았다. 입을 다문 채, 왕이 직접 말하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선조“과인은 열 달 전에 칼을 피하려고 길을 열었소. 이번엔 또 뭘 피하려고 고르게 될지… 그게 두렵구려.”

선조의 선택

III · 왕의 격문

선조는 그날 밤 직접 붓을 들었다. 류성룡이 먹을 갈았고, 승지 둘이 촛불을 들었다. 왕은 한 번도 붓을 멈추지 않고 격문을 끝까지 썼다.

선조“팔도의 신민은 들으라. 과인이 지난날 길을 연 것은 백성의 피를 아끼려 함이었으나, 그 길로 들어온 자들은 손님이 아니었다. 이제 과인이 그 길을 닫는다. 고을마다 일어나 왜의 돌아갈 길을 끊으라. 그 죄는 과인이 지고, 그 공은 너희가 가지라.”

격문은 이튿날 새벽 말 탄 선전관들의 품에 실려 사방으로 흩어졌다. 개성의 이여송에게는 군량을 실은 수레 백 대가 떠났고, 행주의 권율에게는 처음으로 왕의 교서가 내려갔다.

류성룡“전하, 남산의 왜군이 오늘 아침 궁 쪽으로 대포를 돌렸습니다.”

선조“돌리라 하오. 과인이 열 달 동안 그 대포 밑에서 잤소. 이제 그 대포가 과인을 겨누는 걸 보니, 오히려 잠이 잘 오겠구려.”

선전관 하나가 행주에서 돌아와 권율의 답을 올렸다. 늙은 목사는 교서를 받고 한참 말이 없다가, 산성 안의 장정들을 모아 놓고 큰 소리로 읽어 주었다고 했다.

선전관“권 목사가 전하께 아뢰라 했습니다. 볍씨는 이제 뿌렸으니, 물꼬는 신들이 지키겠다고요.”

선조“볍씨라. 농사꾼 같은 목사로군. 과인은 그 볍씨를 열 달이나 쥐고만 있었는데.”

그는 웃었다. 류성룡은 왕이 그렇게 웃는 것을 처음 보았다. 입꼬리만 올리는 웃음이 아니라 어깨까지 들썩이는 웃음이었다.

그날 오후 궁의 내관들이 왕의 짐을 꾸리기 시작했다. 남산의 대포가 언제 불을 뿜을지 몰랐다. 선조는 짐을 꾸리는 내관들을 한참 지켜보다가, 옥대 하나만은 남겨 두라고 일렀다. 고리가 닳아 반들반들해진 그 옥대였다.

선조“이건 두고 가겠소. 과인이 돌아올 때까지 이 궁을 지키라 하오. 고리는 이제 그만 돌려도 될 듯하니.”

다른 선택을 했다면…

명의 참장에게 은 백 냥과 비단 스무 필만 들려 돌려보냈다면, 성루 위 왕의 곁에는 아무도 없다. 류성룡은 병을 핑계로 입궐하지 않고, 도성 밖 고을 아전들은 열쇠를 잃어버렸다고 한다.

III · 돌려보낸 붉은 깃발

선조는 명의 참장을 돌려보냈다. 예를 갖추어 은 백 냥과 비단 스무 필을 들려 보냈지만, 길은 열어 주지 않았다. 참장은 숭례문을 나서며 한 번도 뒤를 돌아보지 않았다.

선조는 성루 위에서 그 붉은 깃발이 멀어지는 것을 지켜보았다. 곁에는 아무도 없었다. 류성룡은 그날 아침 병을 핑계로 입궐하지 않았다.

겐소“전하, 현명하신 결정입니다. 태합께서 크게 기뻐하실 겁니다.”

선조“스님, 태합이 기뻐하는 것과 조선이 사는 것이 같은 일이오.”

겐소“지금은 같습니다, 전하.”

선조“지금은. …그 말이 무섭구려.”

그날부터 남산의 일본군은 궁 쪽으로 돌려 두었던 대포를 다시 남쪽으로 돌렸다. 일본군 장수들이 궁에 들어와 왕에게 예를 올렸고, 왕은 그들에게 잔을 내렸다. 그러나 도성 밖 고을에서는 그날 이후 이상한 일이 생겼다. 아전들이 창고 열쇠를 잃어버렸다고 했고, 장정들이 밤마다 산으로 사라졌다.

류성룡은 열흘 만에 입궐했다. 그는 왕 앞에 엎드려 사직 상소를 올렸다. 선조는 상소를 읽지 않고 촛불에 태웠다.

선조“경은 남는다 하지 않았소. 과인 곁에 남는 사람이 하나는 있어야 하오. 백성이 등을 돌렸는데 경마저 돌리면, 과인은 누구 얼굴을 보고 셈을 하란 말이오.”

류성룡“전하, 신이 남는 건 전하의 셈이 옳아서가 아닙니다. 틀렸을 때… 누군가는 그걸 전하 앞에서 입 밖에 내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 일을 하려고 남는 겁니다.”

선조“그럼 지금 아뢰시오. 과인의 셈이 틀렸소.”

류성룡“아직 모릅니다. 다만 성문 밖 산에 불이 켜지는 날, 그때는 틀렸다고 아뢰겠습니다.”

류성룡은 그 말을 끝으로 일어나 다시 제자리에 섰다. 선조는 옥대 고리를 돌렸다. 딸깍 소리가 그날따라 크게 울렸다.

다른 선택을 했다면…

그날 밤 왕이 직접 붓을 들었다. 류성룡이 먹을 갈고 승지 둘이 촛불을 든 가운데 격문이 쓰이고, 이튿날 새벽 말 탄 선전관들이 사방으로 흩어진다. 남산에서는 대포가 돌아간다.

제3장 · 루트 T2

한양 다시 불타다

1592년 11월 ~ 1593년 3월 · 전쟁은 성 안에서 시작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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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율은 조약을 깨고 행주 산성에 들어앉았고, 가토는 조선을 빌린 길이 아니라 얻은 땅으로 다루며 왕자를 손에 쥐었다. 한쪽은 문을 닫았고 한쪽은 문을 부쉈다. 일본군 십오만은 이미 한양과 평양 안에 들어와 있었으므로, 이번 전쟁은 바닷가가 아니라 도성 한복판에서 터진다. 원래 역사보다 한 해 늦은 난리가, 한 해 더 깊은 곳에서 시작된다.

시점 1 / 3도요토미 히데요시태합

I · 노 무대의 사자

명은 처음부터 알고 있었다. 고니시의 선봉은 압록강 가에 발이 묶인 채 겨울을 맞았고, 광주목사 권율은 군량 수레를 돌려 행주의 옛 흙성으로 들어갔다. 함경도에서 헛걸음만 하던 가토는 그 틈에 두 왕자를 모신다는 이름으로 붙잡고 성 여섯을 접수했다. 나고야의 태합만이 아직 조선이 정직하게 길만 빌려주었다고 믿고 있었다.

요양성은 유월에 하루 만에 무너졌고, 명은 조선을 배신자라 불렀다. 광주목사 권율이 볍씨 독을 지고 덕양산 옛 성터로 올라간 것도, 가토가 함흥성 문루에 경전 깃발을 올리고 두 왕자를 손님이라 부르며 가둔 것도 그 가을의 일이었다. 철령 고갯길에서는 일본군 짐바리가 굴러 내린 바위에 깔렸고, 바위를 굴린 사람은 끝내 나오지 않았다.

의주에서 붙잡힌 역관의 품에서 나온 조선 왕의 봉서는 가토의 손을 거쳐 바다를 건넜다. 태합은 복속한 속국이 뒤에서 명과 내통했다는 것을 알았고, 고니시의 거짓도 함께 알았다. 그사이 광주목사 권율은 도성 네 대문의 열쇠를 품에 넣은 채 행주 산성으로 들어갔고, 일본군은 숭례문 빗장을 부수고 도성에 들어갔다. 회령에서는 조선 아전들이 제 손으로 왕자 둘을 묶어 가토에게 넘겼다.

태합은 복속한 조선 왕더러 나고야로 건너와 절하라 했다. 왕은 오지 않았고, 대신 길을 나선 왕자는 부산포에서 사절이 아니라 볼모가 되어 배에 실렸다. 가토는 그 배를 띄운 날로 부산진과 동래와 양산의 성문 열쇠를 거두었다. 입조를 막는 상소에 이름을 올린 광주목사 권율은 장정 오백을 데리고 행주 덕양산으로 들어갔다. 바다를 건너온 왕자는 지금 나고야성 별채에서 겨울을 나고 있었다.

십일월 열흘, 나고야성 안뜰의 노 무대에 아침 서리가 하얗게 앉아 있었다.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여자 가면을 얼굴에 대고 무대 위를 미끄러지듯 걷고 있었다. 버선 바닥이 마룻바닥을 쓸 때마다 사각사각 소리가 났다.

히데요시“거기서 북을 쳐야지! 지금! 아이고, 늦었어. 다시.”

북잡이“송구합니다, 전하.”

히데요시“송구할 거 없다. 이 원숭이 발이 빨랐던 거지. 원래 원숭이는 발이 빠르다. 다시 해 봐.”

세 번째로 같은 대목을 밟고 있을 때, 다리 저편 회랑에서 젊은 무사 하나가 무릎걸음으로 다가왔다. 겉옷에 허옇게 소금이 앉아 있었다. 가토 기요마사의 가신 모리모토 기다유였다.

모리모토“전하, 가토 님의 글을 가지고 왔습니다. 조선에서 곧장 배를 탔습니다.”

히데요시“도라노스케가? 이리 줘라. 아니, 읽어. 가면 쓰고는 글자가 안 보여.”

모리모토는 떨리는 손으로 서신을 펼쳤다. 지나온 고을의 성들을 접수했고 곳간을 열었으며, 조선 왕자를 진중에 모셨다는 내용이었다. 끝에는 이 땅은 이제 빌린 길이 아니라 얻은 땅이라는 한 줄이 굵은 먹으로 적혀 있었다.

히데요시는 가면을 벗었다. 서리 낀 햇빛에 주름진 얼굴이 드러났고, 그 얼굴이 천천히 웃음으로 구겨졌다. 그는 들고 있던 부채를 접어 모리모토의 정수리를 톡톡 두드렸다. 오른손 엄지 옆에 붙은 여섯 번째 손가락이 부챗살에 걸려 까딱거렸다.

히데요시“얻은 땅이라. 하하, 그 애 글씨가 늘었구나. 예전엔 제 이름도 삐뚤게 쓰던 놈이. 너, 이거 가져라. 노 부채다. 비싼 거야.”

모리모토“전하, 이런 걸 어찌…”

히데요시“받아. 도라노스케한테 이 원숭이가 춤추다 말고 웃더라고 해라.”

그러나 웃음은 오래가지 않았다. 이시다 미쓰나리가 장부 사이에 끼운 쪽지 한 장을 들고 무대 아래에 섰다. 쪽지는 한양의 우키타 히데이에가 보낸 것이었다.

이시다 미쓰나리“전하, 한양 서쪽 행주라는 데에 조선 목사 하나가 장정 수백을 데리고 들어앉았습니다. 우리 징발대를 쫓아냈고, 근처 마을들이 곡식을 지고 그 산으로 올라간다 합니다.”

히데요시“목사 하나. 몇 살이냐.”

이시다 미쓰나리“쉰다섯이라 합니다.”

히데요시“나랑 동갑이네. 허, 늙은이가 산에 올라갔다고 뭐가 달라지냐. 됐다, 북잡이. 다시 처음부터.”

북이 다시 울렸다. 히데요시는 가면을 쓰고 무대 가운데로 나갔지만, 이번에는 발이 박자보다 한 걸음씩 늦었다. 미쓰나리는 그 늦은 발을 보며 쪽지를 장부 맨 뒤에 끼워 넣었다.

II · 그을린 소매

정월 스무날, 부산포를 떠난 배 한 척이 나고야 앞바다에 닿았다. 배에서 내린 것은 장수가 아니라 소매 한쪽이 검게 그을린 아시가루 하나였다. 우키타의 서신을 품에 넣고 열흘을 바다 위에서 보낸 사내였다.

히데요시는 서신보다 그 사내를 먼저 보겠다고 했다. 흙 묻은 짚신을 벗지도 못한 아시가루가 천수각 다다미방 문턱에 이마를 박고 엎드렸다.

히데요시“고개 들어. 이름이 뭐냐.”

아시가루“마, 마타베입니다.”

히데요시“어디서 왔냐. 말투가 오와리 같은데.”

마타베“나카무라 마을입니다, 전하.”

히데요시“나카무라! 거기 내 고향이야. 너네 아비 논이 개울 위쪽이냐, 아래쪽이냐. …아니, 됐다. 그 소매는 어쩌다 그랬냐. 한양 얘기 해 봐라. 네 눈으로 본 거.”

마타베는 한참 입을 달싹이다가 겨우 말을 꺼냈다. 정월 대보름 밤, 용산 강가에 쌓아 둔 군량 더미에 누군가 불을 놓았다고 했다. 이튿날 아침 일본군이 종루 근처 집들을 뒤지며 곳간을 열라 했고, 문을 걸어 잠근 집에 불이 들어갔다고 했다. 그 불이 바람을 타고 시전 거리로 번졌다.

마타베“사흘을 탔습니다, 전하. 끄려고 물을 길어 오면 조선 사람들이 우물에 돌을 던져 넣었습니다. 우리 쪽에서 불을 놓은 데도 있고, 저쪽에서 놓은 데도 있고… 나중엔 누가 놓았는지 아무도 몰랐습니다.”

히데요시“냄새는 어땠냐.”

마타베“예?”

히데요시“냄새 말이다. 쌀 타는 냄새랑 집 타는 냄새는 다르잖아. 어느 쪽이 더 났냐.”

마타베“…쌀이 먼저 탔고, 그다음엔 집이었습니다. 그다음은, 말씀 못 드리겠습니다.”

히데요시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는 마타베의 그을린 소매 끝을 손가락으로 집어 냄새를 맡아 보았다. 그러고는 시동을 불러 이 사내에게 밥을 먹이고 새 옷을 주라 일렀다. 마타베가 물러간 뒤, 방 안이 갑자기 추워졌다.

이시다 미쓰나리“서신이 둘 더 있습니다, 전하. 평양의 고니시 님은 왕자를 조선에 돌려주고 조선과 흥정하자 하십니다. 조선은 놓아 두고 명만 치자고요. 가토 님은 십만을 더 보내 달라 하십니다. 불 놓은 자들을 다 쓸어 내고 조선을 우리 발판으로 굳히자고요.”

히데요시“약장수는 물러서자 하고, 도라노스케는 더 밀자 한다. 늘 그렇지. 둘이 한 번이라도 같은 말을 하면 이 원숭이가 놀라서 자빠질 거다.”

이시다 미쓰나리“전하의 뜻은 어느 쪽이십니까.”

히데요시는 창을 열었다. 바다 쪽에서 찬바람이 들이쳤다. 그는 한참 그 바람을 맞고 서 있다가, 아까 마타베의 소매를 집었던 손가락을 코끝에 대 보았다. 아직 탄내가 남아 있었다.

히데요시“미쓰나리, 나카무라에서 저 애 아비는 아마 우리 아비 옆 논을 부쳤을 거다. 그런 애가 남의 나라 우물가에서 돌을 맞고 왔어. …어느 쪽으로 가든, 저런 애들이 또 갈 거다. 그걸 알고 고르자.”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선택

III · 모래 위의 팔도

이튿날 아침, 히데요시는 큰 마당에 모래를 펴게 했다. 서기들이 밧줄과 말뚝으로 조선 지도를 그렸다. 압록강은 마당 북쪽 끝 담장 밑에, 부산포는 남쪽 우물가에 놓였다.

히데요시“경상도는 모리, 전라도는 고바야카와. 충청은… 누구 줄까. 손 들어 봐라. 아무도 안 드냐?”

장수들은 웃지 않았다. 히데요시는 맨발로 모래 위를 걸으며 고을마다 이름 적힌 나무패를 꽂았다. 함경도에는 가토의 패를, 평안도에는 고니시의 패를 꽂았다. 고니시의 패는 조금 비뚤게 꽂혔는데 그는 고쳐 꽂지 않았다.

이시다 미쓰나리“전하, 패를 꽂는 건 쉽습니다만 그 땅에서 쌀이 나와야 합니다. 지금 조선 백성은 곡식을 지고 산으로 올라갑니다.”

히데요시“그럼 산에서 내려오게 해. 우키타한테 일러라. 불 놓은 동네는 비우고, 순순히 곳간 연 동네는 세금을 반으로 깎아 줘라. 때리는 손 하나, 쓰다듬는 손 하나. 원숭이는 손이 많다.”

그는 한양 자리에 이르러 걸음을 멈추었다. 그 자리에는 아무 패도 꽂지 않았다. 대신 엄지발가락으로 모래에 작은 동그라미를 그렸다.

히데요시“여긴 조선 왕 자리다. 왕이 나고야로 와서 이 원숭이 앞에 무릎을 꿇으면, 그때 여기 이름을 써 준다. 안 오면 여기도 패를 꽂는다. 그 말을 그대로 한양에 보내.”

명령서는 그날 밤 배에 실렸다. 십만을 다시 모으라는 글이 규슈와 시코쿠로 나갔고, 항구마다 쌀을 실을 배가 모자랐다. 미쓰나리는 장부를 펼쳐 놓고 붓끝을 깨물었다.

해 질 녘에 바람이 불어 모래 지도가 조금씩 흐트러졌다. 시동들이 다시 고르려 하자 히데요시가 말렸다. 그는 툇마루에 앉아 무너지는 압록강 줄기를 한참 내려다보았다.

히데요시“놔둬라. 저건 다시 그리면 된다. 모래는 말을 잘 듣잖아.”

다른 선택을 했다면…

그날 밤 붓을 든 손이 쓰다 만 획 위로 먹 한 방울을 떨어뜨렸다. 새벽 부두에서는 명령서를 받아 든 사내가 두 손을 무릎에 올린 채 한참 고개를 들지 못했다.

III · 돌려보내는 글

히데요시는 그날 밤 붓을 들었다. 가토에게 보내는 글이었다. 볼모로 잡은 조선 왕자를 조선 조정에 돌려보내고, 접수한 성들의 열쇠도 조선 관아에 되돌려 주라고 적었다. 군사는 평양으로 모아 북쪽으로 몰라고 했다.

이시다 미쓰나리“가토 님이 받아들이실까요.”

히데요시“받아들여야지. 내가 키운 애다. …그래도 서운하긴 하겠지. 그 애한테는 처음 쥔 땅이니까.”

그는 글 끝에 한 줄을 더 쓰려다가 붓을 멈추었다. 쓰다 만 획 위로 먹이 한 방울 떨어져 번졌다. 그는 그 종이를 구기지 않고 그대로 접었다.

새벽 부두에서 모리모토 기다유는 명령서를 선뜻 받지 못했다. 그는 두 손을 무릎에 올린 채 고개만 숙이고 있었다.

모리모토“전하, 주군께서는 이 땅을 얻으려고 겨울 내내 아이들을 굶기지 않으셨습니다. 이 글을 받으시면…”

히데요시“안다. 그래서 너한테 주는 거다. 도라노스케 앞에서 이 글을 읽기 전에, 이 원숭이가 부두까지 나와서 손수 줬다고 먼저 말해라. 그거 먼저.”

모리모토“…예.”

히데요시“그리고 노 부채 받은 거, 그것도 말하고. 그 애는 그런 걸 좋아해.”

배가 떠난 뒤에도 히데요시는 한동안 부두에 서 있었다. 시동이 털옷 깃을 여며 주려 하자 그는 귀찮다는 듯 손을 저었다. 바다 저편은 아직 안개였다.

이시다 미쓰나리“전하, 조선 조정에도 글을 보낼까요. 왕자를 돌려준다고.”

히데요시“보내. 대신 이 원숭이가 물러섰다고는 쓰지 마라. 명나라를 치는 데 바빠서 조선 같은 작은 일은 잊어 주기로 했다고 써. 큰 놈은 작은 걸 잊어 주는 거야.”

그는 그렇게 말하고 돌아섰다. 돌아서는 걸음이 어젯밤 노 무대 위에서처럼 박자보다 한 걸음씩 늦었다.

다른 선택을 했다면…

이튿날 아침 큰 마당에 모래가 펴지고, 압록강은 담장 밑에 부산포는 우물가에 놓였다. 맨발로 모래를 밟으며 고을마다 나무패가 꽂히는데, 한 자리만은 끝내 비어 있다.

시점 2 / 3이순신전라좌수사

I · 북쪽에서 온 파발

정월 스무사흘, 전라좌수영 동헌 마당에 파발마 한 필이 거품을 물고 들어왔다. 말에서 내린 역졸은 다리가 풀려 그대로 주저앉았다. 송희립이 그의 품에서 전라감사의 글을 꺼내 들고 마루로 올라왔다.

송희립“사또, 감영에서 왔습니다. 도성 소식이랍니다. 손이 얼어서 제가 읽겠습니다.”

이순신“읽게. 저 사람은 부엌으로 데려가고. 발부터 녹여 주라 이르게, 동상 걸리겠어.”

글은 짧았다. 정월 대보름 밤에 도성 안에서 불이 났고, 왜군과 도성 백성이 서로 불을 놓으며 사흘을 싸웠다고 했다. 운종가 시전이 거의 다 탔다고 했다. 전하께서는 아직 경복궁에 계시나 궁문 밖은 왜군이 지키고 있어, 교지가 도성 밖으로 나오지 못한다고 했다.

송희립“끝에 한 줄 더 있습니다. 조정 명이 닿기 어려우니, 각 진은 제 땅을 지키라.”

이순신“제 땅이라. 바다는 누구 땅인지 안 적혀 있나.”

송희립“…안 적혀 있습니다, 사또.”

이순신은 대답 대신 일어나 창을 열었다. 하늘은 낮게 깔렸고 바람이 동쪽으로 돌고 있었다. 그는 한참 그 구름을 보다가, 일기장을 펼쳐 흐림, 동풍이라고만 적었다. 붓을 내려놓은 뒤에야 손끝이 시리다는 걸 알았다.

이순신“고음천에 사람을 보내게. 어머니를 흥국사 위 암자로 모시라고. 짐은 이불하고 약상자만. 어머니가 왜 옮기냐 물으시면, 바닷바람이 차서 그런다고 하고.”

송희립“사또가 직접 가 뵙지 않으시고요?”

이순신“내가 가면 어머니가 내 얼굴을 보시네. 그러면 다 아셔.”

그날 오후 그는 선소로 내려갔다. 지난봄 어명대로 판옥선 건조를 멈추고 격군 절반을 돌려보낸 뒤로 선소에는 거적 덮인 용머리 하나와 판옥선 열 척 남짓이 전부였다. 나대용이 거적을 걷자 송진 냄새가 훅 올라왔다. 겨우내 혼자 발라 둔 송진이었다.

나대용“사또, 이 머리는 몸통 없이 반년을 누워 있었습니다. 지금 몸통을 붙이면 두 달은 걸립니다. 그 전에 바다가 시끄러워질 것 같은데요.”

이순신“그럼 판옥선부터 손보게. 돌려보낸 격군들 이름은 장부에 아직 있지? 사람을 풀어서 다시 불러 모으게.”

그날 오후 그는 선소로 내려갔다. 장부에 조운선 수리라고 적힌 배가 물가에서 조용히 출렁이고 있었다. 지난 삼월 포 시험 뒤로 거북선은 한 번도 바다에 나가지 않았다. 나대용은 용머리 아가리 속에 손을 넣어 유황 연기 내는 구멍을 쑤시고 있었다.

나대용“사또, 이 연기 구멍이 자꾸 막힙니다. 그래도 걱정 마십시오. 배는 언제든 나갑니다. 사람만 타면 됩니다.”

이순신“사람은 타네. 이제 수리라고 적는 것도 그만두게. 거짓말을 적어 둘 조정이 지금은 없으니.”

해가 질 무렵 그는 선소 끝 바위에 앉아 북쪽 하늘을 보았다. 바위가 차서 엉덩이가 금세 얼었지만 일어나지 않았다. 도성은 거기서 천 리 길이었다. 연기가 보일 리 없었는데도 그는 구름 끝이 거뭇한 데를 한참 쳐다보았다.

II · 율포만호의 배

이틀 뒤 새벽, 돌산 앞바다로 낡은 협선 한 척이 비틀비틀 들어왔다. 노꾼 절반이 손에 피를 흘리고 있었다. 뱃머리에서 갑옷 차림의 젊은 장수가 뛰어내렸는데, 발이 물에 빠지는 것도 모르는 얼굴이었다.

이영남“경상우수영 율포만호 이영남입니다! 원 수사께서 보내셨습니다. 좌수사 영감을 뵈어야 합니다.”

이순신“나네. 숨부터 쉬게. 그다음에 말하고.”

이영남“숨 쉴 틈이 없습니다, 영감. 왜 수군이 웅천과 김해에서 나와 견내량 쪽으로 모입니다. 와키자카라는 장수가 이끄는데 큰 배만 일흔이 넘습니다. 도성이 불탄 뒤로 저놈들이 바닷길부터 단단히 잡겠다고 서쪽으로 쓸고 옵니다. 원 수사께서는 거제 뒤로 밀렸고, 배가 스무 척도 안 남았습니다.”

정운이 동헌 기둥 뒤에서 불쑥 나왔다. 밤새 정탐선을 몰고 들어와 아직 옷이 젖어 있었다.

정운“사또, 저도 봤습니다. 견내량 입구에 돛이 빽빽합니다. 놈들은 원 수사를 치고 나면 바로 이쪽으로 옵니다. 거제 다음이 남해고, 남해 다음이 여기입니다.”

이순신“녹도, 지도.”

송희립이 지도를 펼쳤다. 이순신은 견내량의 좁은 물길을 손톱 끝으로 따라갔다. 물길이 좁고 암초가 많았다. 판옥선은 그 안에서 몸을 돌리기 어렵다. 놈들을 넓은 바다로 끌어내야 했다. 물때는 언제 바뀌는지, 바람은 며칠 갈지, 그는 손가락을 하나씩 접었다.

이영남“영감, 원 수사는 영감과 사이가 좋지 않으신 거 압니다. 그래도 지금은…”

이순신“그 얘기 하러 온 거 아니지 않나. 배 얘기를 하게.”

이영남“…예. 원 수사께서는 이 말을 꼭 전하라 하셨습니다. 경상 바다가 무너지면 전라 바다도 무너진다고. 그리고 이건 제 말입니다. 우리 수영 아이들이 지금 거제 섬 뒤에서 밥도 못 먹고 숨어 있습니다.”

이순신은 한참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는 감영의 글을 다시 꺼내 끝줄을 읽었다. 각 진은 제 땅을 지키라. 그 줄 위에 그의 엄지손가락이 오래 머물렀다.

이순신“송희립, 경상 바다로 나가라는 명령은 받은 적 있나.”

송희립“없습니다, 사또. 나가지 말라는 명령도 없습니다만.”

정운“사또, 명령 내릴 조정이 지금 불 속에 갇혀 있습니다. 누가 내려 줍니까.”

이순신“그건 아는데. …녹도, 자넨 그 입 좀 다물고 있게. 내가 지금 바람을 재고 있어.”

나대용“사또, 배는 어느 쪽이든 내일 아침이면 됩니다. 노에 기름도 먹였고요. 소인은 그것만 아뢰겠습니다.”

창밖에서 대숲이 서쪽으로 쏠리고 있었다. 이순신은 일어나서 마당까지 나갔다가, 다시 들어와 지도 앞에 앉았다. 이영남은 그동안 무릎을 꿇은 채 한 번도 고개를 들지 않았다.

이순신의 선택

III · 넓은 바다

사흘째 아침, 판옥선 다섯 척이 견내량 입구까지 들어갔다가 일부러 뒤로 빠졌다. 왜선들이 그 뒤를 물고 좁은 물길을 빠져나왔다. 기다리고 있던 나머지 배들이 양쪽에서 날개를 펴듯 둘러쌌다.

이순신“아직. 조금 더. …지금 쏘게.”

총통이 한꺼번에 울렸다. 바다 위로 하얀 연기가 길게 깔렸고, 그 연기 사이에서 왜선의 돛대가 하나씩 기울었다. 정운은 뱃전에 한 발을 올리고 소리를 지르며 활을 쏘았다. 원균의 배들이 거제 쪽에서 뒤늦게 달려와 퇴로를 막았다.

해가 기울 무렵 싸움은 끝났다. 왜선 마흔 척 남짓이 가라앉거나 불탔고, 나머지는 와키자카를 태운 채 김해 쪽으로 달아났다. 조선 쪽에서도 배 한 척이 부서졌고 열한 사람이 돌아오지 못했다.

이순신“열한 사람 이름 다 적었나. 어디 사람인지도.”

송희립“다 적었습니다, 사또. 순천 사람이 넷입니다.”

이순신“순천이면 그 넷 중에 대장간 하던 친구가 있지 않았나. 노 손잡이를 고쳐 주던.”

송희립“…예. 김 서방입니다.”

원균은 저녁에 이순신의 배로 건너왔다. 그는 고맙다는 말 대신 술병을 내밀었다. 이순신은 받기만 하고 마시지 않았다. 원균의 수염에 그을음이 묻어 있었는데, 그걸 일러 줄까 하다가 그만두었다.

원균“좌수사, 이번엔 빚졌소. 그런데 조정이 이걸 뭐라 하겠소. 명 없이 두 수영이 한데 붙었으니.”

이순신“조정이 뭐라 할 수 있게 되면, 그때 듣지요. 지금은 다친 사람부터 나누십시다. 영감 배에 의원이 없다 들었소.”

그날 밤 일기에는 맑음, 북서풍이라고 적혔다. 그 아래에 열한 사람의 이름이 한 줄씩 적혔다. 그는 이름을 다 적고 나서 붓을 씻지 않은 채 오래 앉아 있었다. 김해로 달아난 배들이 다시 올 것을, 그 다음엔 더 많이 올 것을 그는 알고 있었다.

다른 선택을 했다면…

판옥선은 모두 여수 안쪽 포구에 모였고, 밤새 숫돌 소리만 동헌 마당을 울렸다. 닷새 뒤 저녁, 부서진 배들이 하나둘 포구로 들어오기 시작했다.

III · 돌아온 협선

이순신은 배를 움직이지 않았다. 판옥선을 모두 여수 안쪽 포구에 모으고, 돌산과 남해 사이 물목에만 정탐선을 띄웠다. 이영남은 그 명을 듣고도 한참 무릎을 꿇고 있다가 말없이 제 협선으로 돌아갔다.

정운은 그날 밤 동헌 앞마당에 앉아 칼을 갈았다. 숫돌 소리가 새벽까지 이어졌다. 이순신은 그 소리를 들으며 잠들지 않았지만, 마당에 나가지도 않았다.

닷새 뒤 저녁, 부서진 배들이 포구로 들어왔다. 경상우수영의 협선 셋과 고깃배 여남은 척이었다. 다친 수군과 거제 섬사람들이 뒤섞여 있었다. 맨 앞 협선 뱃머리에 이영남이 팔에 천을 감고 서 있었다.

이영남“원 수사께서는 살아 계십니다. 배는 네 척 남았습니다. 나머진… 견내량 밖에서 다 탔습니다.”

이순신“내리게. 다친 사람부터. 송희립, 객사 방을 다 비우고 부엌에 불 넣으라 하게.”

그는 부두 끝에 서서 배에서 내리는 사람을 하나씩 맞았다. 아이를 업은 아낙이 있었고, 한쪽 신만 신은 노인이 있었다. 이순신은 그들 얼굴을 하나도 빼지 않고 보았다.

이영남은 마지막으로 내렸다. 그는 이순신 앞을 지나치다가 걸음을 멈추었다.

이영남“영감 배는 다 온전하군요.”

이순신“그래. 다 온전하네.”

이영남“…다행입니다. 정말로요. 다음엔 놈들이 여기로 올 테니. 그때는 이 배들이 다 필요하시겠지요.”

그는 고개를 숙이고 객사 쪽으로 걸어갔다. 이순신은 그가 한 말이 비꼬는 말인지 아닌지 끝내 가늠하지 못했다. 정운이 뒤에서 다가와 아무 말 없이 섰다.

그날 밤 일기에는 흐림, 바람 없음이라고만 적혔다. 그는 그 아래 줄을 비워 두었다. 이튿날 아침 그 빈 줄에 무엇을 적을지 몰라, 그는 먼저 판옥선의 노부터 세어 보게 했다.

다른 선택을 했다면…

사흘째 아침, 판옥선 다섯 척이 견내량 입구까지 들어갔다가 일부러 뒤로 빠졌다. 좁은 물길 너머로 왜선들이 줄줄이 따라 나오는데, 저녁에는 원균이 술병을 들고 건너왔다.

시점 3 / 3선조조선 국왕

I · 경회루의 붉은 하늘

정월 열엿새 새벽, 경회루 이층 마루는 발이 시릴 만큼 차가웠다. 선조는 신을 신은 채 난간 앞에 서 있었다. 동쪽 하늘이 해 뜰 때도 아닌데 붉었다. 운종가 쪽이었다.

선조“저기가 시전이오, 종루요.”

이항복“시전입니다, 전하. 지금은 종루 뒤까지 번졌다 합니다. 바람이 서풍이라 동대문 쪽으로 갑니다.”

선조“도승지는 어찌 그리 잘 아오. 궁 밖엘 나가 보았소.”

이항복“나가 보지는 못했습니다. 궁문을 지키는 왜병들이 아무도 내보내지 않습니다. 담 너머로 들리는 소리를 주워 모았을 뿐입니다.”

연기 냄새가 경회루 연못을 건너왔다. 젖은 나무가 타는 냄새에 뭔가 기름진 냄새가 섞여 있었다. 선조는 소매로 코를 막으려다 그만두었다. 대신 옥대 고리에 손을 얹었다. 고리가 손톱 밑에서 딸깍 하고 한 칸 돌아갔다.

좌의정 류성룡이 계단을 올라왔다. 숨이 차서 한 계단마다 쉬었다. 그 뒤에 일본군 통사 하나가 따라 올라오고 있었다.

류성룡“전하, 우키타의 통사가 왔습니다. 글을 하나 가져왔습니다.”

통사“총대장께서 전하께 청하십니다. 도성 백성들이 곳간을 열고 불을 끄고 왜군의 말을 따르도록, 전하의 이름으로 방을 붙여 달라고 하십니다. 어보를 찍어서요.”

선조“불은 누가 놓았소.”

통사“…그건 제가 아뢸 일이 아닙니다.”

선조“그대가 아뢸 일이 아니면 누가 아뢸 일이오. 통사가 통하지 않으면 무엇을 하오.”

통사는 고개를 숙인 채 글을 내밀었다. 선조는 받지 않았다. 류성룡이 대신 받아 두 손으로 들고 섰다. 종이 끝이 바람에 파르르 떨었다.

선조“두고 가라 하오. 읽어는 보겠다고.”

통사가 내려간 뒤에도 선조는 한동안 하늘을 보았다. 동쪽의 붉은빛이 조금씩 북쪽으로 번지고 있었다. 저 아래 어딘가에 지난봄 그가 길을 열어 준 그 군사들이 있었다. 그리고 그 군사들에게 돌을 던지는 그의 백성들도 있었다.

이항복“전하, 하나 더 있습니다. 금강산의 중들 소식입니다. 승병들이 철령 아래에서 왜군 짐바리를 끊었다 합니다. 그 일 때문에 가토가 볼모로 잡은 왕자마마 곁에 보초를 더 세웠다고요.”

선조“중들이 칼을 들어서 내 아들 방문 앞에 창이 하나 더 늘었구려. …그 중들한테 고맙다 해야 하오, 그만두라 해야 하오.”

이항복“둘 다 전하의 입에서 나와야 들을 겁니다.”

이항복“전하, 하나 더 있습니다. 가토의 진영에 들어갔던 사명당이 사람을 보냈습니다. 가토는 볼모로 잡은 왕자마마를 값으로 본다 합니다. 사명당 말로는, 그 값을 정할 사람은 가토도 태합도 아니고 전하라 했답니다.”

선조“값이라. 중이 장사꾼 말을 하는구려. 과인더러 아들 값을 매기란 말이오.”

이항복“…사명당은 그렇게 말하지 않았습니다. 다만 전하께서 어디에 서 계시느냐에 따라 값이 달라진다고만 했습니다.”

선조“도승지, 춥소. 내려갑시다.”

그러나 그는 내려가지 않았다. 옥대 고리를 한 칸 더 돌리고, 다시 한 칸 더 돌렸다.

II · 마포의 배

정월 그믐, 사정전 뒤 작은 방에 촛불 하나가 켜져 있었다. 이항복은 바닥에 엎드린 채 소매 안에서 접은 종이 한 장을 꺼냈다. 장인 권율이 행주에서 보낸 글이었다. 글씨가 크고 삐뚤었다.

이항복“장인이 이렇게 적었습니다. 마포 나루에 고깃배 한 척을 대어 두었다. 사공은 행주 사람이고, 물때는 그믐 다음 날 새벽이다. 전하께서 오시면 산성 문을 열고, 안 오시면 계속 닫아 두겠다. 그게 다입니다.”

선조“그게 다요? 오라는 말도 오지 말라는 말도 없구려.”

이항복“장인은 원래 말이 짧습니다. 송구합니다.”

선조는 종이를 촛불 가까이 들어 다시 읽었다. 권율이라는 이름은 지난가을부터 조정에서 백 번도 넘게 오르내린 이름이었다. 역적이라 하는 자도 있었고, 충신이라 하는 자도 있었다. 선조는 그 어느 쪽에도 손을 들지 않았다.

류성룡“전하, 오늘 낮에 겐소도 다녀갔습니다. 우키타가 전하를 남산 본진으로 모시겠다 합니다. 궁은 불길이 가까워 위험하니 일본군 진중이 더 안전하다고요. 거기서 태합의 새 천하에 조선의 자리를 함께 의논하자 했습니다.”

선조“모신다는 말이 요즘 흔하오. 가토도 과인의 아들을 모셔 갔지.”

류성룡은 대답하지 않았다. 선조는 일어나 방 안을 한 바퀴 돌았다. 좁은 방이라 일곱 걸음이면 제자리였다. 그는 두 바퀴째를 돌다가 멈추었다.

선조“경, 행주로 가면 어찌 되오. 말해 보시오.”

류성룡“궁과 도성은 왜군 손에 남습니다. 대신 전하의 이름이 다시 조선 사람들 손에 들어갑니다. 고을마다 그 이름을 보고 일어날 겁니다. 명이 손을 내밀지, 끝까지 홀로 싸울지는 그다음 일입니다.”

선조“남산으로 가면.”

류성룡“전하의 목숨과 왕좌는 남습니다. 대신 행주의 권율은 역적이 되고, 오늘 밤 돌을 던진 백성들도 역적이 됩니다. 전하의 이름으로요.”

선조“경은 늘 이렇게 반반으로 말하오. 하나만 말해 주면 안 되오.”

류성룡“하나만 말씀드리면, 전하께서는 그 하나를 고르신 다음 신을 원망하실 겁니다. 신은 그게 무섭지 않습니다만, 이번만은 전하께서 직접 고르셔야 합니다.”

선조는 웃었다. 소리 없는 웃음이었다. 그는 옥대 고리를 돌리려다가 손을 멈추었다. 고리는 이미 닳아서 손가락이 저절로 미끄러졌다.

선조“하성군 시절에는 아무도 과인한테 고르라 하지 않았소. 고르라 하니 좋구려. 좋은데… 손이 이렇게 차오.”

이항복은 그 말을 듣고 고개를 더 깊이 숙였다. 촛불이 한 번 크게 흔들렸다. 담장 너머에서 아직 꺼지지 않은 불 냄새가 다시 밀려왔다.

선조의 선택

III · 뒤에서 탄 궁

선조는 내관 옷을 입고 영추문 옆 개구멍으로 궁을 빠져나갔다. 이항복이 앞장섰고 류성룡은 남았다. 누군가는 궁에 남아 왕이 아직 안에 있는 척해야 했다. 개구멍을 빠져나올 때 선조의 상투가 담장 돌에 걸려 이항복이 손으로 풀어 주었다.

마포 나루의 사공은 말이 없었다. 선조가 배에 오르자 그는 고개만 한 번 숙이고 노를 저었다. 안개가 짙어 앞이 보이지 않았다.

선조“사공, 행주까지 얼마나 걸리오.”

사공“물때 맞으면 한나절입니다. 안 맞으면… 그냥 가는 거지요.”

배가 서강을 지날 무렵, 뒤쪽 하늘이 붉어지기 시작했다. 이항복이 먼저 보았고 선조가 뒤따라 돌아보았다. 경복궁 쪽이었다. 왕이 빠져나간 걸 안 누군가가 불을 놓았는지, 시전의 불이 끝내 담을 넘었는지는 알 수 없었다.

이항복“전하, 보지 마십시오.”

선조“보겠소. 과인 집이오.”

그는 고물에 앉아 궁이 타는 것을 끝까지 보았다. 근정전 지붕이 무너지는지 불기둥이 한 번 크게 솟았다. 선조는 옥대에 손을 댔다가 거기 옥대가 없다는 걸 알았다. 내관 옷에는 옥대가 없었다.

해가 높이 떴을 때 배는 행주 나루에 닿았다. 덕양산 비탈에 흙성이 낮게 엎드려 있었고, 성문 앞에 늙은 사내 하나가 갑옷도 없이 서 있었다. 권율이었다.

권율“전하, 오셨습니까. …길이 험하셨지요. 안에 들어가시면 보리죽밖에 없습니다.”

선조“보리죽이면 되었소. 목사는 과인이 올 줄 알았소.”

권율“몰랐습니다. 반반이었지요. 그래서 죽은 두 그릇만 끓여 두었습니다. 안 오시면 제가 먹을 참이었습니다.”

선조는 웃으려다가 그만 기침을 했다. 연기를 너무 오래 마신 탓이었다. 그는 기침이 멎자 권율의 손을 잡았다. 흙이 묻은 손이었다.

다른 선택을 했다면…

낮에 가마를 타고 남산에 오르니 길 양쪽으로 창이 서 있었다. 총대장은 스물하나, 제 방석보다 두꺼운 방석을 내주었다. 해가 지자 한강 너머 산마루에 불빛이 하나씩 켜졌다.

III · 남산의 방석

선조는 낮에 가마를 타고 남산에 올랐다. 일본군이 길 양쪽에 늘어서서 창을 세웠다. 가마 창으로 보이는 도성은 절반쯤 검었다.

우키타 히데이에는 생각보다 어렸다. 스물을 갓 넘긴 얼굴이었다. 그는 일어나서 선조를 맞았고, 자기 방석보다 두꺼운 방석을 내주었다.

우키타“전하, 불편하신 데는 없으십니까. 여기는 바람이 좀 셉니다. 화로를 더 들이라 하겠습니다.”

선조“괜찮소. 총대장은 몇 살이오.”

우키타“스물하나입니다.”

선조“과인 맏아들과 동갑이구려. 그 애는 지금 남의 손에 있소.”

통사가 그 말을 옮기자 우키타는 잠깐 얼굴이 붉어졌다. 그러고는 겐소가 써 온 글을 내밀었다. 도성 백성은 곳간을 열고 일본군을 따르라는 방이었다. 끝에 행주에 든 자들은 조약을 깬 무리이니 따르는 자는 같은 죄로 다스린다는 줄이 있었다.

선조는 그 줄을 한참 보았다. 류성룡은 그의 뒤에 앉아 있었고 이항복은 오지 않았다. 아침에 행주로 가겠다며 사직서를 남기고 사라졌다.

선조“어보를 주시오.”

내관이 어보를 내밀었다. 선조는 인주를 찍고 종이 위에 눌렀다. 손에 힘을 너무 주어서, 어보를 떼어 낼 때 종이가 한쪽으로 살짝 찢어졌다.

우키타“태합께서 크게 기뻐하실 겁니다. 전하의 자리는 새 천하에서 결코 낮지 않을 겁니다.”

선조“높고 낮은 건 나중에 봅시다. 총대장, 그 방은 내일 아침에 붙이시오. 오늘 밤은… 오늘 밤만은 그냥 두시오.”

해가 지자 막사 밖으로 나간 선조는 서쪽을 보았다. 한강 너머 행주 쪽 산마루에 불빛이 하나 켜져 있었다. 조금 있다가 그 옆에 또 하나가 켜졌다.

선조“경, 저게 무슨 불이오.”

류성룡“밥 짓는 불입니다, 전하. 산성에도 저녁은 먹어야 하니까요.”

선조는 옥대 고리를 돌렸다. 딸깍. 그는 불이 세 개, 네 개로 늘어나는 것을 손가락으로 세다가, 다섯에서 그만두었다.

다른 선택을 했다면…

내관 옷을 입은 왕의 상투가 개구멍 담장 돌에 걸렸다. 안개 낀 마포 나루에서 배가 떠나자 뒤쪽 하늘이 붉어지기 시작했고, 닿은 곳 성문 앞에는 갑옷도 입지 않은 늙은 사내가 서 있었다.

제3장 · 루트 T3

두 황제의 길

1592년 11월 ~ 1593년 3월 · 조선이 발판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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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율은 칼을 뽑지 않고 곡식을 내주었고, 가토는 조선의 성문 열쇠를 거두고 왕자를 볼모로 앉혔다. 아무도 막아서지 않자 조선 땅은 어느새 일본군의 부엌이 되고 마구간이 되었다. 바다 건너 나고야의 노인은 그 소식을 들으며 부채에 그린 지도를 더 넓게 펼친다. 1593년 봄, 조선 왕은 남이 그린 지도 위에서 제 자리를 찾아야 한다.

시점 1 / 3도요토미 히데요시태합

I · 부채 위의 세 나라

명은 처음부터 알고 있었다. 고니시의 선봉은 압록강가에서 겨울을 맞았고, 광주목사 권율은 중화 마을에서 수레 열 대의 쌀을 일본군에게 내주며 피를 막았다. 두만강에서 헛걸음한 가토는 함흥성과 두 왕자를 손에 쥐고, 조선이 명과 내통했다고 써 올렸다. 태합은 그 편지를 읽은 밤부터 조선을 다른 눈으로 보았다.

요양성은 유월에 하루 만에 무너졌고, 명은 조선을 왜의 무리라 불렀다. 광주목사 권율은 마을을 달래 곡식을 제 손으로 수레에 싣게 했고, 일본군 장부에는 그의 이름 옆에 순종이라는 두 글자가 붙었다. 가토는 함흥성에 법화경 깃발을 올리고 두 왕자를 손님이라 부르며 장막 안에 앉혔다. 요양을 얻은 태합에게 조선은 따로 셈할 필요도 없는 땅이 되어 갔다.

조선 왕의 봉서는 가토의 밀랍 봉인을 달고 바다를 건너 태합의 손에 떨어졌다. 복속했다던 속국이 뒤에서 명과 내통한 증거였다. 그사이 광주목사 권율은 도성 네 대문의 열쇠를 넘기며 장정만은 지켰고, 가토는 고을 열쇠를 거두고 회령에서 묶여 온 왕자 둘을 볼모로 앉혔다. 태합의 노여움은 고니시보다 조선 왕 쪽으로 더 많이 흘러갔다.

조선 왕은 바다를 건너오지 않았고, 대신 왕자 하나가 공물 행렬에 실려 남쪽으로 내려왔다. 광주목사 권율은 그 행렬의 짐꾼 쉰 명을 하나도 잃지 않고 부산까지 데려갔다. 부산포에서 가토는 왕자를 볼모로 배에 태워 나고야로 보냈고, 같은 날 부산진과 동래의 성문 열쇠를 거두었다. 태합은 기다리던 왕 대신 그 아들을 성안 별채에 들였다.

섣달 스무날 밤, 나고야성 본성 안쪽 방에는 숯 화로가 둘 놓여 있었다.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화로 하나를 무릎 앞까지 끌어다 놓고, 그 위에 쥘부채를 펴 들고 있었다. 부채 종이에는 일본과 조선과 명나라가 한 장에 그려져 있었는데, 일본은 손바닥만 했고 명은 부채 살 여섯 칸을 다 차지했다.

히데요시“나가토시, 봐라. 부채 하나에 세 나라가 다 들어간다. 한 번 부치면 세 나라가 같이 흔들려. 재밌지? 응?”

우필 야마나카 나가토시는 벼루 앞에서 웃는 시늉을 했다. 관백 히데쓰구에게 갈 편지는 벌써 열한 번째 조목이었다.

히데요시“어디까지 했지. 그래, 천황. 천황 폐하는 내후년쯤 북경으로 옮겨 모신다. 북경 둘레 열 나라를 폐하 몫으로 바치고. 적었냐?”

히데요시“관백도 북경으로 간다. 일본 관백 자리는… 아니, 거긴 비워 둬. 나중에 정하자.”

야마나카는 붓을 들었다가 내려놓았다. 비워 두라는 자리가 오늘 밤에만 벌써 셋이었다.

히데요시“그리고 이 원숭이는 영파로 간다.”

야마나카“영파 말씀입니까? 북경이 아니고요.”

히데요시“북경은 춥대. 영파는 바닷가야. 남만 배가 다 거기로 들어온다더라. 앉아서 배를 세다가, 심심하면 천축을 치러 가는 거지. 적어. 영파에 태합 거처.”

그는 부채를 접었다 폈다 하며 낄낄거렸다. 오른손 엄지 옆에 붙은 여섯 번째 손가락이 부채 살 사이에 끼었다가 빠졌다. 야마나카는 영파라는 글자에서 획을 한 번 틀렸다.

야마나카“전하, 조선은 어찌 적을까요.”

히데요시“조선?”

웃음이 뚝 끊겼다. 히데요시는 부채를 화로 쪽으로 기울여 조선 반도를 들여다보았다. 손가락 한 마디만 한 땅이었다.

히데요시“히데카쓰한테 주든지, 우키타한테 주든지. 그 왕은… 글쎄. 적을 데가 있나? 가토 편지 다시 가져와 봐.”

야마나카가 상자에서 꺼낸 가토의 서신은 기름에 절어 있었다. 성문과 곳간 열쇠를 거두고 조선 왕자를 진중에 모셨다는 내용 끝에, 나무묘법연화경 일곱 글자가 종이를 뚫을 듯 박혀 있었다.

히데요시“도라노스케는 글씨가 아직도 못생겼어. 그 뭐냐, 광주라는 고을 목사는?”

야마나카“권율이라는 자입니다. 징발대가 곡식을 거둘 때 칼 한 번 안 뽑고 내주었다 합니다.”

히데요시“거 봐라. 왕은 말이 없고, 아전은 열쇠를 내주고, 목사는 쌀을 내줘. 순해, 이 나라는. 순한 땅은 밟고 지나가면 돼. 다리 놓을 필요도 없어.”

그러다 그는 화로에 두 손을 쬐었다. 야마나카 쪽은 보지도 않았다.

히데요시“쓰루마쓰가 있었으면 영파에 데려갔을 텐데. 바닷가라 좋아했을 거야. …나가토시, 그건 적지 마라.”

II · 가면 아래

정월 그믐, 나고야성 안 노 무대에서 아침부터 북과 피리 소리가 났다. 히데요시는 지난달부터 노를 배우고 있었다. 하얀 여자 가면을 쓰고 무대 위를 미끄러지듯 걷는 그를, 노 선생 구레마쓰 신쿠로가 무대 아래에서 조마조마하게 올려다보았다.

구레마쓰“전하, 발을 조금만 더… 아, 아닙니다. 아주 좋습니다.”

히데요시“거짓말. 자네 얼굴에 다 쓰여 있어. 원숭이가 추니까 원숭이 춤이지, 뭐.”

그때 무대 옆 회랑에 대마도주 소 요시토시가 엎드렸다. 소매 끝이 바닷물에 젖어 있었다. 히데요시는 가면을 쓴 채 부채로 까딱 손짓만 했다.

소 요시토시“전하, 조선 소식을 올립니다. 가토 님은 성을 더 접수하셨고, 고을마다 일본 봉행을 앉히자고 청하십니다. 조선 왕이 대답을 미루면 왕자를 앞세워 한양 궁궐까지 접수하겠다 하십니다.”

히데요시“도라노스케답다. 그래서?”

소 요시토시“장인 고니시는 다르게 아룁니다. 조선 백성이 곡식을 이고 산으로 올라가 올봄엔 모를 낼 사람이 없다고요. 그러니 조선 왕과 값을 정해 거래하자 합니다.”

히데요시“약장수는 늘 값 얘기야.”

가면 안에서 나오는 목소리가 웅웅 울렸다. 소 요시토시는 가면의 하얀 뺨만 보았고, 그 아래 얼굴이 웃는지 찡그리는지 알 수 없었다.

히데요시“요시토시, 너는 조선 사람을 오래 봤지. 대마도는 조선 쌀로 먹고 살았으니까. 말해 봐. 조선 왕은 지금 뭘 하고 있느냐.”

소 요시토시“…아무것도 하지 않습니다, 전하. 신하들이 둘로 갈라져 다투는 걸 듣고만 있다 합니다.”

히데요시“아무것도 안 한다. 그게 제일 고약한 거야. 이에야스도 그래. 가만 앉아서 이 원숭이 발이 미끄러지기만 기다리지.”

그는 가면을 벗어 구레마쓰에게 던지듯 넘겼다. 땀에 젖은 흰머리가 이마에 달라붙어 있었다.

히데요시“북경은 멀어. 조선 땅이 천 리, 압록강 건너가 또 천 리야. 그 길 위에서 십오만이 날마다 밥을 먹는다. 그 밥이 조선 논에서 나와. 요시토시, 조선 왕을 무릎 꿇리면 그 논은 내 거냐? 아니면 논 임자들이 산으로 도망가냐?”

소 요시토시“소신은… 모르겠습니다, 전하.”

히데요시“모른다. 장인 닮아서 대답을 아끼는구나.”

히데요시는 무대 한가운데서 발을 쿵 굴렀다. 마루 밑에 묻어 둔 항아리들이 둥 하고 울렸다. 그는 무대 끝에 쪼그려 앉아 버선을 벗고 빨개진 발바닥을 주물렀다.

히데요시“정하자. 조선 왕을 이 원숭이 앞에 꿇리든가, 조선 왕한테 값을 치르고 길을 사든가. 오늘 안에. 이 발 다 주무르기 전에.”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선택

III · 길잡이

이월 초하루, 히데요시는 주인장을 내렸다. 붉은 인주를 듬뿍 묻힌 도장이 두루마리 끝에 찍히자 종이가 살짝 울었다. 소 요시토시와 야마나카는 이마를 바닥에서 떼지 못했다.

히데요시“읽어 봐라, 나가토시. 크게.”

야마나카“조선 국왕은 삼월 안에 한양을 떠나 부산포로 내려와, 태합의 대리인 앞에 무릎 꿇고 복속의 예를 올린다. 팔도의 성과 곳간은 일본 봉행이 맡는다. 조선 국왕은…”

히데요시“왜 멈춰.”

야마나카“조선 국왕은 북경 행차의 길잡이로 삼는다, 라고 되어 있습니다.”

히데요시“그래, 길잡이. 제 나라 길은 제가 제일 잘 알 테니까. 요시토시, 이걸 들고 건너가라. 도라노스케한테 먼저 보이고, 장인한테는 그다음에.”

소 요시토시“전하, 조선 왕이 끝내 오지 않으면 어찌합니까.”

히데요시“안 오면 왕자가 있잖아. 왕 노릇 하고 싶은 놈은 늘 하나 더 있어. 이 원숭이도 남의 자리 하나 얻으려고 남의 짚신을 품에 넣고 다녔다. 겨울에, 맨가슴에.”

소 요시토시는 두루마리를 받아 품에 넣었다. 손이 떨려서 끈이 한 번 풀렸다. 대마도는 조선 쌀로 겨울을 났고, 그 쌀이 오는 길이 이 종이 한 장으로 끊길 수도 있었다.

그날 밤 히데요시는 부채를 다시 펼쳤다. 그는 붓을 들어 조선 반도 위에 점을 하나 찍었다. 한양이었다. 그 점에서 북쪽으로 길게 선을 그었고, 선은 압록강을 넘어 북경 위에서 멈췄다.

히데요시“영파까지는 안 그어도 되겠지. 거긴 배로 가니까. …근데 왜 그렇게 쳐다봐.”

야마나카“먹이 덜 말랐습니다, 전하. 지금 접으시면 번집니다.”

히데요시는 부채를 잠깐 내려다보더니 웃으며 확 접었다. 다시 펴자 조선 땅 위에 시커먼 먹이 번져, 한양도 압록강도 보이지 않았다.

다른 선택을 했다면…

나고야 포구 창고 문간에 태합이 쪼그려 앉아 은덩이가 저울에 오르는 것을 지켜보았다. 창고지기들은 숨도 크게 쉬지 못했고, 대마도 사내는 코끝이 시리다며 얼굴을 돌렸다.

III · 은 저울

이튿날 아침 히데요시는 나고야 포구 창고로 내려갔다. 털옷 깃을 턱까지 올리고 문간에 쪼그려 앉아, 은덩이가 저울에 오르는 것을 직접 지켜보았다. 창고지기들은 태합이 왜 여기 와 있는지 몰라 숨도 크게 쉬지 못했다.

히데요시“이게 쌀 몇 섬 값이냐, 요시토시. 조선 값으로.”

소 요시토시“조선 장시 시세로 치면 궤짝 하나에 사백 섬쯤 됩니다. 다만 지금 조선에는 팔 쌀이 많지 않습니다.”

히데요시“그럼 더 쳐 줘. 이 원숭이가 남의 쌀을 사 먹는 건 처음이다. 비싸게 사 먹어야 소문이 나지.”

야마나카“가토 님께는 어찌 전할까요. 성을 돌려주라 하시면…”

히데요시“화내겠지. 그 애는 화나면 경을 외워. 나무묘법연화경 백 번쯤 외우고 나면 들을 거야. 왕자들도 돌려보내라 해. 가마 태워서. 그리고 조선 왕한테는 이렇게 써.”

그는 은덩이 하나를 집어 들었다. 여섯 손가락이 차가운 은을 감쌌다.

히데요시“북경을 얻으면 조선 왕에게 요동 땅 한 귀퉁이를 떼어 준다. 그 대신 조선은 일본군이 지나는 동안 쌀을 팔고 길을 막지 않는다. 그리고 하나 더. 은을 받고도 쌀이 안 오면, 그땐 도라노스케를 다시 푼다. 그것도 적어. 아주 공손하게.”

소 요시토시는 그제야 숨을 내쉬었다. 그는 대마도 사람들이 조선 장시에서 쌀을 흥정하던 모습을 떠올렸다. 소리를 지르다가도 끝에 가서는 웃으며 덤 한 됫박을 얹어 주던 사람들이었다.

히데요시“요시토시, 너 웃냐?”

소 요시토시“아닙니다, 전하. 바닷바람에 코가 시려서…”

히데요시“거짓말도 장인한테 배웠구나.”

그는 은덩이를 손바닥 위에서 두어 번 튕겨 보다가 저울 접시에 도로 놓았다. 저울대가 기울었다가 천천히 바로 섰다.

히데요시“가볍네. 왕 하나 무릎값으로는. 나가토시, 그 말은 적지 마라. 그리고 북경 얘기 적은 편지, 그건 버리지 말고 둬. 순서만 바뀐 거니까.”

다른 선택을 했다면…

붉은 인주가 듬뿍 묻은 도장이 두루마리 끝에 찍히자 종이가 살짝 울었다. 그날 밤 부채 위에는 한양에서 북쪽으로 선이 길게 그어졌는데, 먹은 아직 마르지 않았다.

시점 2 / 3이순신전라좌수사

I · 노를 들어 본 손님

계사년 정월 스무이틀, 여수 앞바다에 처음 보는 배 한 척이 들어왔다. 돛에 일본 수군 대장 와키자카 야스하루의 문장이 그려져 있었다. 이순신은 동헌 마루에서 그 돛을 한참 보다가 갓끈을 고쳐 맸다.

일기에는 이렇게 적혔다. 흐림. 아침에 왜선 한 척이 포구에 들었다. 한양에서 온 선전관이 그 배를 타고 왔다.

선전관“사또, 비변사 공문입니다. 왜의 수군이 서해 물길로 군량을 나르니, 전라좌수영은 물길을 안내하고 판옥선과 격군 장부를 왜의 봉행에게 보이라 하셨습니다.”

이순신“비변사의 뜻인가, 전하의 뜻인가.”

선전관“…공문에는 비변사라고만 적혀 있습니다. 소인은 들고 왔을 뿐입니다, 사또.”

이순신“알겠네. 수고했어. 들어가서 국부터 먹게. 왜 배는 많이 흔들렸을 텐데.”

배에서 내린 왜장은 오카다 한에몬이라는 서른 남짓한 사내였다. 그는 신을 신은 채 동헌 마루 끝까지 올라섰다가, 송희립이 눈을 부라리자 그제야 신을 벗었다. 통사를 데려왔지만 조선말도 몇 마디는 했다.

오카다“배, 몇 척. 격군, 몇 명. 오늘 봅니다.”

송희립“사또, 저자가 지금…”

이순신“보여 드리게. 선소부터.”

선소로 내려가는 길에 오카다는 수첩을 꺼내 눈에 띄는 것마다 적었다. 돛대 높이, 포 구멍 수, 노 길이까지 적었다. 그는 노 하나를 직접 들어 무게를 가늠해 보더니 통사에게 무어라 중얼거렸다. 이순신은 그 뒤를 두 걸음 떨어져 따라갔다.

지난봄 어명대로 판옥선 건조를 멈춘 뒤로 선소는 반쯤 비어 있었다. 오카다는 빈 선대를 보고 만족스럽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다 거적에 덮인 커다란 것 앞에서 걸음을 멈추었다. 거적 끝으로 나무로 깎은 용의 턱이 삐죽 나와 있었다.

오카다“이것. 무엇.”

나대용“짓다 만 조운선 뱃머리요. 장식이오, 장식. 용 대가리를 달면 쌀이 덜 썩는다고들 해서.”

오카다는 한참 거적을 내려다보다가 수첩에 무어라 적었다. 나대용은 그가 돌아선 뒤에야 침을 꿀꺽 삼켰다.

거북선은 장부에 조운선 수리라고 적힌 채 물가에 묶여 있었다. 나대용이 지난밤 등판 위에 거적과 짚단을 잔뜩 얹어 두어서, 멀리서 보면 짚을 실은 낡은 배 같았다. 오카다는 그 배 앞에서 걸음을 멈추고, 거적 틈으로 삐져나온 쇠못 끝을 손가락으로 건드렸다.

오카다“쌀배? 쌀배에, 못이 왜 이렇게.”

나대용“쥐 때문이오. 이 동네 쥐가 어찌나 큰지 판자를 다 갉아 먹소. 사또, 그렇지요?”

통사가 옮기자 오카다는 웃지도 않고 수첩에 무어라 적었다. 이순신은 나대용을 쳐다보지 않았다.

오카다가 객사로 돌아간 뒤 이순신은 혼자 선소에 남았다. 그는 오카다가 들어 보았던 노를 집어 똑같이 들어 보았다. 손바닥에 굳은 송진이 묻어났다.

그날 밤 일기에는 날씨만 적혔다. 흐림, 밤에 비. 그는 붓을 내려놓았다가 다시 들어 한 줄을 보탰다. 왜장이 우리 노를 들어 보았다.

II · 서해로 가는 쌀

사흘 뒤 오카다가 다시 동헌에 올라왔다. 이번에는 와키자카의 서신을 들고 왔고, 신은 미리 벗었다. 통사가 서신을 펼쳐 더듬더듬 읽었다.

통사“와키자카 님의 말씀입니다. 다음 달 보름, 부산포에서 쌀배 예순 척이 서해로 갑니다. 조선 판옥선 열 척과 격군이 앞장서 물길을 열라. 울돌목과 서해 여울은 조선 사람이 아니면 모른다, 하셨습니다.”

정운“우리 배로 왜놈 쌀배 길을 닦아 주라고? 그 쌀이 어디로 가는데! 압록강 건너 명 치러 가는 쌀 아니오! 그 쌀 먹은 놈들이 지금 고을마다 장정을 끌고…”

송희립“녹도, 왜장 앞이오.”

이순신“녹도, 앉게.”

정운은 앉지 않았다. 주먹이 허벅지 옆에서 하얗게 쥐어져 있었다. 이순신은 그를 한 번 보고는 오카다 쪽으로 몸을 돌렸다.

이순신“봉행께 여쭈게. 판옥선은 바닥이 평평해서 서해 큰 물결에 약하오. 열 척이 나가면 반은 못 돌아올 거요. 격군들도 겨울을 나서 지쳤고. 날을 좀 미룰 수 있겠소?”

오카다“안 미룬다. 가토 님은 북쪽에서 조선 성을 다 받았다. 와키자카 님은 바다를 받는다. 조선 왕이 허락했다.”

이순신“왕이 허락했다는 글을 보여 주시게.”

오카다는 대답 대신 비변사 공문을 탁자에 툭 내려놓았다. 이순신이 사흘 전에 이미 읽은 그 공문이었다. 오카다는 일어서면서 마루에 세워 둔 노 하나를 발끝으로 건드렸다. 노가 쓰러지며 큰 소리를 냈다. 송희립이 엉거주춤 일어섰다가 이순신의 눈짓에 도로 앉았다.

오카다“사흘 안에 배를 정해라. 안 정하면, 우리가 정한다.”

그가 나간 뒤 동헌에는 한동안 아무도 말이 없었다. 나대용이 쓰러진 노를 주워 벽에 다시 세웠다.

나대용“사또, 배는 언제든 뜰 수 있습니다. 노도 다 기름 먹여 놨고요. 다만 한 번 뜨면… 다시 이 포구로는 못 들어올 수도 있습니다.”

정운“안 들어오면 그만입니다. 바다가 다 포구지요. 사또, 저 쌀배 예순 척이 서해로 넘어가면 그다음엔 우리 판옥선이 왜놈 깃발 달고 압록강 가에 서 있을 겁니다. 그 꼴 보시렵니까?”

이순신“송희립.”

송희립“예, 사또.”

이순신“내일 고음천에 사람 하나 보내게. 어머니께 쌀 한 섬… 아니, 쌀은 말고. 그냥 날씨나 여쭙고 오라 하게. 거긴 오늘 비가 왔는지.”

송희립은 대답을 하려다 말고 고개만 숙였다. 이순신은 창을 열었다. 비가 그치고 바람이 동쪽으로 돌고 있었다.

그날 밤 정운은 동헌 마당을 떠나지 않았다. 이순신은 등잔 아래 일기장을 펼쳐 놓고 한 글자도 쓰지 않았다. 문풍지가 바람에 떨 때마다 그는 고개를 들어 창 쪽을 보았고, 마당의 그림자는 그때마다 그 자리에 그대로 서 있었다.

이순신의 선택

III · 그믐밤

그믐밤, 달이 없었다. 이순신은 배마다 등불을 끄게 하고 노에 헝겊을 감게 했다. 포구 안쪽에 묶인 오카다의 배에서는 화톳불 하나가 꺼질 듯 말 듯 타고 있었다.

송희립“사또, 저 배는 어찌합니까. 지금 치면 소리 없이 끝납니다.”

이순신“두게. 손님으로 온 사람이야. 아침에 일어나서 빈 선소나 세라고 해.”

배들은 노 소리만 내며 포구를 빠져나갔다. 이순신은 맨 앞 배 뒷전에 서서 화톳불이 점점 작아지는 것을 보았다. 불은 끝내 한 번도 흔들리지 않았다.

사흘째 아침, 미조항 앞바다에서 정운의 정탐선이 깃발을 흔들었다. 부산포를 떠난 왜의 쌀배 선발대 열두 척이 남해 물목으로 들어오고 있었다. 호위선은 셋뿐이었다.

정운“사또, 노 젓는 놈들이 이상합니다. 왜놈 옷이 아닙니다. 상투를 틀었어요!”

이순신“쌀배는 태우지 말게. 노꾼들이 다 묶여 있어. 호위선만 쳐.”

총통 소리가 물 위를 세 번 울렸다. 호위선 둘이 기울었고, 하나는 돛을 내렸다. 쌀배의 왜병들은 칼을 버리고 손을 들었다. 조선 배들이 쌀배 옆에 붙자, 노 자리에 발목이 묶인 조선 장정들이 고개를 들었다.

장정“경상도 함안 놈입니다. 고을 성문을 왜놈이 접수하더니, 장정은 다 배에 태웠습니다. 서해 너머까지 노를 저으라고…”

이순신“밥부터 먹이게. 묶은 줄은 송희립이 끊고.”

정운은 쌀배 열두 척을 줄줄이 엮어 끌었다. 손을 든 왜병들은 작은 배 두 척에 나눠 태워 부산 쪽으로 밀어 보냈다. 이순신은 그들에게 물과 쌀 한 자루를 실어 주게 했다.

정운“사또, 저놈들을 그냥 보냅니까? 가서 다 말할 텐데.”

이순신“말하라고 보내는 거야. 누가 했는지 숨길 생각 없네.”

그날 밤 그는 장계를 썼다. 명령 없이 수영을 떠났다는 것, 쌀배 열두 척을 거두고 조선 장정 백여든을 풀었다는 것을 있는 그대로 적었다. 일기에는 날씨를 적었다. 맑음, 동풍. 그 아래에 고음천에 다녀온 사람이 아직 돌아오지 않았다고 한 줄을 더 적었다.

다른 선택을 했다면…

쓸 만한 배들은 이틀 밤 사이 금오도 안쪽 물굽이로 옮겨졌고, 빈 선대 위에는 뜯긴 판자 조각이 일부러 흩어져 있었다. 보름 아침, 낡은 판옥선 네 척 맨 앞에 녹도 장수가 섰다.

III · 낡은 배 네 척

이순신은 사흘째 되는 날 장부를 넘겼다. 장부에는 판옥선 네 척과 격군 이백이 적혀 있었다. 쓸 만한 배들은 이틀 밤에 걸쳐 금오도 안쪽 물굽이로 옮겨 놓은 뒤였다.

오카다“네 척? 지난번 본 것보다 적다.”

이순신“겨울 바람에 다 상했소. 선대 위에 있던 건 판자를 뜯어 저 네 척을 기웠고. 의심되면 선소를 다시 보시게.”

오카다는 정말로 선소를 다시 돌았다. 빈 선대 위에 뜯긴 판자 조각이 흩어져 있었다. 나대용이 지난밤 일부러 늘어놓은 것이었다. 오카다는 수첩을 덮고 혀를 찼다.

오카다“조선 수군, 별것 없다.”

이순신“그렇소. 별것 없소.”

문제는 길잡이였다. 네 척을 끌고 갈 장수가 있어야 했다. 이순신이 입을 떼기도 전에 정운이 앞으로 나섰다.

정운“소인이 가겠습니다.”

이순신“녹도, 자네는 안 되네. 자네 성질에 왜놈 쌀배 앞에서 길을 열다가는…”

정운“열겠습니다. 시키는 대로 열 겁니다. 대신 가는 길에 놈들 배가 몇 척인지, 어디서 쉬는지, 쌀을 몇 섬씩 싣는지 다 세어 오겠습니다. 사또는 세는 거 좋아하시잖습니까.”

이순신은 한참 정운을 보았다. 정운의 눈이 붉었다. 그는 결국 고개를 끄덕였다.

이순신“살아서 오게. 세어 온 걸 나한테 말해 줘야 하니까.”

보름 아침, 낡은 판옥선 네 척이 왜의 쌀배 예순 척 앞에 서서 서쪽으로 나아갔다. 맨 앞 배 뱃머리에 정운이 서 있었다. 그는 한 번도 뒤를 돌아보지 않았다. 이순신은 언덕 위에서 그 행렬이 돌산 끝을 돌아 사라질 때까지 서 있었다.

나대용“사또, 금오도 배들은 언제 꺼냅니까.”

이순신“녹도가 돌아오면.”

그날 일기에는 이렇게 적혔다. 맑음, 동풍. 녹도가 왜 쌀배 앞에서 갔다. 붓이 거기서 멈추었고, 먹이 다 마를 때까지 그는 일기장을 덮지 않았다.

다른 선택을 했다면…

그믐밤, 등불은 꺼지고 노에는 헝겊이 감겼다. 포구 안쪽 화톳불이 점점 작아지더니, 사흘째 아침 미조항 앞바다에서 정탐선이 깃발을 흔들었다. 노 젓는 자들이 이상하다고 했다.

시점 3 / 3선조조선 국왕

I · 반듯한 글씨

계사년 이월 초사흘 밤, 경복궁 사정전 문밖에는 조선 군사와 일본 군사가 나란히 서 있었다. 일본 봉행이 도성에 들어앉은 뒤로 궁문마다 그렇게 섰다. 선조는 촛불 아래서 편지 한 장을 세 번째 펼쳤다.

볼모로 간 아들의 편지였다. 신은 무사하옵니다. 밥은 먹을 만하고 방은 따뜻하옵니다. 일본 장수들이 예를 다하니 심려 마시옵소서. 짧은 편지였고, 글자 하나하나가 줄을 맞춘 듯 반듯했다.

선조“경, 이 아이 글씨가 원래 이리 반듯했소?”

류성룡“…예?”

선조“어려서부터 획을 끝까지 안 긋는 아이였소. 스승이 회초리를 들어도 안 고쳐졌지. 그런데 이걸 보시오. 한 획도 안 빼먹었어.”

류성룡은 편지를 받아 들고 촛불 가까이 가져갔다. 그는 한참 들여다보다가 아무 말 없이 도로 내려놓았다. 그도 왕자의 글씨를 알았다. 경연 자리에서 획을 끝까지 긋지 않아 스승에게 혼나던 소년을 여러 번 보았다.

선조“누가 옆에 서서 불러 줬겠지. 아니면 쓰고, 찢기고, 또 쓰고. 몇 번을 썼을까. …몇 번을 썼을 것 같소.”

류성룡“전하, 그만 접으시지요.”

선조는 접지 않았다. 그는 옥대 고리를 손가락으로 돌리며 편지 귀퉁이를 보았다. 종이 끝에 손톱으로 누른 자국이 작게 나 있었다. 일부러 그런 건지 아닌지 알 수 없었다.

선조“과인이 길을 열 때, 칼만 피하면 되는 줄 알았소. 그런데 칼은 지나가지 않고 눌러앉았구려. 성문 열쇠를 가져가더니 곳간 열쇠를 가져가고, 그다음엔 아들을 가져갔소. 다음엔 뭘 가져갈 것 같소, 경.”

류성룡“…전하의 이름일 것입니다.”

선조는 고리를 돌리던 손을 멈추었다. 딸깍 소리가 끊기자 문밖 일본 군사의 신발 끄는 소리가 들렸다.

선조“금강산 중들은 아직도 산문을 닫고 있소?”

류성룡“예, 전하. 가토의 징발대가 강원도 고갯길에서 세 번이나 쫓겨 내려왔습니다. 일본 봉행이 그 중들을 묶어 보내라고 벌써 두 번 사람을 보냈습니다.”

선조“묶어 보내라. 과인 손으로. …그 중들은 과인이 시키지도 않은 일을 하고 있는데, 과인은 그걸 막으라는 말을 듣고 있구려.”

선조“그 중이 가토 진영에서 뭘 들고 왔다 했소.”

류성룡“사명대사 유정이 가토에게서 들은 말을 그대로 올렸습니다. 조선 왕이 오면 왕자는 돌려준다, 안 오면 왕자가 왕이 될 수도 있다고. 그리고 대사가 따로 한마디를 덧붙였습니다. 가토는 칼보다 말이 짧은 사람이니, 들은 그대로 믿으시라고요.”

선조“중이 왕한테 겁을 주는구려. 고맙게도.”

그는 편지를 다시 접어 소매에 넣었다. 그리고 다시 꺼냈다. 류성룡은 그 손을 보지 않으려고 촛불만 바라보았다. 촛농이 한 줄기 흘러내려 촛대 받침에서 하얗게 굳었다. 문밖에서 일본 군사가 교대하는 소리가 났고, 선조는 그 소리가 그칠 때까지 편지를 쥔 채 앉아 있었다.

II · 남이 그린 지도

이월 스무날, 일본 봉행 마스다 나가모리가 승려 겐소를 앞세우고 사정전에 들었다. 겐소의 품에서 비단에 그린 지도 한 폭이 나왔다. 일본과 조선과 명나라가 한 장에 들어 있었고, 북경 자리에는 붉은 글씨로 천황, 바닷가 영파 자리에는 태합이라 적혀 있었다.

겐소“전하, 태합께서 새 천하의 그림을 보내셨습니다. 명이 무너지면 천황 폐하께서는 북경에, 태합께서는 영파에 앉으십니다. 그 길을 함께 걷는 나라는 새 천하에서 높은 자리를 얻을 것입니다.”

선조“스님, 이 그림에 조선은 어디 있소.”

겐소“여기 있습니다, 전하. 북경 가는 길 위에요.”

선조는 지도를 내려다보았다. 조선 땅에는 아무 글씨도 없었다. 붉은 선 하나가 부산에서 한양을 지나 압록강까지 곧게 그어져 있을 뿐이었다. 선은 경복궁 자리를 정확히 밟고 지나갔다. 그는 손끝으로 그 자리를 한 번 눌러 보았다.

선조“과인의 자리는 안 적혀 있구려.”

마스다“그건 태합께서 다음 글로 정하실 것입니다. 무릎이 될지, 은이 될지는 조선이 하기에 달렸습니다.”

통사가 그 말을 옮기는 동안 마스다는 사정전 기둥의 단청을 올려다보고 있었다. 제 집 기둥을 보는 사람의 얼굴이었다. 선조는 옥대 고리를 천천히 돌렸다.

두 사람이 물러간 뒤 선조는 광주목사 권율을 불러들였다. 권율은 사흘 밤을 말을 달려 올라온 길이었다. 바짓가랑이에 흙이 말라붙어 있었고, 절을 하다가 무릎에서 뚝 소리가 났다.

선조“경이 곡식을 내주며 피를 막았다고 들었소. 고을은 어떻소.”

권율“조용합니다, 전하. 피는 안 흘렀습니다. 대신 들이 비었습니다. 볍씨까지 내준 마을이 열에 셋입니다. 사람들이 밤마다 산으로 올라갑니다. 신은 그걸 못 본 척하고 있습니다.”

선조“못 본 척이라. 왜 그러시오.”

권율“안 본 척해야 다시 내려올 길이 남지요. 신이 눈을 마주치면 그놈들은 역적이 되고, 신은 그놈들을 잡아야 합니다. 신은 늙어서 사람 잡으러 산을 못 탑니다.”

류성룡이 입가를 손으로 가렸다. 선조는 웃지 않았다. 그는 비단 지도를 권율 앞으로 밀었다.

선조“경은 농사를 아시오. 이 땅에 무엇을 심으면 좋겠소.”

권율“신은 지도는 모릅니다. 다만 남이 그은 선은 대개 남의 논 사이로 지나가더군요. 물꼬가 다 끊깁니다.”

선조“좌의정은 어찌 보오.”

류성룡“전하, 이번엔 신들이 말하지 않겠습니다. 지난번에도, 그 전에도 신들이 말했습니다.”

사정전 안이 조용해졌다. 선조는 옥대 고리를 돌리다가 멈추고, 다시 돌렸다. 소매 속의 편지가 팔꿈치에 닿았다.

선조“둘 다 입을 닫겠다는 거요? …좋소. 그럼 과인이 혼잣말을 하겠소. 경들은 못 들은 걸로 하시오.”

선조의 선택

III · 볍씨 주머니

그날 밤 선조는 권율을 궁 뒤편 별당으로 따로 불렀다. 류성룡이 촛대를 들고 문간에 섰다. 문밖 일본 군사의 발소리가 멀어질 때까지 셋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선조가 소매에서 무명 주머니 하나를 꺼냈다. 손바닥만 한 주머니에 볍씨가 반쯤 차 있었다.

선조“경의 고을에서 올라온 볍씨요. 공물 상자 구석에 있더군. 그 안에 과인의 글을 넣었소.”

권율“밀지입니까.”

선조“고을마다 장정을 모으시오. 모으되 모은 티를 내지 마시오. 산으로 올라간 자들은 역적이 아니라 과인의 군사요. 그리고 과인이 부를 때까지 칼은 뽑지 마시오.”

권율은 주머니를 받아 들고 무게를 가늠하듯 손바닥 위에서 굴렸다. 볍씨 사이에서 접힌 종이가 바스락거렸다.

권율“전하, 볍씨는 봄에 뿌리는 겁니다. 언제가 봄입니까.”

선조“경이 정하시오.”

류성룡이 문간에서 고개를 돌렸다. 왕은 이번에도 마지막 말을 신하에게 넘겼다. 다만 이번에는 넘기는 손이 떨리지 않았다.

권율“그럼 신이 정하겠습니다. 틀리면 신의 목을 치십시오. 볍씨 값은 그걸로 치르지요.”

선조“경의 목은 비싸서 안 되오. 과인이 치를 값은 따로 있소.”

권율이 물러간 뒤 선조는 붓을 들었다. 볼모로 간 아들에게 쓰는 답장이었다. 그는 몇 줄을 쓰다가 멈추고, 다시 쓰다가 멈추었다. 종이 위에는 끝까지 긋지 않은 획이 여럿 남았다.

류성룡“전하, 그 편지를 보내시렵니까.”

선조“안 보내오. 지금 보내면 이 아이가 아비 글씨를 알아볼 거요. 아비가 무슨 일을 꾸미는지도.”

그는 편지를 촛불에 대었다. 불이 종이 끝을 갉아먹는 동안 그는 눈을 돌리지 않았다. 재가 바닥에 떨어지자 그는 옥대 고리를 한 번 돌렸다. 딸깍 소리가 별당 안에 작게 울렸다.

다른 선택을 했다면…

경회루 연못가 버들에 물이 오르던 삼월 초하루, 붉은 비단 진바오리가 곤룡포 위에 걸쳐졌다. 소매가 짧아 손목이 드러났고, 대신들 줄에는 빈자리가 하나 있었다.

III · 경회루의 잔

삼월 초하루, 경회루에서 잔치가 열렸다. 연못가 버들에 물이 오르고 있었다. 마스다 나가모리는 태합이 보낸 선물이라며 붉은 비단 진바오리 한 벌과 칼 한 자루를 올렸다.

마스다“전하, 태합께서 조선 국왕을 새 천하의 벗으로 맞으신다 하셨습니다. 입어 보시지요.”

선조는 대신들이 보는 앞에서 곤룡포 위에 진바오리를 걸쳤다. 소매가 짧아서 손목이 드러났다. 일본 장수들이 손뼉을 쳤다.

선조“과인한테는 좀 작구려. 태합은 키가 작다더니.”

통사가 옮기자 마스다는 잠깐 웃음을 멈췄다가 더 크게 웃었다. 조선 대신들 줄에서는 아무도 웃지 않았다. 그 줄 가운데 류성룡의 자리가 비어 있었다. 아침에 병을 핑계로 상소를 올려 보낸 것이었다.

겐소“전하, 조선 군사 삼천을 사월 보름까지 의주로 보내 주십시오. 길잡이입니다. 그러면 왕자께서는 단오 전에 돌아오실 겁니다.”

선조“삼천이라. 단오 전에.”

그는 잔을 들었다. 술이 혀에 쓰지도 달지도 않았다. 연못 물에 비친 그의 모습이 바람에 흔들렸다. 붉은 진바오리를 걸친 왕이 거꾸로 서 있었다.

잔치 끝자락, 권율이 아래 줄에서 일어나 절을 했다. 고을에 내려가 길잡이 장정을 모으겠다고 아뢰었다.

선조“경, 장정이 모이겠소?”

권율“모으라 하시면 모읍니다, 전하. 다만 모이는 것과 따라가는 것은 다르지요. 산에서 내려온 놈들이 의주까지 갈지, 가다가 도로 산으로 들어갈지는… 신도 모릅니다.”

마스다가 통사를 쳐다보았다. 통사는 그 말을 짧게 줄여 옮겼다. 권율은 다시 절하고 물러갔다.

잔치가 파한 뒤 선조는 진바오리를 벗어 내관에게 건넸다. 곱게 개어 두라고 일렀다. 그러다 내관을 다시 불렀다.

선조“그거, 좌의정 집으로 보내시오. 병문안이라고 하고.”

내관은 영문을 모른 채 물러갔다. 선조는 혼자 연못가에 남아 옥대 고리를 돌렸다. 물 위의 그림자는 이제 곤룡포 차림이었다. 딸깍 소리가 물을 건너 누각 기둥에 부딪혔다.

다른 선택을 했다면…

궁 뒤편 별당에서 왕이 소매 속 무명 주머니를 꺼냈다. 손바닥만 한 주머니에는 볍씨가 반쯤 들어 있었고, 아들에게 쓰던 답장은 몇 줄 가다 멈추곤 했다.

제3장 · 루트 T4

바다만 홀로

1593년 1월 ~ 3월 · 쌀배가 하나둘 사라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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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율은 곡식을 내주며 피를 막았고, 가토는 칼을 뽑을 수 있던 자리에서 칼을 거두었다. 땅 위에서는 일본군과 조선 백성이 서로 눈을 피한 채 해를 넘겼다. 그런데 계사년 봄, 남쪽 바다에서 일본 쌀배가 한 척씩 돌아오지 않기 시작한다. 누가 그랬는지는 아무도 입에 올리지 않는다.

시점 1 / 3도요토미 히데요시태합

I · 황금 다실

명은 처음부터 알고 있었고, 고니시의 선봉은 압록강 가에서 겨울을 났다. 광주목사 권율은 중화 마을에서 수레의 쌀을 내주고, 끌려가던 장정 대신 제 수레꾼들에게 짐을 지게 했다. 함경도의 가토는 국경인을 묶어 조선 관아에 넘기고 두 왕자를 남쪽으로 돌려보냈다. 태합은 조선이 정직하게 길만 빌려주었다고 믿었고, 모자란 쌀은 바다로 실어 보내기로 했다.

요양성은 유월에 하루 만에 무너졌고, 명은 조선을 배신자라 불렀다. 경기 길목의 권율은 볍씨 독 아홉 개를 징발대에 내주었고, 일본군 장부에는 그의 이름 옆에 순종이라는 두 글자가 붙었다. 함경도의 가토는 국경인을 관찰사 유영립에게 넘기고 칼을 거둔 뒤, 조선 땅에서는 더 짜낼 곡식이 없다며 나고야에 군량을 청했다. 그 서신을 받은 태합은 배를 띄웠다.

조선 왕의 봉서는 가토의 손에 들어갔지만, 가토는 그것을 바다에 띄우지 않고 고니시의 목줄로만 쥐었다. 권율은 숭례문 앞에서 도성 네 대문의 열쇠를 내주고, 장정을 끌어가지 말라는 약속을 받아 냈다. 태합은 여전히 조선이 머리를 숙인 속국이라 믿었다. 속국의 땅길이 조용하니, 쌀은 바닷길로 보내면 그만이었다.

조선 왕은 오지 않았고, 왕자는 부산포 대신 동래 객사에 머물렀다. 권율은 짐꾼 쉰을 이끌고 그 행렬을 부산까지 따라가 한 사람도 잃지 않았다. 가토는 왕 없이는 바다를 건널 수 없다는 서신을 제 손으로 써 올렸고, 태합은 그 서신을 읽고 한참 웃다가 답을 미뤘다. 왕의 무릎을 기다리는 동안에도 군사들은 먹어야 했으므로, 쌀배가 부산에서 서쪽으로 떠났다.

계사년 정월 스무날, 나고야성 안쪽 깊은 곳에 황금 다실이 차려졌다. 벽도 기둥도 찻솥도 금이었다. 등잔 하나만 켜도 방 전체가 누렇게 달아올라서, 들어오는 사람마다 눈을 가늘게 떴다.

히데요시는 국자로 물을 떠 찻사발에 붓고 대나무 솔로 저었다. 손님은 하나뿐이었다. 군량과 배를 맡은 부교 나쓰카 마사이에가 무릎을 꿇고 앉아, 품에 든 장부가 금벽에 비칠까 봐 소매로 가리고 있었다. 히데요시의 소매 속에도 종이가 한 장 들어 있었다. 오사카에서 아침에 닿은 편지였고, 그는 차를 젓다 말고 자꾸 그 소매를 만졌다.

히데요시“마셔. 이 원숭이가 직접 저은 차다. 오사카에서도 이걸 마셔 본 놈은 다섯이 안 돼. 그런데 뭘 그렇게 숨기고 있어.”

나쓰카 마사이에“장부입니다, 전하. 차를 다 드시고 나서 보여 드리려 했습니다.”

히데요시“차 다 식겠다. 내놔.”

마사이에는 장부를 펼쳤다. 정월에 부산을 떠나 남해를 돌아 서해로 올라간 쌀배가 마흔 척이었다. 대동강 어귀에 닿은 것은 서른한 척이었다.

나쓰카 마사이에“아홉 척이 오지 않았습니다. 전부 전라도 앞바다를 지나다가였습니다. 뱃사람들은 풍랑이라고 합니다.”

히데요시“풍랑. 정월 바다에 풍랑이야 있지. 그런데 그 풍랑이 쌀배만 골라 먹었어?”

나쓰카 마사이에“호위하던 전선은 한 척도 다치지 않았습니다. 사라진 건 늘 무리 맨 뒤에 처진 배였습니다. 밤에, 섬 그늘에서요.”

히데요시는 찻사발을 내려놓았다. 오른손 엄지 옆 여섯 번째 손가락이 사발 굽을 톡톡 두드렸다. 그는 웃는 얼굴 그대로 마사이에를 한참 보았다.

히데요시“땅길은 어떠냐. 가토 그 애는 뭐라고 하든.”

나쓰카 마사이에“조용하다 하십니다. 조선 목사들이 곡식을 내주고, 백성은 눈을 피하지만 돌은 안 던진다고요. 다만 수레로는 평양까지 한 달이 걸립니다. 배로는 열흘이고요. 그래서 바다로…”

히데요시“땅은 조용하고 바다는 시끄럽다. 그럼 조선 수군은 지금 뭘 하고 있지?”

나쓰카 마사이에“조선 조정이 보낸 글에는, 화친 뒤로 수군을 줄였고 남은 배는 포구에 묶여 썩고 있다고 적혀 있습니다.”

히데요시“썩고 있다. 그래, 썩고 있겠지.”

그는 다시 웃었다. 마사이에는 따라 웃지 않았다. 금벽에 비친 노인의 그림자가 웃음소리보다 조금 늦게 흔들렸다.

II · 살아 돌아온 키잡이

이월 초, 시와쿠 섬 출신 뱃사람 하나가 나고야 성문 앞에 닿았다. 전라도 앞바다에서 사라진 쌀배의 키잡이였다. 그는 부서진 널빤지에 매달려 이틀을 떠다니다 조선 어선에 건져졌는데, 조선 어부들은 그를 말없이 부산 근처 갯가에 내려놓고 가 버렸다고 했다.

히데요시는 그를 다다미방이 아니라 마구간 옆 흙마당으로 불렀다. 그는 맨발로 마당에 쪼그려 앉아 키잡이와 눈높이를 맞췄다.

히데요시“이 원숭이도 너처럼 흙바닥 출신이다. 겁먹지 말고 본 대로만 말해. 배가 몇 척이었어?”

키잡이“모, 모르겠습니다. 처음엔 하나였는데, 불이 붙고 보니 셋이었던 것도 같고… 깃발이 없었습니다. 북도 안 쳤고요. 불화살이 먼저 왔습니다.”

히데요시“조선 말을 들었냐?”

키잡이“들은 것 같기도 하고… 바람 소리였는지도 모르겠습니다. 다만 노 젓는 소리가 아주 고르게 났습니다. 해적은 그렇게 못 젓습니다.”

히데요시“그렇지. 해적은 그렇게 못 젓지.”

그는 키잡이의 어깨를 두드리고 은 한 덩이를 손에 쥐여 주었다. 키잡이가 이마를 땅에 찧으며 물러간 뒤에도 그는 한동안 쪼그려 앉은 채 일어나지 않았다. 여섯 번째 손가락으로 마당 흙에 줄을 그었다. 부산, 거제, 그리고 그 서쪽으로 길게 휘어지는 줄이었다.

나쓰카 마사이에“전하, 조선 조정에 따지시겠습니까. 범인을 잡아 바치라고요.”

히데요시“조선 왕이 뭐라 할 것 같으냐.”

나쓰카 마사이에“모른다고 하겠지요. 풍랑이라고.”

히데요시“그래, 모른다고 하겠지. 진짜 모를 수도 있고. 그게 더 고약해. 제 나라 왕도 모르는 칼이 바다에 떠다닌다는 거니까.”

마사이에는 품에서 서신 두 통을 꺼냈다. 하나는 평양의 고니시가, 하나는 수군 대장 구키 요시타카가 보낸 것이었다.

나쓰카 마사이에“고니시 님은 바닷길을 줄이고 조선 조정에서 쌀을 사자고 하십니다. 값은 은으로요. 구키 님은 반대로, 조선 남쪽 포구마다 우리 배와 군사를 두고 조선 수영을 우리 군감 밑에 두자고 하십니다.”

히데요시“하나는 돈을 내자 하고 하나는 칼을 박자 하는구나. 너는?”

나쓰카 마사이에“저는 장부만 봅니다, 전하. 아홉 척이면 쌀 삼천 섬입니다. 봄에 군사를 더 보내면 배는 두 배로 나갑니다.”

그는 일어나 무릎의 흙을 털었다. 소매 속에서 오사카에서 온 편지가 바스락거렸다. 요도가 아이를 가졌다는 편지였다. 쓰루마쓰를 묻은 지 두 해 만이었다. 그는 편지를 소매 깊숙이 밀어 넣고, 흙바닥에 그은 줄을 발바닥으로 문질러 지웠다.

히데요시“올해는 좋은 해야, 마사이에. 좋은 해에 쌀배나 세고 있을 수는 없잖아. 응?”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선택

III · 군감선

히데요시는 그날 밤 붓을 들지 않고 입으로 명을 불렀다. 마사이에가 받아 적었다. 부산에서 전라도 끝까지 조선 포구 열한 곳에 일본 군사를 두고, 조선 수영의 배는 한 척도 빠짐없이 장부에 올려 일본 군감의 점고를 받게 하라. 조선 왕에게는 따로 글을 보내라.

히데요시“글은 짧게 써. 쌀배를 먹은 풍랑을 찾아 바치라고. 못 찾으면 우리가 찾겠다고. 우리가 찾으면, 그 풍랑이 사는 고을도 같이 찾게 될 거라고.”

나쓰카 마사이에“전하, 그렇게 쓰면 조선 조정이 겁을 먹습니다. 조용하던 땅길이 다시 시끄러워질 수도 있습니다.”

히데요시“겁먹으라고 쓰는 거야. 오와리에서는 마을에 도둑이 들면 촌장부터 불러다 앉혔어. 그러면 해 지기 전에 촌장이 도둑을 묶어 왔지. 이 원숭이가 그걸 보고 컸다.”

이레 뒤, 군감선 세 척이 나고야를 떠났다. 표주박 깃발이 바람에 찢어질 듯 펄럭였다. 구키 요시타카의 조카라는 젊은 무사가 군감으로 뽑혔는데, 떠나기 전날 성에 올라와 절을 하며 조선 판옥선이 몇 척이냐고 물었다.

히데요시“그걸 알아 오라고 보내는 거다. 세기만 하지 말고 만져 보고 와. 배 밑창이 젖었는지 말랐는지. 장부엔 묶여 있다는 배가 밑창이 젖어 있으면, 그게 답이야.”

젊은 군감“젖어 있으면 어찌합니까.”

히데요시“어찌하긴. 그 배 주인 이름을 적어 와. 이름만. 나머지는 이 원숭이가 한다.”

부두 끝 돌계단에서 그는 배가 수평선에 걸릴 때까지 서 있었다. 시동이 털옷을 들고 와 어깨에 걸쳐 주었다. 그는 소매 속 편지를 쥐었다 놓았다 했다.

히데요시“마사이에, 아이가 나오면 여름이다. 그 전에 바다 일은 끝내. 아들 낳는 해에 아비가 바다 귀신이나 쫓고 있으면 웃음거리잖아.”

마사이에는 고개를 숙였다. 그는 그날 밤 장부 새 장에 포구 열한 곳의 이름을 적고, 그 옆에 아직 비워 둔 칸을 하나씩 그렸다.

다른 선택을 했다면…

장부 속 사라진 배 아홉 척 위에 붉은 줄이 그어지고 그 옆에 작은 글씨가 적혔다. 식어 가는 황금 다실에서 태합은 요도의 삐뚤빼뚤한 편지를 그 위에 내려놓았다.

III · 풍랑이라 적어라

히데요시는 장부를 달라고 했다. 마사이에가 내밀자 그는 붉은 먹을 찍어 사라진 아홉 척 위에 한 줄씩 줄을 그었다. 그리고 그 옆에 작은 글씨로 풍랑이라고 적었다.

나쓰카 마사이에“전하, 풍랑이 아닌 줄 아시지 않습니까.”

히데요시“알지. 그러니까 이렇게 적는 거야. 아는 대로 적으면 따져야 하잖아. 따지면 칼을 뽑아야 하고. 지금 칼 뽑으면 조선 땅 십오만이 앞뒤로 막혀.”

그는 붓을 내려놓고 고니시에게 보낼 글을 불렀다. 조선 조정과 흥정해 쌀을 사라. 값은 은으로 치르되, 바닷길로 보내던 쌀의 절반은 조선 수레로 땅길을 따라 올리게 하라.

나쓰카 마사이에“그러면 조선이 우리 밥줄을 쥐게 됩니다. 수레를 멈추기만 해도 평양 앞 군사들이 굶습니다.”

히데요시“지금은 누가 쥐고 있는데? 바다에 이름도 없는 놈이 쥐고 있잖아. 그럴 바엔 이름 있는 놈한테 쥐여 주는 게 낫지. 조선 왕은 적어도 찾아갈 집이 있으니까.”

나쓰카 마사이에“조선 왕이 그 집 대문을 걸어 잠그면요.”

히데요시“그땐 은을 더 얹어야지. 대문은 은 소리에 잘 열려. 오사카성 대문도 그랬어.”

마사이에가 물러간 뒤 그는 혼자 황금 다실에 남았다. 찻솥 물이 식어 갔다. 그는 차를 다시 저으려다 그만두고, 식은 물을 그냥 사발에 따라 마셨다.

히데요시“누군지도 모르는 놈한테 쌀값을 내는 셈이로군. 허, 이 원숭이가. 이 원숭이가 말이야.”

그는 소매 속 편지를 꺼내 등잔 가까이 펼쳤다. 요도의 글씨는 삐뚤빼뚤했고 먹이 군데군데 번져 있었다. 그는 그 편지를 장부 위에, 붉은 줄 아홉 개가 가려지도록 내려놓았다. 그러고는 금벽에 기대 눈을 감았다. 입가는 웃고 있었는데, 여섯 번째 손가락만 장부 모서리를 자꾸 긁었다.

다른 선택을 했다면…

그날 밤 태합은 붓 대신 입으로 명을 불렀다. 조선 포구의 이름이 장부에 하나씩 오르고, 군감선 세 척이 표주박 깃발을 달고 나고야를 떠났다. 배 밑창이 젖었는지 만져 보고 오라고 했다.

시점 2 / 3이순신전라좌수사

I · 어로 단속

계사년 정월 그믐 새벽, 여수 앞 경도 뒤편 작은 포구로 배들이 돌아왔다. 노 젓는 소리가 물에 젖어 낮게 깔렸다. 이순신은 갑옷 위에 어부들이 입는 누비옷을 걸치고 뱃머리에 서 있었다. 수염 끝에 바닷물이 얼어 하얗게 맺혀 있었다.

맨 앞에 들어온 것은 장부에 조운선 수리라고 적힌 그 배였다. 거북선 등판의 쇠못 사이에 아직 그을음이 끼어 있었고, 용머리 아가리에서는 유황 냄새가 났다. 나대용이 물가로 뛰어 내려와 배 옆구리를 손바닥으로 쓸어 보더니, 박힌 화살을 하나씩 세며 혀를 찼다. 이번에도 판자는 뚫리지 않았다.

들어온 것은 판옥선 네 척이었다. 지난봄 어명대로 고향에 돌려보냈던 격군 가운데 백여 명이 겨우내 한 사람씩 몰래 돌아와, 고기잡이배 노꾼 행세를 하며 이 포구에 숨어 지냈다. 거적에 덮인 반쪽짜리 용머리는 여전히 선소 구석에 누워 있었다. 나대용은 돌아온 배 옆구리에 박힌 화살을 뽑으며, 저 용머리만 다 지었어도 이런 건 안 박혔을 거라고 투덜거렸다.

송희립“사또, 오늘 일기는 어떻게 적습니까. 동헌 아전들이 요즘 자꾸 묻습니다. 배가 왜 밤에만 나가느냐고요.”

이순신“어로 단속이라 적게. 섬 사이로 불법 어선이 드나든다고.”

송희립“지난달도 어로 단속이었습니다. 그 전달도요.”

이순신“그럼 고기가 많은 겨울인가 보지. …추운데 들어가세.”

동헌 마루에 앉아 그는 일기장을 폈다. 붓이 한참 허공에 머물렀다. 그는 결국 이렇게만 적었다. 맑음. 동풍. 새벽에 서리. 고음천 어머니께 사람을 보냈다.

아침나절에 금오도 어부 하나가 동헌 마당에 들어왔다. 그는 젖은 쌀가마 두 개를 지게에 지고 와서 조심스럽게 내려놓았다. 바다에서 건졌다고 했다.

어부“사또, 요새 바다에 쌀이 떠다닙니다. 이걸 먹어도 되는 겁니까, 관에 바쳐야 하는 겁니까. 동네 사람들이 다 저만 쳐다봐서 왔습니다.”

이순신“어디서 건졌나.”

어부“소리도 앞입니다. 가마에 왜놈 글자가 찍혀 있어서… 그래서 더 겁이 났습지요.”

이순신은 가마의 젖은 거죽을 손가락으로 눌러 보았다. 소금물이 배어 나왔다. 그는 한참 아무 말 없이 그것을 내려다보다가, 송희립에게 관아 쌀 한 말을 내오게 했다.

이순신“이건 관에서 사겠네. 대신 건진 곳은 아무한테도 말하지 말게. 그 앞바다는 물살이 세서 배가 자주 깨지는 데라고만 하고.”

어부“예, 사또. 물살이 세지요. 예전부터 셌습니다. 아주 셌지요.”

어부는 쌀 한 말을 지고 돌아가며 몇 번이나 뒤를 돌아보았다. 정운이 마당 구석에서 그 뒷모습을 보며 키득거렸다. 이순신이 돌아보자 그는 헛기침을 하고 괜히 활시위를 매만졌다.

정운“사또, 저 영감 내일 또 옵니다. 쌀 한 말 맛을 봤으니.”

이순신“오면 또 사게. 그리고 녹도, 자네 오늘 밤엔 자게. 사흘째 눈이 벌겋네.”

정운“사또도 벌겋습니다.”

이순신“나는 원래 그래. 바닷바람을 오래 맞아서.”

II · 점고

이월 열흘, 한양에서 선전관이 내려왔다. 혼자가 아니었다. 일본 수군의 젊은 군감 나카무라가 통사와 군졸 열을 데리고 함께 왔다. 조정의 공문은 짧았다. 왜의 쌀배가 전라도 앞바다에서 연이어 사라졌으니, 좌수영은 배와 군사를 낱낱이 아뢰고 왜 군감의 점고를 받으라.

선소 앞 물가에는 판옥선 세 척이 묶여 있었다. 돛은 내려져 있었고, 갑판에는 지난가을 낙엽이 그대로 쌓여 있었다. 정운이 이틀 밤을 새워 일부러 쓸지 않고 모아 둔 낙엽이었다.

나카무라“이게 전부입니까. 전라좌수영의 배가 셋뿐이라고요?”

이순신“화친 뒤에 어명으로 줄였네. 격군도 돌려보냈고. 장부를 보시게.”

통사가 옮기자 군감은 장부를 넘기다 말고 배 옆구리로 다가갔다. 그는 손톱으로 뱃전의 송진을 긁어 코에 대 보았다.

나카무라“송진이 새것입니다. 묶여 있는 배에 왜 새 송진을 바릅니까.”

이순신“안 바르면 썩네. 썩은 배를 장부에 올리면 그건 거짓 장부고.”

나카무라“…말이 됩니다. 말이 너무 잘 됩니다.”

군감은 웃지 않았다. 그는 사흘을 여수에 머물며 포구마다 배를 셌다. 경도 뒤편 작은 포구에도 갔지만, 그날 그곳에는 고기잡이배 몇 척과 그물 말리는 노인들뿐이었다. 배는 전날 밤 모두 돌산 너머로 옮겨 놓았다.

군감이 떠난 날 밤, 정운이 정탐선을 몰고 돌아왔다. 그는 젖은 짚신을 벗지도 않고 동헌 마루로 올라섰다.

정운“사또, 부산포에 배가 모이고 있습니다. 쌀배만 백 척이 넘고, 이번엔 전선 서른이 붙습니다. 보름 뒤 사리 물때에 서쪽으로 나온답니다. 뒤처진 놈 하나씩 떼어 먹던 때하고는 다릅니다.”

송희립“사또, 이번에 나가면 숨길 수가 없습니다. 백 척이 어로 단속에 걸렸다고 적을 수는 없잖습니까.”

정운“그러니 한 번에 크게 치자는 겁니다! 저 쌀이 평양에 닿으면 왜놈들은 북쪽에서 한 해를 더 버팁니다. 그럼 또 한 해 우리 땅에서 밥을 먹고요.”

이순신“녹도, 조정은 왜와 화친을 지키고 있네. 군감이 방금 다녀간 걸 봤잖나. 우리가 백 척을 태우면 다음엔 군감이 아니라 군사가 오네. 여수로. 그 길목에 고음천도 있고.”

정운“그럼 숨으십니까. 석 달 동안 한 척씩 떼어 먹은 건 다 뭐였습니까.”

이순신은 대답하지 않았다. 그는 일기장을 펴서 오늘 날씨를 적으려다 창밖을 보았다. 바람이 남동쪽으로 돌고 있었다. 보름 뒤 사리 무렵이면 다시 북서풍이 불 것이었다.

이순신“송희립, 고음천에 사람을 보내게. 어머니께 쌀 한 섬하고… 아니, 됐네. 그냥 안부만 여쭙게.”

이순신의 선택

III · 사리 물때

보름 뒤, 사리 물때의 밤이었다. 이순신은 배들을 견내량 북쪽 바위 그늘에 숨겼다. 불은 하나도 켜지 않았고, 격군들은 노 손잡이에 헝겊을 감았다.

이순신“깃발은 내리게. 북도 치지 말고. 오늘도 우리는 없는 배야.”

정운“사또, 백 척입니다. 없는 배가 백 척을 태우면, 그건 귀신입니다.”

이순신“귀신이라 하면 귀신이라 하게 두지. 귀신은 장계를 안 써도 되니 편하네.”

등불을 단 쌀배 행렬이 물목으로 들어섰다. 좁은 물길이라 배들은 한 줄로 늘어설 수밖에 없었다. 이순신은 손을 들었다가 내렸다. 불화살이 먼저 날았고, 이어 총통 소리가 바위 사이에서 몇 겹으로 울렸다.

싸움은 물때가 바뀌기 전에 끝났다. 앞쪽 쌀배 스무 척 남짓이 불탔고, 뒤쪽 배들은 물목을 빠져나가지 못한 채 부산 쪽으로 뱃머리를 돌렸다. 호위 전선 몇 척이 쫓아왔지만 어두운 바위 사이에서 길을 잃고 되돌아갔다. 조선 배는 한 척도 깨지지 않았다. 다만 격군 둘이 돌아오지 못했다.

이순신“이름을 적게. 둘 다. 고향이 어딘지도.”

송희립“사또, 장계에는 뭐라 씁니까.”

이순신“쓰지 말게. 아직은. 조정이 묻거든 그때 내가 쓰지.”

이틀 뒤, 부산의 일본 진영이 발칵 뒤집혔다는 소문이 바다를 건너왔다. 군감이 이번엔 배를 끌고 다시 오겠다는 말도 함께였다. 정운은 그 말을 전하며 웃었고, 이순신은 웃지 않았다.

그날 밤 일기에는 이렇게 적혔다. 맑음. 북서풍. 둘을 잃었다. 그는 그 아래에 한 줄을 더 적다가, 먹이 마르기 전에 손바닥으로 문질러 지웠다. 종이에 검은 얼룩만 남았다.

정운“사또, 지운 줄은 뭐였습니까.”

이순신“날씨였네. 잘못 적었어. 자네는 가서 그 두 사람 집에 보낼 쌀이나 챙기게.”

다른 선택을 했다면…

배는 돌산 너머 만에 소나무 가지를 덮고 숨었고, 사리 물때에 사또는 말을 타고 고음천으로 갔다. 마당에서 장작을 패는 동안 먼바다에는 작은 등불이 하나둘 켜졌다.

III · 장작

이순신은 배를 모두 돌산 너머 깊은 만으로 옮기게 했다. 밤 출항은 그날로 멈췄다. 격군들은 그물을 들고 갯벌로 나가 어부 행세를 했고, 나대용은 배 위에 소나무 가지를 덮다가 몇 번이나 한숨을 쉬었다.

정운“사또, 그날 밤 저는 어디 있으면 됩니까. 배 위입니까, 갯벌입니까.”

이순신“집에 있게. 녹도로 가서 하루 쉬고 오게.”

정운“안 갑니다. 여기서 보겠습니다. 다 지나가는 걸 다 보겠습니다.”

사리 물때가 되자 이순신은 말을 타고 고음천으로 갔다. 군관들은 사또가 왜 하필 그날 어머니를 뵈러 가는지 묻지 않았다.

어머니는 툇마루에서 버선을 깁고 있었다. 바늘귀가 안 보인다며 실 끝을 몇 번이나 입에 물었다 뺐다. 이순신은 대신 실을 꿰어 드리고, 마당으로 내려가 장작을 팼다. 도끼질 소리가 저녁 내내 났다.

어머니“얘야, 장작이 한 겨울 치는 되겠다. 이제 봄인데 누가 다 때니.”

이순신“쌓아 두면 쓰실 데가 있겠지요.”

어머니“너 오늘 바다 보기 싫어서 왔구나.”

이순신은 도끼를 내려놓았다. 해가 지자 마당 너머 먼바다에 작은 등불들이 하나둘 켜졌다. 등불은 줄을 지어 서쪽으로 천천히 흘러갔다. 그는 그것을 세지 않으려고 장작더미만 보았는데, 셈은 저절로 되었다.

이순신“어머니, 저녁은 드셨습니까.”

어머니“먹었다. 너는 안 먹었지. 앉아라, 조밥이라도 내오마.”

이튿날 아침 여수로 돌아오니, 정운이 동헌 마당에 밤새 서 있던 그대로 서 있었다. 눈이 붉었다.

정운“백열네 척입니다, 사또. 하나도 빼지 않고 셌습니다.”

이순신“그래. 나도 셌네. 백열세 척이던데.”

정운은 무어라 말하려다 입을 다물었다. 이순신은 일기장을 펴서 날씨를 적었다. 흐림. 남동풍. 남은 한 척이 어디로 갔는지는 적지 않았다.

다른 선택을 했다면…

사리 물때의 밤, 배들은 불 하나 켜지 않고 견내량 북쪽 바위 그늘에 숨었다. 격군들은 노 손잡이에 헝겊을 감았고, 장수는 깃발도 북도 쓰지 말라고 했다. 좁은 물목으로 등불 행렬이 들어서고 있었다.

시점 3 / 3선조조선 국왕

I · 날씨만 적힌 장계

계사년 이월 그믐 아침, 선조는 편전에 들기 전 작은 서고에 혼자 앉아 장계 더미를 넘겼다. 맨 위에는 전라좌수사 이순신의 장계가 있었다. 좌수영은 무사하고 바다는 조용하며, 어로 단속으로 밤에 배를 몇 번 띄웠다는 내용이었다. 끝에는 날씨가 적혀 있었다. 맑음, 동풍.

선조“어로 단속이라. 겨울 바다에 고기가 이렇게 많았던가.”

혼잣말이었다. 그는 장계를 내려놓고 그 밑의 것을 집었다. 대마도주 소 요시토시가 일본 쪽 뜻을 받아 올린 글이었다. 전라도 앞바다에서 쌀배 열여섯 척이 사라졌으니 조선 조정이 범인을 찾아 달라는 내용이었다. 공손한 글이었지만, 마지막 줄에 쌀배를 지키려면 조선 포구에 군사를 둘 수도 있다는 말이 슬쩍 붙어 있었다.

류성룡이 들어와 엎드렸다. 선조는 두 장을 나란히 마루에 내려놓고 손바닥으로 주름을 폈다.

선조“경, 앉으시오. 이 두 글을 같이 읽어 보오. 한 장은 바다가 조용하다 하고, 한 장은 바다가 시끄럽다 하오. 과인은 어느 쪽을 믿으면 되겠소.”

류성룡은 두 장을 다 읽고 나서도 한참 말이 없었다. 그는 이순신의 장계를 다시 집어 날씨가 적힌 줄을 손가락으로 짚었다.

류성룡“좌수사는 거짓말을 못 하는 사람입니다, 전하. 그래서 날씨만 적었겠지요.”

선조“그럼 경은 그 사람이 거짓말을 안 했다는 거요, 했다는 거요.”

류성룡“적지 않았다는 겁니다.”

선조는 옥대 고리를 엄지로 문질렀다. 고리가 손톱에 걸려 작게 딸깍했다. 웃는 것도 찌푸리는 것도 아닌 얼굴로, 그는 창밖 회랑 끝에 앉은 참새를 보았다.

선조“과인이 저 사람을 좌수사로 보낼 때 경이 천거했지요. 품계를 몇 단이나 건너뛰어서. 그때 대간들이 꽤 시끄러웠소.”

류성룡“예, 전하. 신이 천거했습니다.”

선조“지금 그 사람을 잡아 올리라 하면, 경은 뭐라 하겠소.”

류성룡“잡아 올릴 죄가 장계에는 없습니다.”

선조“장계에는 없지. 장계에는.”

류성룡“전하, 하나 더 아뢸 것이 있습니다. 금강산 승병들이 철원 길목에서 일본 징발대를 몇 번 돌려보냈다 합니다. 칼은 뽑지 않고 길만 막고 섰다고요. 일본 쪽은 그 일도 따로 적어 두었을 겁니다.”

선조“중들은 길을 막고 수군은 바다를 막고. 그러고도 다들 과인한테는 아무 일도 없다고 하는구먼.”

류성룡“사명대사가 가토 진영에서 돌아와 남긴 말이 있습니다. 가토가 바다 쪽 소식을 듣고 웃었답니다. 조선에도 말 안 듣는 장수가 있구나, 하고요. 그러고는 그 장수를 찾으라는 말은 끝내 안 했답니다.”

선조“적장이 웃었다니. 과인은 웃을 수가 없는데… 그 중은 그 말을 왜 과인한테 전하라 했을꼬.”

선조는 소 요시토시의 글을 접어 장계 밑에 깔았다. 그리고 이순신의 장계만 소매에 넣었다.

선조“편전에 들 시각이오. 경, 이 일은 아직 대신들한테 꺼내지 마시오. 꺼내면 다들 한마디씩 할 텐데, 과인은 그 한마디들을 먼저 듣고 싶지가 않구려.”

II · 열흘의 말미

삼월 초사흘, 소 요시토시가 사정전 섬돌 아래 엎드렸다. 젊은 대마도주는 말씨가 부드럽고 절이 깊었다. 그는 범인을 찾을 말미로 열흘을 드리겠다고 했다. 열흘 뒤에도 바다가 시끄러우면 일본 수군이 직접 포구를 지키겠다는 것이었다.

소 요시토시“전하, 태합께서는 조선을 의심하지 않으십니다. 다만 바다에 이름 없는 도적이 있으니, 조선과 일본이 같이 잡자는 뜻이옵니다.”

선조“같이 잡자. 도적이 조선 사람이면 어찌하겠소.”

소 요시토시“그렇다면 더욱 조선이 먼저 잡으셔야지요, 전하.”

요시토시가 물러간 뒤 선조는 비변사 대신들을 불렀다. 사정전은 금세 시끄러워졌다. 윤두수는 좌수사를 잡아 올려 문초하고 남쪽 포구는 일본 군감과 함께 지키자고 했다. 땅 위의 화친을 바다 때문에 깰 수는 없다는 것이었다.

윤두수“전하, 일 년 가까이 피 한 방울 안 흘리고 버텼습니다. 곡식을 내준 목사들, 열쇠를 내준 판윤들, 그 사람들 체면은 다 어찌합니까. 장수 하나 때문에 그걸 다 엎을 수는 없습니다.”

병조판서 이항복이 고개를 들었다. 그는 권율의 사위였다.

이항복“장인이 곡식을 내준 건 피를 막자고 한 일이지, 왜군 배를 불리자고 한 일이 아닙니다. 지금 왜군은 우리 땅 위에서 우리 쌀과 제 나라 쌀을 같이 먹고 있습니다. 바다 쌀이 끊기면 그 손님들도 언젠가는 돌아갈 생각을 하겠지요.”

윤두수“병판, 그 말은 좌수사가 한 일이라고 인정하는 말이오?”

이항복“누가 했다고 한 적 없습니다. 바다가 그랬다고 했지요.”

목소리가 높아지자 선조는 손을 들었다. 대신들이 물러가고 류성룡 한 사람만 남았다. 선조는 소매에서 이순신의 장계를 꺼내 다시 펼쳤다. 몇 번을 접었다 편 탓에 접힌 자리가 보풀처럼 일어나 있었다.

선조“윤 대감은 잡아 오라 하고, 병판은 놔두라 하오. 경은 아직 말이 없구려.”

류성룡“신은 전하께서 무엇을 고르시든 그 뒤를 수습하겠습니다. 다만 이번에는 신이 먼저 말씀드리지 않겠습니다.”

선조“경이 안 하면 누가 하오.”

류성룡“전하께서 하셔야지요.”

선조는 옥대 고리를 쥔 손에 힘을 주었다. 고리가 손바닥을 파고들었다. 열 달 전 그는 칼이 무서워 길을 열었다. 그 길은 지금도 조용했고, 바다만 혼자 시끄러웠다.

선조“과인이 그 사람한테 명령을 한 번도 안 내렸소. 나가라는 말도, 멈추라는 말도. 그런데 그 사람은 혼자 다 알아서 했구려. …과인이 무슨 말을 해야 그 사람이 멈추는지도 과인은 모르오.”

선조의 선택

III · 바다로 가는 교지

선조는 그날 밤 승지를 부르지 않고 직접 교지를 썼다. 류성룡이 먹을 갈았다. 전라좌수사 이순신에게 전라·경상·충청 세 도의 바다를 맡기고, 그 바다에서 일어나는 일은 모두 왕명으로 한 일로 삼는다는 내용이었다.

선조“경, 수군통제사라 하면 되겠소? 이름이 너무 거창한가.”

류성룡“거창해야 합니다, 전하. 그래야 그 사람이 다시는 어로 단속이라고 적지 않겠지요.”

선조는 피식 웃고 어보를 찍었다. 손이 조금 떨려 인주가 한쪽으로 번졌다. 그는 다시 찍지 않았다.

열흘의 말미가 차는 날, 소 요시토시가 다시 섬돌 아래 엎드렸다. 선조는 이번에는 그를 오래 기다리게 하지 않았다.

선조“대마도주, 조선의 바다에서 일어난 일은 조선이 알아서 다스리겠소. 쌀배를 지키고 싶거든, 앞으로는 조선 수군에게 물길 안내를 청하시오. 값은 따로 정합시다.”

소 요시토시“전하, 그 말씀을 그대로 전하면 태합께서…”

선조“그대로 전하시오. 덧붙이지도 빼지도 말고. 대마도주는 장인을 닮아 말을 잘 다듬는다 들었소만, 이번 것은 다듬지 마오.”

요시토시는 한참 엎드려 있다가 물러갔다. 그의 등이 섬돌 아래로 사라지자 선조는 옥대 고리에서 손을 뗐다.

새벽에 비가 내렸다. 교지 함을 멘 선전관이 광화문을 나섰다. 선조는 회랑 끝에 서서 그 뒷모습을 보았다. 내관이 우산을 받쳐 들고 따라왔지만 그는 손을 내저었다.

류성룡“전하, 옥체가 상하십니다.”

선조“좀 맞겠소. 과인이 저 사람한테 처음으로 명령을 보내는 날이오. 날씨라도 알아 둬야 나중에 그 사람 장계하고 맞춰 보지 않겠소.”

말발굽 소리가 빗속으로 멀어졌다. 남산 쪽 일본군 진영에서는 아직 아무 소리도 나지 않았다. 선조는 젖은 소매를 털지도 않고 한참 그쪽을 보다가, 류성룡에게 오늘 날씨를 사관에게 적게 하라고 일렀다.

다른 선택을 했다면…

경회루 연못 위로 살구꽃잎이 떠다니던 날, 왕은 대마도주에게 술을 내렸다. 회랑에서 내려온 좌의정은 엎드리지 않았고, 그날 밤 여수로 보낼 편지는 세 번 찢겼다.

III · 불러올린 장수

선조는 소 요시토시를 경회루로 불러 술을 내렸다. 연못 위로 살구꽃잎이 떠다녔다. 왕은 잔을 들기 전에 먼저 말했다.

선조“남쪽 포구는 조선 수군과 일본 군감이 함께 지키도록 하겠소. 전라좌수사는 한양으로 불러올려 그간의 일을 묻겠소.”

소 요시토시“성은이 망극합니다, 전하. 태합께서 크게 기뻐하실 겁니다. 그 장수는 저희 쪽에 넘겨주시는 겁니까.”

선조“불러올린다 했지 넘긴다 하지 않았소. 조선 장수는 조선 왕이 묻소. 그건 태합께도 그리 전하시오.”

요시토시는 잔을 비우고 깊이 절했다. 선조도 잔을 비웠다. 술이 목에 걸려 그는 기침을 한 번 했고, 내관이 물을 가져오려 하자 손을 저었다.

요시토시가 물러간 뒤 류성룡이 회랑에서 내려왔다. 그는 왕 앞에 섰지만 엎드리지 않았다. 선조는 그것을 보고도 꾸짖지 않았고, 빈 잔만 손가락으로 빙글 돌렸다.

류성룡“전하, 그 사람을 불러올리시면 남쪽 바다에는 칼이 하나도 남지 않습니다.”

선조“알고 있소. 그러니 경이 직접 편지를 써 주시오. 교지만 내려가면 그 사람이 겁을 낼 테니. 잡으러 가는 게 아니라고.”

류성룡“겁을 낼 사람이 아닙니다, 전하.”

선조“그럼 안 올 수도 있겠구려.”

류성룡“올 겁니다. 그 사람은 명령이 오면 따르는 사람입니다. 그동안 명령이 없었을 뿐이지요.”

선조는 연못을 내려다보았다. 꽃잎 하나가 잔 속으로 떨어졌다. 그는 그것을 건지지 않고 잔을 내려놓았다.

선조“과인이 처음 내리는 명령이 멈추라는 말이로구려. 그 사람한테는.”

류성룡은 대답하지 않았다. 그는 그날 밤 여수로 보낼 편지를 썼다가 세 번 찢었다. 네 번째 편지에는 날씨만 적었다. 한양은 맑고, 꽃이 이르게 피었다고.

다른 선택을 했다면…

왕은 승지도 부르지 않고 직접 교지를 썼고, 인주는 손이 떨려 한쪽으로 번졌다. 열흘 만에 다시 엎드린 대마도주 앞에서는 말을 다듬지 말라고 했다. 새벽 비 속으로 교지 함이 광화문을 나섰다.